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4/09-10 : Case Study - Patek Philipp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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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 Patek Philippe
 
  언젠가 파텍 필립이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김 원 규 CD | CR4팀
wkkim@lgad.lg.co.kr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최고의 시계

2003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 경매장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손목시계 하나의 경매 낙찰가가 무려 60억 원. 이는 손목시계 경매 사상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이었다. 그날 최고의 뉴스가 된 이 시계 브랜드는 다름 아닌, 역시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이었다. 창업 150주년을 기념해 1989년에 만든 단 4개의 시계 중 하나인 이 시계는 경매시장에서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세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시계 하나에 60억을 호가할 수 있을까 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충격적인 사건이 1999년에 일어났다.
역사적인 파텍 필립의 작품 하나가 경매에 붙여졌는데, 그 가격은 1,100만 달러에 달해 지금까지의 경매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아마도 이 사건은 400년 스위스 시계 역사상 최고의 명예요, 자랑거리요, 두고두고 화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파텍 필립이기에 사람들은 이를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최상의 브랜드라고 칭송하면서 고급시계를 두루 섭렵하고도 결국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브랜드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스위스에 왜 시계산업이 발전했는지에 대해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배경을 잠시 알아보자.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시계 옥외광고물이다. 제네바가 스위스 시계 산업의 메카요, 심장임을 과시라도 하듯 롤렉스(Rolex)·오메가(Omega)·론진(Longines)·태그호이어(Tagheuer) 등과 같은 시계 브랜드 광고판이 밤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피해 제네바에 몰려든 금 세공업자들이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이 상호 이익을 지키기 위해 1601년에 길드를 결성한 후 서로 경쟁하고 협조하는 가운데 마침내 세계 어느 곳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시계산업의 본거지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한때 저가의 일본 시계가 몰려왔을 때에도 스위스 시계는 오히려 고가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넘버원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뉴욕 타임스는 ‘스위스 시계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고 지적하면서, ‘남자들이 시계를 소유하는 것은 유일한 장신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여자들에게 시계는 목걸이·귀걸이·반지와 같은 액세서리로 인식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시계가 스위스의 3대 수출품 중 하나가 된 것은 파텍 필립과 같은 명품 브랜드가 선두에서 굳건히 브랜드 파워를 유지하면서, 400년 역사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소비자의 니즈를 한발 먼저 알아차리는 마케팅 능력에서 온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폴란드 망명 백작과 시계 명장의 만남

파텍 필립은 1839년 폴란드 망명 귀족 출신인 앙뜨와느 드 파텍(Antoine de PATEK)과 프랑스 출신의 시계 제조 장인인 장 아드리앙 필립(Jean Adrian PHILIPPE)에 의해 설립된 브랜드다.
1812년 폴란드의 한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앙뜨와느 드 파텍은 러시아의 강압 통치에 반발하여 폴란드 반란에 가담하지만,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조국을 등져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스위스로 정치적으로 망명하여 제네바 산맥에서 시계 판매를 시작했는데, 그 탁월한 사업 수완은 그를 일약 시계산업의 전문가로 변신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그는 당시와 같은 혼란기에 성공할 수 있는 비즈니스가 바로 시계산업임을 인식하고 대단한 정열로 사업에 몰두했다.
이렇게 사업을 키워 가던 중 그는 시계 제조자인 프랑소와 차펙(F. Czapek)을 만나 두 사람의 이름을 내세운 회사, 파텍 차펙(PATEK, CZAPEK & Co.) 사를 설립했는데,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기념하여 1839년을 파텍 필립의 설립연도로 삼게 되었다.
제품은 비록 소규모로 생산했지만, 품질이 우수해 시계에 대한 평판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파텍에게는 늘 뭔가 새로운 기술과 새로움에 대한 강한 욕구가 넘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1844년에 열린 파리박람회는 놀라움과 혁명 그 자체였다. 그 동안 자기가 펼쳐 보이고 싶어 하던 모든 기술과 제품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인데, 무엇보다 그곳에서 평생의 사업 파트너인 필립을 만난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중시계는 그 부속품인 열쇠로 일일이 태엽을 감아줘야 했지만, 필립은 ‘열쇠 없는 시계’를 개발해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안은 시계 제조 명인. 이에 파텍은 전격적으로 필립에게 동업을 제의했고, 이윽고 제네바에서 오늘의 영광을 향한 닻을 올리게 되었다. 결국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시계사에 기념비적인 많은 공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1846년에 처음으로 독립 분침을 사용했고, 2년 후에는 자동 태엽을 개발해 정확도를 높였는데, 품질에 대한 이런 고집과 명성이 점점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신생 브랜드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은 바로 1851년 런던의 한 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은 시계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소유하게 된 것. 이는 유럽의 왕가와 당대의 귀족, 그리고 유명인사와 시계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브랜드로 인정받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객의 이름을 나열하면 그대로 유럽 상류사회의 명단이 된다

고객 1: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든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이룬 장본인이다. 이집트·수단·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고, 인도·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장악해 대영 제국의 위업을 쌓은 여왕으로, 오늘날 사실 국력에 비해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영국의 위상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평하고 있다. 그녀는 대영 제국의 막강한 위세와 산업혁명의 과정 속에서 영국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교과서로 만드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빅토리아 여왕에게 파텍 필립 시계는 재임 기간 동안 빛나는 업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하나의 바로미터였다.

고객 2: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 박사의 일과를 체크한 것도 다름 아닌 파텍 필립이었다. 연구에만 몰두해온 아인슈타인에게 유일하게 멋을 부리는 사치품은 손목 위에서 번쩍이는 시계가 전부였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의 시간은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그런 시간이었을 터인데, 그에게 시간은 또한 과학 발전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시간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의 손목시계는 단순한 시계를 넘어 인류의 미래와 함께 한 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객 3: 노벨상 두 개에 빛나는 마리 퀴리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며, 최초로 2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 그녀는 방사능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편과 함께 연구에 연구만을 일삼은 그녀, 자신보다도 과학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녀의 손목 위에서 재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는 어쩌면 과학 발전을 위한 채찍의 소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객 4: <제인 에어>의 작가 샬럿 브론테

샬럿 브론테는 소녀 시절부터 풍부한 상상력과 거칠 것 없는 분방한 성격으로 늘 관찰 대상(?)이었다. 두 동생과 힘을 합해 익명의 시집을 출판하기도 하고 소설을 써서 끊임없이 출판사를 노크하던 그녀에게 행운은 몇 작품의 실패에 이어 운명처럼 다가왔다. 1947년,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정열적인 고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제인 에어>를 출판했는데, 이 소설은 문단뿐만 아니라 독자들로부터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녀 또한 소설 속 주인공 제인 에어만큼이나 정열적으로 살고자 했지만, 운명은 그녀의 희망대로 되지 않았다. 문학과 삶에 대한 정열은 서른 아홉이라는 운명의 시간 속에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그녀가 사용했던 파텍 시계만은 그녀의 문학적 향기와 함께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고객 5: <호두까기 인형>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과 발레 음악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차이코프스키는 우리에게는 교향곡 6번<비창>과 <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으로 친숙하다. 그는 몸은 조국 러시아에 있었지만, 그의 음악을 통한 야망은 러시아의 밖에 있었다.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어떻게 하면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삶의 모든 시간을 보냈는데, 소망대로 그의 작품들은 시대를 넘어선 영원불멸의 작품으로 인류사와 함께 연주되고 관람되어지고 있다. 그가 애장했던 파텍 필립처럼 음악도 후세의 전문가는 물론 대중들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Come on, think loooooooooooooooooooooooooooong!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에서 90년대 초에 ‘호화일점주의(豪華一點主義)’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백화점에서 명품 판매를 부추기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헤드라인으로 사용한 것인데, 이것이 그대로 사회 트렌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는 자기 몸 어딘가를 최고의 명품으로 치장하고, 또는 자기 생활의 그 무엇인가에는 다른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최상의 것으로 변화를 주자는 주장이었다. 즉 떼돈이 있다면 온 몸을 다 도배(?)하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면 딱 한 가지만이라도 이런 사치와 허세를 부리자고 대놓고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러면서 분수에 맞지 않은 고가 브랜드 소비에 대한 사회적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에 가뜩이나 명품 매니아인 일본 사람들은 제각각 호화일점주의를 실천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천 만원 정도의 시계를 구입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십 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고, 여고생들은 속옷에 용돈의 전부를 투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집안에서 살림하는 주부들은 부부 커핏잔 세트에 기백 만 원 상당의 명품 브랜드를 구입해 호화일점주의를 즐겼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인식 속에서 이뤄진 전형적인 과시 소비였던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으로 인해 신분상승이 이루어지고, 라이프스타일이 업그레이드된다는 환상을 갖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필립 파텍의 광고전략은 어쩌면 호화일점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부터 시작된 ‘Twenty~4’ 브랜드의 광고는 여자들의 그런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가고 있다. 모던하고 진보적이며, 스타일리시하면서도 도도한 섹시미를 지닌 모델의 이미지와, 캠페인 슬로건 ‘Who will you be in the next 24 hours?’가 광고의 매력도를 높여주고 있는데, 특히 브랜드를 연상시키는 ‘24’라는 숫자가 마케팅을 지원하고 있다.
‘Twenty~4’는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를 타깃으로 런칭한 브랜드인데, 이는 명품 브랜드의 타깃 에이지가 낮아지고 있는 현상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이 제품은 성공한 여자들의 이미지에 맞게 금속부를 18K Rose or White 골드로 마감하고 다이아몬드 세팅을 했는데, Eternal Grey·Timeless White·Forever Black 등의 세 가지 컬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성공한 여자들의 고급스런 취향과 세련미를 광고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게 연출한 것이 눈에 띄는데, 우선 모델의 연출에서 여타 광고에서는 볼 수 없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통일된 레이아웃 폴리시와 아트디렉터의 뛰어난 감각도 이 광고를 살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광고의 승리는 장기 캠페인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은 분위기, 똑같은 레이아웃, 똑같은 시계를 위해서 4년 이상 광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광고를 한두 편 집행하고 다른 광고로 바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흘러가는 강물인 듯 보이지도 않고 타깃들의 심금을 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광고처럼 같은 컨셉트와 전략으로 장기적으로 집행했을 때 타깃으로부터 목표로 한 반응이 올 것이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광고는 너무 자주 바뀐다. 이제 막 타깃들에게 반응이 올 만하면 컨셉트가 바뀌고 전략이 바뀌어 완전히 다른 제품, 다른 브랜드처럼 느껴진다. 엄청난 낭비가 아닐까? 제발, 길게 생각하자! 적어도 3년, 5년, 10년이 갈 만한 캠페인이 되도록 만들어 보자!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