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06 : Culture Club -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무관심’과 ‘잘못된 관심’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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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Club - 야오이물과 팬픽 이야기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무관심’과 ‘잘못된 관심’
 
정 성 욱 대리 | 영상사업팀
swchung@lgad.lg.co.kr

 
2004년 2월 4일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매체물의 개별 심의기준 항목 중에서 삭제하기로 입법예고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성적으로 보기에는 당연한 결정에 지극히 감성적인 반발이 엉켜 논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싫은 것’은 대부분 끝까지 싫은 법이니까. 그래도 ‘동성애’ 자체를 유해물로 규정하는 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철수와 영희는 사랑했다”라는 문장은 청소년 유해물이 아니다. 그러나 “철수의 XX가 영희의 XX에 XX하고 XX한 순간 영희의 입에서는…” 이런 식의 음란한 표현이 되면 그제서야 청소년 유해물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철수와 훈이는 사랑했다”라는 문장은 철수가 훈이에게 어떤 행위를 하기도 전에 이미 유해물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이다. 그야말로 동성이 좋아서 동성과 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격리되고 감춰져야 하는 여학교 앞 ‘바바리맨’ 수준의 부조리, 혹은 변태라고 딱지를 붙여버린 셈이었던 거다. 커밍아웃한 홍 모 씨는 예전 조항에 따르면 그 존재 자체가 청소년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유해물’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논쟁 자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를 정도로 우리문화에서 동성애의 노출이나 역할은 미미하다. 장정일의 소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퇴폐성을 강조하는 장치로 쓰이거나,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처럼 ‘기구함’을 위한 설정으로 쓰이거나, 가끔 드라마에서 코믹 요소로 쓰이는 정도뿐이다. 한마디로 ‘낯선 무언가’라는 이야기이다. 국내 최초의 본격 동성애 영화를 표방했던 <로드 무비> 역시 제작진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특이한 것’을 팔아먹고자 하는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었다.

‘달콤한 마네킹 쇼’

‘그레코로만(Greco-Roman)’이라는 동성애와 무척 친숙한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는 서양에서는 농담 삼아 “누구나 게이 삼촌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동성애가 보편성과 일상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공포감과 혐오 역시 구체적이고 치열하다. 필자가 지내던 미국 오스틴만 하더라도 술 취한 백인 젊은이들에 의한 ‘게이 사냥’이 가끔 있었으니까 오히려 동성애가 낯선 우리나라가 동성애자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더욱 살기 좋은 곳일지도 모른다.
이런 동성애에 대한 이해나 표현의 부재를 채우는 것은 야오이물 혹은 팬픽이라 불리는 유사 동성애물이라는 괴장르들이다. 여기서 ‘유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세상에 ‘연애물’이라는 장르는 있어도 ‘이성애물’이라는 장르 구분이 없듯이 ‘동성애물’이라는 장르 구분 역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런 장르가 다루는 것은 이미지로서의 동성애일 뿐 그 본질과는 큰 괴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야오이는 ‘야마나시·오치나시·이미나시(절정 없음·완결 없음·의미 없음)’라는 일본어의 앞 글자만 따서 만든 용어로, 문자 그대로 절정도 없고 완결도 없고 의미도 없지만 미소년들이 나와서 서로 끈끈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순정만화의 한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다. 장르명의 문자적 의미만 놓고 보면 스토리 라인도 없고 계속 행위만 늘어 놓는 포르노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기실 포르노처럼 야오이물 역시 한두 개만 보면 빤히 보이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대개 비교적 강한 미소년 캐릭터가 비교적 약한 미소년 캐릭터를 학대하고 유린하다가 귀여워도 해주다가 하는 등의 이야기가 바뀌는 설정을 배경으로 계속 재생산되는 양태다. 그런데 소위 꽃미남들인 야오이물의 주인공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남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형태만 남자일 뿐이지 대사나 행동, 그리고 갈등의 정서나 동기의 논리가 여고생들이 노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사뭇 다카라즈카(寶塚)에 나오는 남장 여배우들 같은 모습이다. 플라스틱화되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레즈비언 포르노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스스로의 행복보다는 관음자들의 행복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인성도 세계관도 배제되어 있다.

 
 

 

야오이가 팬픽으로 확장된 것은 아마도 이런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필연적 진화였을 것이다. 팬픽은 팬들이 쓰는 허구라는 의미의 ‘Fan Fiction’의 준말로, 원래는 동성애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주로 인기 있는 기존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이용해서 팬들이 ‘제 멋대로’ 에피소드를 재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드라마 <대장금>의 한 팬이 너무 감동과 영감을 받은 나머지 ‘장금이의 딸이 궁궐에 의녀로 입궐하는 내용’의 소설을 쓰는 것이 바로 팬픽이다. 이렇게 기존에 확립되어 있는 탄탄한 캐릭터나 설정 등의 연관정서를 차용할 수 있다는 점은 알맹이 없는 야오이물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해주었다. 저 유명한 <슬램덩크>도 채치수와 강백호가 훈련 후에 샤워실에서 어쩌고 하는 식의 노골적 성애물로 재생산된 바 있다. 이러한 야오이적 팬픽의 소재가 가상 인물에서 실존하는 아이들(Idol) 스타로 확장된 것 역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매체에서는 당연한 변화였을 것이다. 인기 남자 아이들 그룹은 이런 팬픽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고, 심지어 월드컵 때는 박지성·홍명보·김남일 선수 등이 등장하는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던 적도 있었다.
야오이나 팬픽은 안전한 성적 팬터지를 제공하는 것을 그 존재 목적으로 하고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스타를 야한 상황에 놓고 상상하면서도 그 상대를 다른 남자로 설정함으로써 질투의 감정을 배제시킬 수 있다는 점은 마치 포르노는 좋지만 남자의 벗은 몸이 보기 싫어 레즈비언물을 즐긴다는 일부 남자들의 정서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자신을 환상 속에 직접 대입시키기보다는 안전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억압과 충동이 혼재하는 어지러운 청소년기의 성적 감수성에 단비처럼 내리는 일종의 낙원이요 피난처일 수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유사 동성애 장르가 막연한 환상을 전파하여 소위 ‘팬픽 이반’이라는 본질이 아닌 이미지 추종의 동성애자를 양산한다는 식의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흥미로운 것은 이런 걱정은 동성애 혐오자와 동성애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야오이가 욕망의 배출에 대한 비교적 건전한 창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야오이의 포맷을 진지한 드라마로 승화시킨 이마 이치코나 요시나가 후미 같은 작가들을 통해 성적 소수자에 대한 대변(Representation)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은 순기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관심보다는 잘못된 관심이 차라리 희망적일 때도 있으니까….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