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current - 연(年, year)이란 사람이 정해 놓은 하나의 단위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생활, 더 나아가서는 문명의 흐름에 리듬을 부여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고 다음해를 맞을 때 마다 지난해를 평가하고 정리하여 다음해를 맞이하는 지침으로 삼게 마련이다.
지난 2004년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뒤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블로그나 리얼리티 쇼의 붐에서 볼 수 있듯이, 가속이 붙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해 미디어의 형태가 바뀌고 그에 따라 운용방식이나 컨텐츠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아마도 그 변화의 속도는 올해 들어서도 여전히 질주를 계속할 듯이 보인다. 그런데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이런 형태의 흐름 밑에 잔잔하게 흐르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화려하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지만 그 역할은 현대 문명사회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심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영적(靈的, spiritual) 문화’의 변혁이다.
새로움 - ‘영적’이라는 개념을 들으면 특정 종교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작금의 변화는 그런 특정 종교와는 무관하다. 영적 문화의 변혁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므로 그다지 새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작금의 그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서양풍의 ‘이국취향(Exoticism)’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물론 35년 전 비틀즈가 “Jai Guru Deva”라며 자신들의 노래 <Across the Universe>에서 인도의 현자를 칭송하고, 오쇼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인도 현자들이 미국에서 열렬한 환영인파를 이끌어 내던 시절이라면 오래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동양문화, 특히 영적 문화에 대한 매혹(Fascination)은 물리적, 제도적 약탈을 그 존립의 근거로 삼고 있는 서구문명의 발전에 대항하는 안티테제로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Karma·Tao·Zen 등의 어휘가 서양인들에게 친숙한 것도 1960~70년대에 나타났던 이런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매혹’이 그렇듯 이런 동양사상의 도입은 일부 계층의 ‘도피’라는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었고, 마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책임은 회피하면서 단지 막연함과 모호함에 끌리던 일종의 사회적 치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문화현상에서 느껴지는 그것은 상당히 흥미롭고 본질적이다.
1. 해체: 다빈치 코드- 작년 전세계 출판계에 가장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책은 물론 <해리포터> 시리즈이긴 하지만, 아동문학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번역되고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한 책은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이다. 남성이 첫 데이트 직전에 재빨리 읽어 급하게 교양을 보충할 수 있는 ‘남성용 즉석 교양 보강 키트’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책은, 미술사를 포함하는 서양사 일반과 종교철학이라는 ‘사실’을 ‘허구’와 적당히 버무려놓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스릴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아니고, 소재 역시 예전에 어떤 형태로든 공개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바로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대-기독교주의(Judeo-Christianism)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폭발적인 소재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결혼과 후손, 기독교 탄생 과정상의 헤게모니 싸움 등, 구/신교 공히 불편해 할 만한 소재들이 이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소비된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우리가 흔히 특정 종교를 떠올리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개념은 상당 부분 그 특정 종교가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작해온 부분이 크다. 이 책은 그런 조작된 선입견과 왜곡에 대한 반증을 제시함으로써 그 특정 종교가 날조해온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2. 각성: 매트릭스 시리즈
- 20세기 말에 시작된 <매트릭스(The Matrix)> 시리즈는 ‘지금, 여기’의 실재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보이고 만져지는 모든 현실이 사실은 배터리로 이용되기 위해 사육되며 꾸는 꿈은 아닐까라는 질문은 영화 내의 모피어스의 대사, “지금 현재 사람들은 20세기의 말이라고 믿고 있지만…”이라는 대사에 함축되어 있다. 1편이 거둔 의외의 성공을 바탕으로 21세기에 들어와 2편과 3편이 제작되었지만, 지나치게 불친절한 전개와 자만스러운 자기침잠에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꽤 많은 팬들은 이 시리즈의 ‘불친절함’을 훌륭한 경전이 갖춰야 할 ‘도전의 요소’라는 미덕으로 인식하며 영화를 차근차근 해석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내부적으로는 장자의 호접몽 같은 동양철학과 들뢰즈나 보들리아르 같은 현대 구조주의자들의 철학, 혹은 미국 좌파지식인들의 주장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흥미로운 ‘다른 사상들의 화학적 물리적 접합체’라는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에 출시된 <매트릭스> 전 시리즈를 담고 있는 DVD 컬렉션이 영화를 넘어선 새로운 담론을 제기하고 있고, 2005년에 상용화될 ‘매트릭스 온라인’이라는 온라인 게임이 영화와 현실간의 간극을 최소화할 예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트릭스> 시리즈가 전개하는 인간 영성에 대한 대중문화를 통한 철학적 접근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예언- 많은 사회인문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인류는 현재 엄청난 영적 각성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다빈치 코드>나 <매트릭스> 같은 문화상품이 인기를 끈다는 점이나, 사회전반 곳곳에서 보여지는 자본주의 한계 노출에서 그러한 징후를 읽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벌써부터 이를 이용해서 한국이 세계의 ‘영적 수도(Spiritual Capitol)’ 역할을 해야 한다는, 조금은 사이비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본과 노동과 상품의 유통을 쉽게 하기 위해 가속되고 있는 글로벌화가 결국은 영적 깨달음의 전파를 촉진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에 의해 어떤 식으로 주장이 되든 간에 결국 앞만 바라보고 미친 듯 달려오던 인류가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웰빙이라는 광풍 같은 트렌드조차 결국에는 영적 깨달음을 준비하기 위한 '몸고르기'는 아닐까. 모든 인식의 변혁은 기회와 위기가 그밖의 수십 가지의 성격의 전환점이 만나는 신작로일 수밖에 없다. 그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 더 나아가 어떤 길로 남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고민은 이런 시절엔 너무 이를 수 없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