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이 변하고 있다. 아니,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음악산업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디지털화의 흐름은 대세가 되어 버렸다. 이제 누구도-아날로그의 신이 재림하더라도- 그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디지털화의 트렌드가 불과 몇 년 만에 이렇게 급속히 자리잡게 된 것은, 물론 초고속 인터넷서비스의 광범한 보급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95년에만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단 1%만이 인터넷을 이용했으나 2004년 현재 전체 가입자 수 1,170만 명을 돌파했고, 전체 가구의 73% 이상이 초고속 인터넷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출처: 경향신문 2004년 8월 24일자).
특히 네티즌만을 대상으로 한 LG애드 NPR 조사에 따르면 2003년 말 현재 네티즌의 98%가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제 ‘인터넷을 한다’는 말은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그림 1>.
이와 같은 초고속 인터넷서비스의 보편화가 의미하는 것은, 더 이상 속도로 인한 멀티미디어 서비스의 장애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2시간짜리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받는 것이 불과 10분이면 가능한 시대이다. 하물며 3~4분짜리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받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업로드하는 것은 마치 이미지 파일 하나 올리는 것만큼 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디지털 트렌드에 휩싸인 음악산업
신촌에 있는 어떤 바(Bar)의 풍경을 보자. 이 바에는 CD가 한 장도 없다. 그러나 손님들의 신청곡을 거의 모두 틀어줄 수 있다. 데스크에 있는 PC와 초고속 인터넷망의 위력이다. 이 바의 주인은 손님들이 어떤 곡을 신청하면 그 즉시 소리바다에 접속해서 그 곡을 mp3로 다운로드받거나, 스트리밍 사이트인 벅스뮤직에서 그 곡을 검색한 후 PC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과거, 수 천 장의 CD를 보유한 음악 매니아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이 바의 주인은 똑같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말이다.
한국의 음반시장 규모는 2000년 이후 매년 줄어들고 있다<그림 2>. 한국음반소매상협회에 따르면 10년 전 전국 1만 2,000곳에 이르던 레코드숍은 현재 700곳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레코드숍이 문을 닫은 자리에 이동통신 대리점이나 mp3플레이어를 파는 전자제품 소매상이 들어서는,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상징적인 일들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반면에 핸드폰 벨소리나 컬러링 서비스를 포함한 디지털 음악시장의 규모는 매년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음반산업협회와 음반기획사들의 주장처럼 ‘불법 mp3’의 영향으로 CD를 사던 사람이 더 이상 안 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다수 네티즌들의 주장대로 돈주고 살 만한 음악을 만들지 못한 음악산업 관계자들의 책임인지는 여기서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비자들은 이제 디지털로 음악을 듣는 데에 아주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인 벅스뮤직의 회원 수가 약 1,400만 명, 국내 P2P사이트의 원조라고 할 만한 소리바다의 회원 수는 무려 2,0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따라 mp3플레이어의 보급률 또한 해마다 급성장하고 있어, 2003년 기준으로 주 수요층인 16~29세 연령대에서의 보급률은 19.4%로 추산되고 있으며, 2005년에는 55%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상황이다<표>.
아울러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mp3폰이 상용화된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음악산업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디지털 트렌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음반 유통업계의 붕괴를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음악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어떤 마케팅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지는 아직은 불분명해 보인다. 몇 년째 mp3 유료화를 위한 법정 공방에만 매달려 오고 있을 뿐, 급속하게 기존 CD시장을 대체하고 있는 mp3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mp3라는 ‘대체재’의 특성은 과연 무엇인가?
mp3를 보는 두 가지 관점, ‘Market’과 ‘Media’
mp3 유료화와 관련해서 그 동안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음반산업협회나 음반기획제작자 연대 같은 단체의 논리는 한 마디로 ‘현재 유통되는 모든 mp3는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상품’이며, ‘공짜로 음악을 찾아 듣는 네티즌들의 비도덕성’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소리바다와 벅스뮤직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의 생각은 다르다. ‘인터넷은 공유와 나눔의 장이고, 그것이 인터넷의 자유정신’이며, ‘오히려 음악파일의 공유 자체가 음악산업에 외부 경제적인 효과를 준다’는 입장이 우세한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디지털 음악은 무조건 불법이라든가, 모든 디지털 음악이 음악산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식의 이분법적 접근은 피하려고 한다. 대신 관점을 바꾸어서 mp3(또는 디지털 음악)라는, 기존 CD의 대체재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장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모든 디지털 음악을 유료화해야 한다는 입장은, 바꾸어 말하면 모든 디지털 음악이 소비되는 장을 ‘마켓(Market)’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즉 가격이 매겨져 있는 ‘상품’을 공짜로 주고받고 있으니 그것은 잘못되었고, 따라서 유료화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맞는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디지털음악이 소비되고 있는 모든 공간이 ‘마켓’은 아니다.
가령, 누군가가 자기의 개인 홈페이지에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하루에 한 곡씩 올리면서 음악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 곳은 과연 ‘마켓’인가? 그건 아니다. 요즘은 하루에도 수백, 수 천 개씩의 새로운 홈페이지와 블로그가 생겨나고, 그 중 많은 곳들이 ‘음악 이야기가 있는 쉼터’를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은 상품이 유통되는 ‘마켓’이라기보다는 ‘(개인) 미디어(Media)’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비록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 홈페이지에서 음악 이야기를 하는 행위는 ‘상행위’보다는 ‘문화행위’에 가깝기 때문에 미디어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러한 ‘선의의 사용자(Fair User)’들이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CD에서 mp3를 추출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오직 파일 공유를 위해서 한 앨범의 모든 곡을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하는 일부 ‘악의의 사용자(Unfair User)’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한편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인 벅스뮤직을 보는 시각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지만,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러한 스트리밍 사이트 역시 기본적으로 ‘마켓’보다는 ‘미디어’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다만 벅스뮤직 측에서 공짜로 음원을 취합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수익을 내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벅스뮤직에 접속해서 음악을 듣고 나가는 소비자가 돈을 내야 하는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라디오나 TV 같은 미디어에서 음악을 듣기 위해 돈을 지불하지는 않듯이, 이처럼 개인적이든 아니든 ‘마켓’보다는 ‘미디어’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사이트의 접속자들에게까지 과금을 해야 한다는 발상은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벅스뮤직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결국 음악산업계가 해결해야 할 점은 디지털 음악이 소비되는 장인 ‘마켓’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그 안에서의 마케팅 전략을 고민하는 일이 될 것이다. 현재의 한국 음악산업에 있어서의 문제는 모든 디지털 음악을 유료화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음악 소비의 디지털화’라는 메가 트렌드(Mega Trend)를 보지 못하고 소비자와의 끈끈한 관계(Relationship) 구축에 실패한 업계의 자업자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대체재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는 전략은?
LG애드 NPR조사에서도 보듯이, 많은 네티즌들은 ‘유료화되더라도 반드시 사용하고 싶은 서비스’로 음악을 가장 많이 꼽고 있다<그림 3>. 이는 소비자들의 음악에 대한 프라이머리 니즈(Primary Needs)는 충분히 존재하며, 따라서 ‘마켓으로서의 디지털 음악시장’이 성립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재의 음악산업 관계자들은 디지털 음악이 과연 기존의 CD를 완전히 대체할 것인지, 그 시점은 언제가 될 것인지, 그것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이 전혀 수립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에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교수는 한 산업의 구조를 분석함에 있어서 기존 업체 간의 경쟁 강도 등과 함께 대체재의 위협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림 4>.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강력한 대체재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음악산업에 정통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일반론적인 접근에 그칠 수도 있지만, 마케팅적으로 어떤 방향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기본적인 가이드 라인은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크게 3가지의 화두를 던져보고자 한다.
1. 디지털 음악을 적(敵)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시장 자체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2003년에 들어서면서 이미 디지털 음악시장의 규모가 음반시장의 규모를 넘어섰다. 더구나 mp3플레이어나 mp3폰과 같은, 인프라가 될 수 있는 시장이 여전히 성장기에 있기 때문에 향후 음악시장의 대세는 디지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음악산업계의 대응을 보면 디지털 음악 및 그 소비자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과도한 유료화 논쟁으로 인해 지금도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산업 관계자들을 비난하는 반론(Counter-argument)이 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며, 신뢰도는 나날이 떨어져 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디지털 음악을 카테고리 자체의 시장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기회로 본다면, 전술한 바와 같이 ‘미디어’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사이트와 그 이용자들은 오히려 우군(友軍)이 될 수도 있다. 자체적인 기준에 의해 ‘마켓’으로 규정된 부분에 대해서만 조용히 유료화를 진행하되, ‘미디어’로 분류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간 잃었던 소비자와의 관계(Relationship)를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장기적으로 음악산업을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디지털 음악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기존의 CD와 오프라인 콘서트만이 줄 수 있는 종합적인 체험을 강화해야 한다.
사실 현재의 디지털 음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제품의 품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음질’ 면에서 과거의 테이프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또한 요즘 강조되고 있는 ‘종합적인 체험’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앨범 커버도, 성의 있는 부클릿(Booklet)도 없으며, 또한 콘서트에서 느낄 수 있는 현장감도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디지털 음악이 기존의 음반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VTR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영화인들이 우려했지만 결국 극장용 영화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마케팅의 유일한 목적은 가치 있는 고객체험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기존의 오프라인 음반산업의 무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감성적이고 종합적인 체험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향기나는 CD’라든가, 유명 아티스트와 제휴해 아름다운 커버를 만듦으로써 CD의 소장가치를 높인다든가, CD에 콘돔을 끼워준다거나 하는 이벤트나 소규모의 콘서트를 자주 여는 뮤지션들의 사례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3. 음악 소비자의 풀(Pool)을 늘리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국내 음반시장이 디지털 음악의 득세로 인해 이렇게 급작스런 붕괴를 맞이한 데에는 음악 소비자들의 풀이 지나치게 좁았다는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음악산업이 오직 10대에만 포커싱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오다 보니 10대와 20대가 주요 이용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디지털 음악의 공세에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기존의 음악산업이 10대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를 포괄하는 탄탄한 수요구조를 갖고 있었다면, 그래서 구매력이 있는 20~30대 소비자들까지 확보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산업 자체의 타깃을 20~30대까지 넓히는 전략을 지금부터라도 병행해간다면, 향후 외부 환경의 변화에 좀더 대응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