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06 : 광고세상 보기 - 광고와 섹스, 우리도 ‘대접’해달라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광고세상보기
 
   광고와 섹스, 우리도 ‘대접’해달라  
류 길 상 | 서울신문 산업부 기자
ukelvin@kdaily.com
 

‘새 광고 보도자료’, ‘광★00협회장 선임 자료’
‘광고기자’를 몇 달 맡으면서 광고를 관심 있게 지켜보다 보니 “광고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극단적인 예이겠지만 광고라는 ‘본명’을 썼다가는 메일 수신자와 눈도 맞추지 못하는 신세다. 최근 들어 각광 받고 있는 무료신문은 아예 1면이 광고면이다. 어떻게 하든 독자들의 시선을 광고로 끌어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해석해주고 싶다. 지면을 빌어 어떻게든 ‘광고’라는 말을 빼고 보도자료를 보내려는 홍보 담당자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방송의 공정보도 요청과 관련해 한 방송국을 방문했던 야당의 모 인사가 물 한잔 ‘대접’ 받지 못해 심기가 상했다고 토로하다 ‘물은 셀프’라는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듯, 억지로 대접해달라고 떼를 써서는 곤란한 것이다.

기자가 기사는 안 쓰고 광고를 담당해?

기자에게 하루 평균 300통의 e-메일이 오는데, 이 가운데 200통 이상이 ‘광고’ 메일이다. 하지만 광고 담당 기자에게 오는 진짜 ‘광고메일’은 광고 자체가 기사요, 보도자료이니 참 애석한 일이다.
광고면에 들어갈 사진을 사진부에 보낼 때에도 고충이 많다. 메일 제목에 ‘광고’라는 말이 들어가다 보니 담당자가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기 일쑤다. 어디 전화할 때도 쑥스럽다. 각 광고회사마다(홍보부 사람들은 알아먹을 테지만) 그 외 다른 부서에 전화할 때면 “광고담당 기자인데요,”하는 말이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상대편이 ‘기자면 기사를 담당해야지 왜 광고를 담당할까’하는 의혹을 품을까 두려워서다. 신문 지면마다 광고가 없는 면이 없는데, 요즘은 기사인지 광고인지 헷갈리는 광고도 많은데, 내가 쓴 광고기사를 독자들이 ‘광고’라고 보지는 않을까 하는 기우도 적지 않았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광고에 앞서 진행자들이 “죄송하지만 잠시 ‘전하는 말씀’ 듣고 다시 오겠다”는 멘트를 날릴 때가 있다. 흥겨운 음악과 감미로운 DJ목소리에 한창 빠져든 청취자들에게 ‘듣기 싫은’ 광고를 듣게 해 죄송하다는 건가? 아마 그 광고가 없었다면 청취자들은 그 프로그램 자체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DJ도 당연히 집에 가야 한다.
TV프로그램 시작 전에 왜 ‘제공’이라는 자막이 뜨겠는가. 이 프로그램은 LG전자·삼성전자·현대자동차·SK텔레콤 덕분에 만들었다는 것 아닌가. 하긴 이때도 광고라는 말을 썼다가는 신뢰도가 떨어질까 저어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광고’ 대신 ‘제공’이라는 단어를 쓴다.
한때 ‘선전’으로 불렸던 광고 시간은 시청자 입장에서 정말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15초짜리 광고 10개 해봤자 2분 남짓인데, 정말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KBS 9시 뉴스 시청률이 MBC보다 높은 것도 광고가 없어서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
신문사 기자로서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지면에 나오는 광고 덕분이다(각 신문사 광고국 직원들은 이 점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특히나 광고를 꼼꼼히 보고 있다가 이를 기사화하는 광고담당 기자의 경우 광고 덕에 월급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 불편하니 어찌된 일인가.

광고가 대접 받게 만드는 것도 ‘셀프’

늘 초미의 관심사요, 밥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입에 올리기 꺼려지는 것이 꼭 ‘섹스’와 닮았다. 실제 200통 가까운 스팸 메일 중에서 절반 이상은 섹스를 광고하고자 하는 메일들이다. 혹시 섹스와 광고가 싸이월드에서 ‘일촌맺기’를 한 것은 아닐까?
수습기자 시절 경찰서를 돌며 조서를 훑어보다 그 어떤 ‘야설’보다 노골적인 대목에 시선을 붙들린 적이 많다. 성폭행이나 간통사건 조서다. 조서는 노골적이지만 기사는 최대한 점잖게 써야 한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일 돈을 주고 미성년자와 섹스를 한 ★★★씨에 대해…’로 썼다가는 원고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물론, 성질 더러운 데스크일 경우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덤빌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섹스는 점잖게 ‘성관계를 맺은’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여자친구(혹은 남자친구)와 처음 ‘잠자리(이것 봐라, 역시 섹스라는 말은 쓰기 어렵다)’를 같이 하려고 꼬실 때도 “우리 섹스할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 <ing> 예고편에서 여고생 임수정이 “나 쌕 사고(섹스하고) 싶어”하자 대학생 김래원이 놀라 넘어지지 않던가. 그만큼 섹스라는 말을 직접 입에 담기가 아직은 쉽지 않다.
‘섹스 칼럼니스트’ 유밀레 씨가 최근 한 방송사 프로그램 고정 패널로 캐스팅됐다가 신문에 ‘섹스칼럼’을 기고한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부 당했다고 한다. 유 씨는 지면에서 “섹스 칼럼과 사랑 칼럼, 연애 칼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같은 칼럼이지만 섹스라는 단어를 쓰느냐 안 쓰느냐에 따라,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나 봅니다. 제가 만약 ‘유밀레의 섹스 다이어리’가 아니라 ‘유밀레의 사랑 다이어리’ 또는 ‘유밀레의 연애 다이어리’라고 제목을 붙였다면, 같은 내용의 이 글도 다르게 보였을까요? ‘섹스’라는 창문 때문에, 창문 속의 방이 음탕하고 저질스럽게 느껴지나봐요”라며 억울함을 털어 놓았다.
국내 광고에서 키스를 표현하자면 아래 사항을 피해야 심의를 통과할 수 있단다.
‘▲두 입술이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된다 ▲입술이 코·눈썹·이마 등 얼굴의 주요 부분에 닿아서도 안 된다 ▲비주얼·배경음악·가사 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선정적인 것으로 느껴지도록 하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닿을 듯 말듯’하는 애타는 모습에 더 큰 ‘필’을 받을지 몰라도, 광고 뒤에 나오는 본 프로그램에는 키스와 속옷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런 심의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실제 그 기능이나 위상에 비해 지나치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광고나 섹스를 제대로 대접해주고 싶어도 걸리는 게 있다. 천 번에 한 번 정도, 진짜 너무 심심해서 ‘섹스 광고’를 열어봤을 때 느끼는 허탈감이나, 과장광고에 속아 사 온 물건을 늘어놓고 한숨만 쉬는 어머니들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광고들과 공중파 TV에 나오는 예술작품 같은 광고를 어찌 같이 놓고 비교하리오마는, 광고를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광고라는 단어에 숨어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할 것이다.
제품보다 이미지를 광고하는 게 추세라지만 엉터리 제품(기업)을 한없이 치장해주는 게 광고의 역할은 아니다. 있는 내용을 어떻게 하면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지, 있지도 않은 부분을 끌어와 그럴듯하게 포장만 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결국 돌아오는 건 광고라는 말만 들어가면 쳐다보지도 않고, 한 번 들여다봤더라도 ‘어떻게 하면 속지 않을까?’하고 잔뜩 긴장하는 소비자들이다. 이런 소비자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광고 만들기는 더 고달파지고, 광고 속의 숨은 속임수도 더 교묘해질 것이다. 당연히 광고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푸대접도 더 심해질 것이다.
요즘 나오는 광고들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못지않은 영상미를 갖고 있고, <개그콘서트>의 코너보다 더 웃기고, 신문의 미담기사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섹스 없는 ‘생활의 발견’이 어려웠듯, 광고 없이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광고 담당 기자로서, 또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광고가 있는 그만큼 대접 받는 시대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물은 셀프’ 였듯이, 광고가 대접 받도록 만드는 것도 ‘셀프’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