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2 : 광고나라 산책 _ ① 詩가 있는 광고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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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나라 산책 _ ① 詩가 있는 광고
  광고나라에는
시(詩)가 산다
 
이희복 | 상지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boccaccio@hanmail.net



광고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직업이고, 다른 이에게는 오락이 된다. 물론 가끔은 공부가 되기도 한다. 바로 광고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학자들이 자기 전공에 따라 광고를 “마케팅이다. 커뮤니케이션이다”, “아니다,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다”라며 주장할 때 소비자들은 저만치 앞서 생활의 한 양식(Way of Life), 즉 문화로 받아들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고가 갖는 이런 문화로서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닫고 광고인들은 2004년 한국광고대회에서 부랴부랴 ‘Read the Future! Lead the Culture!’를 주제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광고와 문화의 관계를 논하기 시작했다.
‘문화의 통조림’, ‘쇼윈도’, ‘시대를 비추는 거울’ 등의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광고는 이미 시대와 함께 문화를 만들기도 하고, 그 문화에 다시 영향을 받는 위치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광고를 문화로 볼 때 다양한 문화의 형식이 그 안에 존재한다. 대중과 고급, 서양과 동양, 남성과 여성 같은 이분법적 문화에서 디자인·애니메이션·음악·멀티미디어·문학 등 장르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나타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광고와 많이 닮은 시(詩)를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카피가 시에게 큰소리치다

시는 일찍부터 우리 민족에게 사랑받아온 문학의 한 분야이다. 시를 잘 써야 과거시험도 볼 수 있고 장원급제해서 어사화(御史花)를 쓸 수 있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시를 읽는 것이고, 작문은 대부분 시를 짓는 것과 같았다. 또한 여흥을 즐길 때도 오늘날 힙합의 운율(Rhyme) 맞추기 놀이처럼 시의 각운을 맞춘 오언절구, 또는 칠언절구를 주고받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무원·직장인·학생·건달 모두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와 광고의 만남은 광고를 문화적(?)으로 만드는데, 재미있는 것은 시가 광고를 모방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혼성모방이나 재현의 일상화, 수용자의 선택권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신문의 기사 선택을 좌우하는 헤드라인 작성을 담당하는 신문사 편집기자와 데스크들이 광고회사에서 헤드라인 작성법을 배우는 세상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출발한 광고 카피작법이 그 스승인 신문의 글쓰기에 영향을 주게 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광고가 문화에, 카피가 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의대 이현우 교수는 “광고는 문학의 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인해 대중문화의 동업자인 문학에(시에) 든든한 밥줄 노릇을 한다”고 하면서, 그 어떤 카피라이터도 누려보지 못했던 특권을 광고가 문학에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으로, 광고가 카피가 시에게 큰소리 칠 때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함민복의 시가 많이 인용된다. 시인의 상상력을 광고가 대신하고 있다. 시인은 ‘광고의 나라’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전략)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휴먼테크의 아침 역사를 듣는다, 르네상스 리모컨을 누르고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 휴먼퍼니처 라자 침대에서 일어나 우라늄으로 안전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토피아의 전등을 켜고 21세기 인간과 기술의 만남 테크노피아의 냉장고를 열어 장수의 나라 유산균 불가리스를 마신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누군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는, 드봉 아르드포 메이컵을 하고 함께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꼼빠니아 패션을 입는다 간단한 식사 우유에 켈로그 콘프레이크를 먹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명작 커피를 마시며 어떤 두려움이 닥쳐도 할 말은 하고 쓸 말은 쓰겠다는 신문을 뒤적인다 호레이 호레이 투우의 나라 쓸기담과 비가 와도 젖지 않는 협립 우산을 챙기며 정통의 길을 걸어온 남자에게는 향기가 있다는 리갈을 트럼펫 소리에 맞춰 신을 때 사랑하는 여자는 세련된 도시감각 영에이지 심플리트를 신는다 재미로 먹는 과자 비틀즈와 고래밥 겉은 부드럽고 속은 질긴 크리넥스 티슈가 놓여 있는 승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제3세대 승용차 엑셀을 타고 보람차게 알찬 주말을 함께 하자는 방송을 들으며 출근한다.

아아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행복과 희망이 가득 찬
절망이 꽃피는, 광고의 나라
― 함민복 시, ‘광고의 나라’ 중에서 ―

시인 함민복은 이 시에서 광고와 자본주의를 비판해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자본주의의 시로서 광고를 풍자한 내용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시인은 광고를 너무도 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함민복만이 아니다.

선언 또는 광고 문안
단조로운 것은 生의 노래를 잠들게 한다.
머무르는 것은 生의 언어를 침묵하게 한다.
人生이란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닌 것.
문득──스쳐 지나가는 눈길에도 기쁨이 넘쳐나니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CHEVALIER
― 오규원 시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중에서 ―

오규원의 경우는 작가 자신의 작품세계로 광고를 적극 패러디한 경우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 시에서는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 있는데, 구두 브랜드 슈발리에의 카피를 부분적으로 그대로 인용했다. 광고의 비주얼을 시어로 형상화한 것이다.

시가 있는 커뮤니케이션, 멋지지 아니한가

그러나 근본적으로 은혜를 입은 쪽은 광고임에 틀림없다. 광고의 언어는 시를 모방하고 노래를 따라하면서 성장해왔다.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로는 일부를, 때로는 전부를 들어다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저작권과 지적소유권이 법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니 사용자는 유념해야 하겠다. 사후 50년 조항을 생각한다면 그 이전의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는 게 상책이겠다. 그러나 아직 시를 가져왔다고 음악이나 그림처럼 까탈스럽게 소유를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고이 접어, 고이 접어, 폴더레라.’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이 21세기 자본주의의 시로 이렇게 변신했다. LG싸이언 김태희 폴더폰 광고는 시가 광고 속으로 들어온 사례다. 모델이 패러디한 시를 읊으며 몸을 반으로 접어 폴더형 휴대폰 모양을 흉내 낸 것이다.
광고는 시의 한 소절을 천진한 소녀의 말투로 낭송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하고 호기심을 가질 즈음, 느닷없이 몸을 철봉에서 반으로 접어버린다. 고깔을 ‘접는다’와 폴더를 ‘접는다’로 대상은 다르지만, 시에 대한 우리의 관념 역시 반으로 접어버렸다. 시청자의 기대를 위반하여 재구성된 모델의 몸짓과 카피는 기존의 승무를 광고 속에서 새롭게 탄생시켰다.
김태희 : 내가 너한테 해줄 건 없고,
시나 한 수 읊어줄까?
내가 문학소녀였잖아?
승무,
남 : 나도 그 시 알아
김태희 : 조용히 해!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고이접어, 고이접어 폴더래라~
어때!
NA : 싸이언

서산대사의 시 전체를 가져다 광고카피로 바꿔놓은 대우증권의 사례는 광고 속으로 시가 들어온 또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김구 선생은 해방 후 혼란스런 정국에서 38선을 넘으며, 또 많은 후대의 정치인들은 자기의 결심을 알리는 순간에 자주 인용했는데, 특히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며 광고에 소개되었다. 아이디어의 빈곤으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필자가 평소 좋아하던 시를 실제 광고로 활용한 경우다. 좋아하던 시 하나가 적절한 광고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늦었지만 새해 새 출발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할만하다.
고승의 상서로운 기운까지 느낄 수 있는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NA :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아무렇게나 하지 말지니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새천년 투자의 길이 되겠습니다.
길을 아는 사람들
대우증권

시에 음율·리듬과 박자가 더해지면 노래가 된다. 교보생명은 ‘마음에 힘이 되는 시하나 노래하나’ 캠페인으로 2004년 대한민국광고상을 수상했는데, 일상에서 누구나 하나쯤 암기하는 시구나 노래 한 소절이 어려울 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는 단순한 착안에서 시작되었다. 거친 벌판으로 함께 달려가자는 친구,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아내, 아빠의 청춘을 노래하는 아들, 둘이서 떠나자는 동생, 이런 시와 노래가 광고에서 빛을 발하는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광고를 위해 만든 CM송(Commercial Song)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작사가의 시에 곡을 붙인 세상의 노래가 광고로 넘어온 것이다. 익숙한 시어와 곡조가 광고 메시지와 적절히 어우러져 공명(共鳴)되었다.

NA : ① 마음에 힘이 되는 친구의 노래처럼
② 마음에 힘이 되는 아내의 노래처럼
③ 마음에 힘이 되는 아들의 응원가처럼 교보생명

자, 이쯤되면 광고와 시가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가 있는 광고’, 얼마나 여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인가? 얼마나 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인가?
마침 올해는 1908년 육당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그리고 ‘한국 현대시 10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책꽂이 한 모퉁이에 먼지 쌓인 시집에 잠자는 김소월·한용운·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이육사·김춘수…… 그리고 내 안의 시인도 함께 깨워야겠다.

“부디 심사숙고하길 바랍니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국어 교과서에서 소개된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그 ‘해’의 작가 혜산(兮山) 박두진은 광고 카피를 만드는 사람들, 즉 카피라이터들에게 “광고 카피 한 줄이 예전에 사람들에게 읽혀지던 시 한 수의 힘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피 한 줄을 쓰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심사숙고하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미디어문학의 이해>, 설성경, 2003).
광고인이라면 카피를 광고로 바꿔 다시 한 번 읽어볼 일이다. 광고를 만들 때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시인의 마음으로 헤아려 봐야겠다. 광고의 이미지는 시가 들려주던 감미로움과 애절함이라는 정서적 힘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크리에이터는 시인의 감성으로 독자인 소비자에게 다가가야겠다.
광고의 나라에는 시(詩)가 산다. 시가 있어 광고가 살아난다.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광고, 시가 있어 더 큰 울림이 있는 광고를 기대해 본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