2005/03-04 : Culture Club - 전기영화 관람법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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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Club - 전기영화 관람법
 
  More Human than a Fiction  
정 성 욱 대리 | 영상사업팀
swchung@lgad.lg.co.kr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다. 작년 하반기 개봉한 <역도산> <수퍼스타 감사용> 같은 한국 영화 외에도 ‘비행 모걸(mogul; 거물)’ 하워드 휴즈의 일생을 다룬 <에비에이터>, 제임스 매튜 배리(James Matthew Baronet Barrie)가 <피터팬>을 집필하는 과정을 다룬 <네버랜드를 찾아서 >, 전설적 아티스트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담은 <레이> 같은 미국 영화들까지, 1년도 채 안 된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많은 전기영화가 개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2004년 일본 아카데미를 휩쓴 작품 역시 한국계 폭력배 김준평의 삶을 다룬 <피와 뼈>, 그리고 올 초 프랑스에서 개봉되어 화제를 몰고 온 <샹 드 마스의 산책자>라는 작품 역시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비밀스런 삶을 소재로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실존인물에 관한 영화의 붐이 전세계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문화적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인지, 아니면 영화산업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인 미투이즘(Me-tooism)의 또 다른 발현인지를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으나, 여기서는 실존인물을 다룬 ‘전기영화’라는 문화현상의 단순한, 그야말로 개괄적인 측면만 훑어보고자 한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내 멋대로 만들기

위인전의 일반적 역할은 ‘교육’이지만, 전기영화는 교육보다는 ‘오락’이 목적이다. 다시 말해 위인전의 주인공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무언가가 있는 인물인 반면에, 전기영화 주인공의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극장에 와서 돈을 주고 시간을 할애해서 볼만큼 오락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때로는 훌륭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흥미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허슬러>지 발행인의 일대기를 다룬 밀로스 포먼 감독의 <래리 플린트(The People Vs. Larry Flint)>나, 아돌프 히틀러를 그려낸 <다운폴>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극명하다. 플린트나 히틀러는 대중적 존경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지만 충분히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재임에는 틀림없다.
최근 전기영화들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워드 휴즈나 레이 찰스, 프랑수아 미테랑, 역도산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훌륭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일생이 영화화된 것은 단지 그들의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기벽·여성문제·마약문제·불행 등, 그들의 일생에 ‘오락적 가치’를 부여한 오점들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오점과 업적이 얽히고설킨 한 인간의 복잡한 인생을 다루는 데에는 작가의 시선과 주장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인간은 주관의 동물이기에 인간의 창작에는 언제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주관 때문에 그 창작물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사실 교양이나 상식을 장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기영화는 단지 창작자가 해석한 한 사람의 인생일 뿐이다. 이고르 탈란킨(Igor Talankin) 감독의 <차이코프스키(1969)>가 주인공을 애국적인 국민작곡가로 그려냈다면, 켄 러셀(Ken Russell)의 <차이코프스키의 일생(Music Lover, 1970)>은 동성애와 음악을 탐닉했던 한 유미적인 러시아 예술가의 고뇌를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해석의 시선은 창작자가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태도에 따라 어떤 전기영화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라는 일대기적인 구성을 버리고 그의 삶의 일부만을 다루기도 한다. 올해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올리버 허시비겔(Oliver Hirschbiegel) 감독의 <다운폴> 역시 히틀러의 일생 중 베를린 함락 직전 지하벙커에서 보낸 최후의 12일 만을 다룬다.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의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년의 편린을 발췌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과 동조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이 영화에서의 실존인물의 삶은 픽션 캐릭터의 삶을 장식하는 장치일 뿐이다. 마크 포스터(Marc Forster)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극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의 삶을 시시콜콜하게 따라가지 않는다. 영화는 그가 데이비스가(家)의 미망인,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필생의 역작 <피터팬>에 대한 영감을 얻고 현실화하는 부분만을 보여준다. 게다가 부인과의 이혼, 실비아와의 만남 등 일부 사건들의 발생 순서를 바꿔놓아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실에 충실하기보다는 좀더 완성도 있는 작품을 뽑아내야 하는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당연한 직무수행인 것이다. 실제 인물인 배형진 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은 현실의 각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과 설정마저 변화시킨 채 ‘배형진 군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창작자가 자신이 소통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얼마든지 ‘사실’을 각색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상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이다.

네 멋대로 보고, 네 멋대로 해석하라

문제는 이러한 ‘해석 작업’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몰이해다. 그러한 몰이해는 그 특성이 너무나 유치해서 그 배경에 현실과 영화를 구별 못하는 유아적인 인지혼동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궁금해질 정도다. 멀리는 80년대 말,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가 감독했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대한 종교계 일부의 반발이나, 최근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 같은 것이 그렇다. 그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닐진대, 예수가 되었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 편집자 주)가 되었든, 실존인물을 다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극영화의 형태를 띄면 창작자의 주장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주장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취향이나 사상에 맞지 않는다고 말살하려 하거나 왜곡, 혹은 변형시키려 든다면 그야말로 시장 바닥에 주저앉아 떼쓰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것은 영화를 받아들이는 대중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그 임의의 판단에 따라 강요하는, 마치 관광버스에서 풀 볼륨으로 트로트 틀어대기와 같은 횡포는 아닐까.
전기영화나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 역시 결국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그저 관람자에게 제시를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제시 속에서 뭔가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감상자의 몫일 뿐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