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1야당과 청와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하나의 그래픽 파일이 있었다. 침실에는 막 정사를 끝낸 듯한 남녀가 있었는데, 남자의 얼굴은 포커스가 맞지 않아 누군지 알아 볼 수 없어도 화면의 이쪽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은 분명히 야당의 총수였다. ‘감히, 무엄한, 이런 경을 칠’ 등의 각종 비난이 일부 계층의 입에서 튀어 나올 때, 또 다른 사람들은 전국민의 인권을 마치 와인 양조장의 포도알처럼 밟았던 사람의 딸에게도 인권은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 그리고 그 인권은 특히 일반 국민들의 인권보다 훨씬 침해받기 쉬운 아주 나약한 종류라는 씁쓸한 아이러니를 비웃고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은 ‘패러디’라는 개념을 언론을 통해 보편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형화된 ‘본질’의 재현
‘패러디’라는 말의 정의는 많은 인문학자들에 의해 내려졌지만 여기서는 지바 벤 포라(Ziva Ben-Porat)의 정의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나 다른 예술적 대상을 가정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보통 코믹하다. ‘전형화된 본질의 재현’, 다시 말해서 패러디는 이미 최초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재현으로 기정화된 하나의 전형화된 본질의 재현이다.”
즉 패러디에는 재현과 그 재현의 대상이 되는 기존의 예술적 대상(=원전: 原典), 그 패러디가 담게 될 메시지,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연결점을 찾아 공존시키는 독특함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애니콜 광고를 패러디한 ‘왕뚜껑’광고의 경우, 애니콜 광고라는 원전, 즉 시대의 쿨을 표현하는 ‘전형화된 본질’ 혹은 원전이 존재하는 가운데, ‘왕뚜껑 많이 사주세요’라는 메시지와 시크(chic)한 모바일 핸드셋을 투박해 보이는 왕뚜껑으로 대체시켜 상황을 우습게 만드는 독특함이 있기에 패러디는 성립이 된다.
이렇듯 패러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원전이 있다’는 점이다. 패러디물 자체가 지닌 의미 전달의 구조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 작품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사전 공감이 없다면 그 패러디는 오해되거나 아니면 몰이해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패러디가 ‘비틀어 재현하는 원전’이라는 공감이 형성돼 있다면 그것은 파워풀한 메시지를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순수예술뿐 아니라 대중문화도 많은 패러디를 활용해왔다.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 같은 코미디 영화에서부터 수많은 광고들까지 수많은 패러디들은 수용층에게 널리 알려진 여러 가지 기호들을 비틀고 꼬아댄다. 패러디는 그렇게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던 셈이다.
정치풍자라는(혹은 정치인 모독) 장르에 패러디가 사용된 것 역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태조 왕건> 혹은 <허준> 같은 사극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 신문만평란에서 이 드라마의 설정과 현대 정치인들의 모습을 병치시킨 모습을 흔히 찾아 볼 수 있었던 것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패러디는 기존의 공감을 발구르기 삼아 더 높은 점프를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전달방식인 셈이다.
모 디지털 카메라 애호 사이트와 모 유머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최근 몇 년 새 창궐하기 시작한 인터넷의 정치 및 연예 풍자 패러디는 만평들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원전의 인용을 시도한다. 영화나 뉴스의 장면, 그리고 지면광고 같은 잘 알려진 시각적 이미지들에 곧바로 유명인사의 얼굴을 삽입시켜 희화화시켜버린다. 중국 무협영화의 스틸들에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삽입시킨 ‘대선자객’ 시리즈나 그 밖의 수많은 영화 포스터 패러디가 그 좋은 예다
제작, 유통의 수월함으로 더욱 확산
작금의 인터넷 풍자 패러디는 이런 패러디의 일반적인 특징 그 이상의 것을 시사해주기 때문에 흥미롭다. 인터넷 풍자 패러디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두 가지 기술을 살펴보면 그 시사점은 더 명확해진다.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발전, 특히 ‘사진처리 소프트웨어(Photo Processing Application)’의 발달로 인해 사진의 편집과 조작이 쉬워진 점은 풍자물의 생산을 용이하게 했다.
또한 인터넷을 포함한 정보통신 기술은 이러한 풍자물들이 손쉽게 유통/공유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 이제 누구든 괜찮은 아이디어와 괜찮은 장비 그리고 조금의 기술만 있으면 얼마든지 풍자물을 제작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러한 ‘손쉬움’이 정치 패러디의 키워드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매체 혹은 기술에 의한 권력 범위의 확장,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존 체제의 반발이라는 역사 속에서 자주 나타났던 현상의 또 다른 사례라는 점이다. 유럽에서의 활자인쇄의 발생이 정보의 재생산과 유통이라는 커다란 특권을 중세 카톨릭 교회로부터 빼앗아 종교혁명의 단초를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패러디 혹은 그것을 포함한 인터넷 시대의 풍자물의 출현과 수용 역시 탈권력 혹은 범권력적인 역사 발전을 상징한다.
인터넷 출현 전에 기존에 널리 수용되던 정치 풍자를 살펴보면 그 역시 권력이 정해준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3대 중앙 일간지의 만평들만 보더라도 기득권층의 가치관에 상당히 경도된 편협한 시각들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가들이 그 지면을 따내기 위해 기술을 갈고 닦은 노력만큼 그 지면을 허용하는 권력과 영합하고 타협해온 노력 또한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힘든 과정의 테스트를 통해 언론의 권력은 자신에 입맛에 맞는 풍자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니 당연히 그 결과물들은 언론권력과 연관계층의 가치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이런 권력에 의한 선별작업을 통하지 않고도 누구나 자유롭게 '풍자'를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결과물이 누구의 입맛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자연스러운 인류사의 발전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일부 계층(특히 그 풍자의 대상이 된 쪽)의 반발은 결국은 인류의식의 자연적 발전에 대한 기득권층의 퇴행적이고 의례적인 ‘처량한 딴지 걸기’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밀려오는 밀물에 대고 호통을 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나할까. 다른 풍자물과 마찬가지로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적어도 ‘일부’ 민의의 표출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결과적으로 그들이 공인의 삶을 걷기로 한 이상 그들은 개인을 넘어선 시대의 아이콘이자 기호인 것이고, 그런 기호는 얼마든지 비틀리고 희화화될 수 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