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말하기
건설교통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및 혁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는 당시 수도권의 반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어느 지역에 건설되느냐 여부로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안이었다. 따라서 광고 또한 이들의 거부감을 야기하지 않고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크리에이티브, 그리고 혁신도시 건설 예정 지역에만 노출될 수 있는 매체 운영이 광고주가 요구하는 핵심 사항이었다.
공공기관 광고는 일정한 양식이 있고, 광고주가 좋아하는 패턴은 유사하다. 다만 각자의 취향과 여기저기서 나오는 광고주의 의견을 어떻게 조합하고 설득시키느냐가 절대적인 관건이 되곤 한다. 이에 우리는 ‘아주 행복하며 즐거운 상황’이라는 내용으로 광고시안을 제시했고, 광고주의 갖가지 견해와 수많은 공무원들의 원론적인 의견을 조율, 설득해가며 최종 콘티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번 작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본의 아닌 자급자족’이라는 점. 적합한 남자모델을 찾다 못해 같은 팀 AE인 송자용 씨를 저렴한 모델료(?)로 출연시켰는가 하면, 성우 녹음 중 갑자기 라이브한 목소리를 연출해 보자며 급하게 사람을 찾다가 녹음실 실장과 필자가 떠밀리다시피 녹음실에 들어가 성우로 데뷔(?)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비록 수도권에는 온에어되지 않았지만, 생애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전국에 퍼뜨릴 수 있었고, 비록 AE이지만 이러한 작업 자체가 광고를 하면서 경험하는 나름의 재미와 흥미가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최종 시사회 때 광고주가 자꾸 “김경은 씨 목소리 아니에요? 아니, 왜 성우가 안 하고 김경은 씨가 했어요?”하고 묻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리며 절대 내가 아니라며 도리질을 했던 걸 생각하면….
이런 게 ‘자급자족 광고(?)’
콘티로 보기에는 굉장히 심플했지만, 지방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곳이 서울 근교에는 그리 많지 않기에 우리는 짐을 꾸려 이틀간의 촬영을 떠났다.
첫날 촬영은, 경기도의 조그마한 민속마을에서 첫 출근하는 아들을 배웅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 여기서 등장하는 아들이 바로 송자용 씨다. 감독이나 광고주는 별 문제 없다고 했지만, 아는 사람이 출연해서 그런지 눈에 더 들어오고, 그의 연기가 무척이나 어색해(?) 보인 건 사실이다. 그래도 제법 노력하는 모습이 담당 AE로서 무척 가상해 보였다(참고로, 송자용 씨는 입사동기이며 같은 팀원이다). 당시, 모델 에이전시 대표가 직접 송자용에게 모델로 나설 의향이 없느냐는 제안까지 했으니, 이젠 ‘모델 송’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따뜻한 가을 하늘, 바닥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있고, 고향에서 직장을 얻어 첫 출근하는 아들을 너무나 뿌듯하고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과 아들의 모습, 그것은 언젠가는 고향에서 직장을 얻어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 촬영은 지방에서도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는 단란한 가정을 보여주기 위해 이루어졌다. 서울의 작은 문화센터를 빌리고 연극 <미녀와 야수>를 공연하는 극단 멤버를 불렀다. 무대세팅도, 그들의 연기도 직접 눈앞에서 펼쳐졌다. 물론 똑같은 장면만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하나의 장면을 위해 이렇게 수 십 번 반복해서 연기를 해야 하는 줄 극단 멤버들은 몰랐던 것일까?
지치고 힘들어하는 그들의 표정 뒤로 두꺼운 양탄자를 뒤집어 쓰고 뻘뻘 땀을 흘리며 극 내내 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는 두 남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이 바로 촬영 스태프들이었다는 사실! 극단 멤버가 부족한 관계로 그 자리에서 급조된 조감독과 조명 스태프였던 것이다.
더욱 웃음을 자아냈던 건, 엑스트라 수가 부족해서 급하게 내가 관객석의 한 자리를 채우고 있는데, 무대에서 양탄자 역할이었던 조감독과 스태프 둘이 또 급조되어 내 옆에 자리한 상황에서였다. 그런데 그들이 투덜거리는 말, “아니, 저 엑스트라들은 몇 시간 앉아 있는 관객 역할에 10만 원 정도 받는다는 말이야? 저녁밥도 주고? 그럼 우린 이게 뭐야… 새벽부터 촬영 준비하고, 땀 흘리며 양탄자 역할에 이젠 관객석에까지 앉아서 말야….” 순간 그 끙끙대던 양탄자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도 담당 AE인데 이렇게 돈 한푼 안 받고 엑스트라처럼 앉아 있잖아요”라며 위로(?)는 해주었건만, 촬영에 지친 그들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법한 게, 그 두 사람이 무대에서 끙끙대며 양탄자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실은 난 담당 PD의 생일이라며, 케이크에 촛불 켜고 노래 부르며 종류별로 5조각의 케이크를 먹어댔으니…. 모든 스태프와 나눠 먹기에는 양이 너무 부족한 관계로 몇몇 주변 사람들만 먹은 건데, 그게 그리도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어찌 말로 다 하리오!
이런 것이 ‘책임감’
이튿날은, 지방대 느낌의 강의실을 서울 근교에서 헌팅하다 못해 결국 지방으로 직접 내려가 어느 대학에서 촬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 광고의 가장 아름다운 여자모델이 등장하게 된다. 매우 청순하며 풋풋해 보이는 그녀는 이번 광고의 모델이나 성우 중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은 인물! 다행히도, 그녀의 화사하고 어여쁜 얼굴 덕에 광고가 좀더 빛을 발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타고 보이스 오버로 필자의 목소리를 녹음했기에 그 장면이 더욱 빛을 발했던 게 아닌가 하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데……
이 장면은 일부러 지방대의 느낌을 담고자 하여 서울을 벗어나 촬영했건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느낌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아 2D로 닦고 갈아 세련되고 멋진 강의실을 만들어 버렸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서울의 대학에서 충분히 촬영이 가능했건만 지방에 내려가고, 2D로 작업을 하는 등의 비용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또한 창 밖으로 따뜻한 교정의 느낌을 찾을 수 없다며 고심하던 감독, 갑자기 서울의 K대를 찾고는 소수의 스태프만 데리고 몰래 들어가 너무나 예쁜 교정을 찍어왔다. 혹여 경비 아저씨한테 들킬까 조마조마했던 여타의 스태프와 우리는 막상 좋은 결과물을 보고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모른다. “서울에서는 온에어되지 않으니 걱정 말라”며 서로 위로(?)하는 우리의 모습이, 왠지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안타까워 보였다.
이번 광고를 진행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는 ‘즐거운 체험’이라는 점이다. 비록 내 목소리로 녹음된 카피가 자주 변경되는 바람에 일도 제대로 못하고 새벽부터 녹음실로 불려나가 계란 여러 개 깨뜨려 먹으면서 녹음을 하는, 수난 아닌 수난을 겪기는 했지만, 막상 내 목소리가 들리는 TV-CF를 보니 왠지 모를 뿌듯함과 짜릿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진행 중에 맞닥뜨린 힘들고 어려운 순간, 특히 너무나 많고 다양한 소재 때문에 실수하지는 않을까, 놓치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느껴지는 책임감은 오히려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책임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성숙시키고 강하게 만드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