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04 : Culture&Issue - '게임' 혹은 '직업'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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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Issue
 
  당신의 직업, 나에게는 유희  
정 성 욱 | 영상사업팀 대리
swchung@lgad.co.kr



몇 년 전에 한 지인으로부터 모바일게임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방송국 타이쿤>이라는, 일종의 전략 시뮬레이션을 빙자한 액션게임이었는데, 게이머는 방송국의 PD가 되어 광고섭외, 제작, 프로그램 제작, 편성을 하면서 방송국 내에서 성공적인 입지를 구축해간다는 내용이었다. 게임 점수의 척도는 바로 시청률.
한 5분 정도 플레이했을까, 광고발주를 받고 제작을 위해 엄지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다가 불현듯 ‘내가 조금 전까지 업무로 하던 일을 왜 쉬는 시간에 게임으로 즐기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당장 지워버렸다. 그런 ‘업무의 연장’을 “무척 재미있는 게임”이라며 선물한 지인의 센스 없음을 탓하면서! 하지만 잠시 후 아마 그 친구(당시 피아노선생)에게는 광고 만들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이 ‘일탈을 위한 재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혹은 악질적인 장난이었거나!).

‘없는 직업이 없는’ 게임 속 직업

생각해보면 (단순 퍼즐류를 제외한) 배경스토리가 부여된 많은 게임들은 사실 ‘다른 직업의 체험’이다. 경찰이나 군인이 되어 도둑·테러리스트·적군·야쿠자, 심지어는 좀비(Zombi)까지 상대하는 건 슈팅게임의 기본이다. 스타크래프트 역시 테란연합의 식민지 치안관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리니지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같은 MMORPG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 때 중요한 선택지 중 하나는 ‘직업’이다. 직업은 게임 스토리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다양해지고 표현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게임 내에서 표현되는 직업들도 예전에 흔히 차용되던 것들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NDS로 출시된 <초집도, 카두케우스>는 게이머로 하여금
절정의 기교를 가진 외과의사가 되어 끔찍한 수술현장을 체험하게 한다. 물론 사실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멀지만 NDS의 터치펜을 이용해 환자의 배를 가르고 심장마사지를 하고 종양을 잘라내는 동안 게이머는 수술실의 긴장감을 십분 느끼게 된다. 변호사 역시 게임에 등장했다. 닌텐도의 다양한 게임기로 출시된 캡콤의 <역전재판>은 변호사가 주인공인 게임. 법정 안팎에서 증거를 모으고 증인을 심문하며 억울한 피고를 무죄 방면시키는 것이 바로 이 게임의 방식이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증인을 향해 삿대질을 날리며 “이의 있습니다” 혹은 “증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일갈하는 것이 바로 이 게임의 백미다.
사실 위의 게임들에서 다뤄진 직업들은 실제 직업으로 표현되었다기보다는 게임적 요소를 극대화시켜서 다뤄졌다.
일반적으로 직업은 소수의 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흔히 ‘일과(Routine)’라고 표현되는, 반복적이고 무료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들로 이뤄진 것이 일반적인 직업이기 때문에 게임화가 힘들고 된다 하더라도 사줄 마켓이 없다.
정말 없을까? 이런 질문에 도전하듯 정말 재미없어 보이는 직업도 게임화되었다. 일본 타이토의 인기 시리즈(그렇다! ‘인기 시리즈’다) <전차로 고>는 전철 운전기사가 되어, 지구를 구하는 것도, 테러를 막는 것도 아니라 단지 출발역부터 종착역까지 시간 맞춰 무사히 운행만 하면 되는 게임이다. 맥시즈 사의 <A Train>처럼 열차회사를 운영하고 노선을 스스로 만드는 게임도 아니고, 단지 일본에 실존하는 전철노선을 따라 열차를 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하철 2호선을 운행하는 게임’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를 만큼 상당히 재미없는 게임이 연상되겠지만, 1996년 아케이드 판으로 첫 선을 보인 이래 여러 플랫폼에 걸쳐 20여 개가 넘는 시리즈가 출시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게임이다. 부드러운 제동과 시간 엄수가 이 게임의 핵심. 급제동을 걸거나 연착을 해서 승객들의 불평을 받지 않도록 신경 쓰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내겐 너무 소중한’, 직업

‘다양한 직업의 게임화’는 게임을 소비하는 취향의 다변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직업에 대해 변화된 시선 역시 느끼게 한다. 누군가 직업이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금을 모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는데, 그 말에서 느껴지는 ‘체념과 달관’의 정서가 다른 이의 직업을 유희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소명’이라는 것과는 달리 인생에는 ‘직업’ 외에도 가족이나 친구 같은 다른 삶도 존재한다는 깨달음의 반영이다. 사실 우리가 늘 회사에서 체험하는 기획회의를 소재로 한 <어프렌티스>류의 리얼리티 쇼가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여지고 큰 인기를 끄는 것 역시 이러한 직업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을 읽고 머릿속에 <불꽃 광고인: PT열전(가제)>이라는 게임의 기획안이 그려지는 광고인들도 계시지 않을까? 광고업의 흥미진진한 매력을 전달하고 미래의 광고인들에게 ‘경쟁PT는 힘든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것이라’고 세뇌하는 수단으로서 훌륭할 게 사용될 수 있을 듯하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