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04 : Special Edition - 우리 시대의 메가트렌드 - 4. 대중문화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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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상품, 상품 = 문화’ 시대의 무한한 변주
 
 
4. 대중문화
 
서동진| 문화평론가
homopop@naver.com
 

지식인이나 문화비평가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문화나 문명의 위기를 고발한다는 생각은 어느덧 맥을 추지 못하게 된 지 오래이다. 그들이 맡아 하던 역할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노로고(NO LOGO)>라는 책에서 ‘멋 사냥꾼’이라고 부른 시장조사자들이 떠맡고 있다. 그들은 통신원과 포토저널리스트를 동원해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게토(Ghetto)¹를 누비고, 그들의 은밀한 언어 안에 깃들어 있는 성향과 감수성을 파악한다.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비자 욕구 조사의 거대한 정량기법의 사회 통계를 비웃으며 이들은 도시의 인류학자들이 되어 민속지를 쓴다. 과포화된 미디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열광적인 정보통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다. 시대의 풍경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흐릿해지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각보처럼 기워진 세계의 이미지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시장 조사자들과 트렌드 연구자들, 그리고 미래 예측가들의 덕택이다.

 

트렌드, 그 예측 불가능의 생태계

이미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미래생활사전>이나 <클릭! 미래 속으로>의 저자이고, 조금은 섬뜩하지만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의 명성을 얻은 페이스 팝콘(Faith Popcorn)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혹은 청소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의 기상예보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스푸트니크(Sputnik, Inc.)’라는 회사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케터 혹은 트렌드 분석가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단지 상품의 판매를 위한 아이디어 제공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문화분석가이기도 한데, 이는 문화와 경제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상품은 더 이상 제조품이 아니라 정보와 상징·기호(Sign)가 되어버렸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나아가 ‘무게 없는 경제’, ‘무형의(Intangible) 경제’라는 용어들은 유행어가 되었다. 이에 상품의 세계는 곧 문화의 세계이고, 상품의 판매는 물질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욕망과 환상의 소비를 위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트렌드 분석가야말로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분석가이거나 혹은 시대정신을 분별하고 제시하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 와 다비트 보스하르트(David Bosshart)라는 독일의 문화이론가 겸 트렌드 연구자들은 천연덕스레 “트렌드란 문명 속에 깃들어있는 의례”라고 정의한다.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트렌드와 유행의 차이, 또한 트렌드와 사회적 법칙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인다.
유행이란 이미 이뤄진 선택이고 사물 혹은 상품 그 자체이다. 이를테면, 남성용 색조화장품은 유행이지만 ‘메트로섹슈얼’이라는 현상은 트렌드이다. 우리는 메트로섹슈얼이라는 트렌드에 따라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새로운 TV 프로그램과 팝 스타·출판 아이템·패션 디자인·장신구, 나아가 의료서비스와 자동차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때 트렌드는 곧 어떤 유행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습성, 행위의 경향, 심미적인 태도를 아우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트렌드라는 개념에 근접한 또 다른 용어를 이미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이에 국내의 어떤 대기업은 이미 자기네를 ‘생활문화기업’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한편 트렌드는 사회 법칙과도 다르다.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규제된 행위의 규칙’을 가리키는 사회 법칙과 달리, 트렌드는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의 문법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트렌드란 이미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인 행위가 이어짐으로써 행위 방식과 선택이 결정되는 것을 가리킨다. 즉 트렌드란 이미 결정된 규칙이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들의 시리즈이고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행위에 다른 행위가 덧붙여지고, 그 행위에 대한 외부의 반응이 추가되고 내면화되면서 또 다음의 행위는 전개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행위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반복성과 상대적인 일관성이 결국 행위를 규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말하자면 트렌드란 일종의 ‘경향’인 것이다(프랑스의 사회학자 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문화를 특정한 심미적인 성향의 체계로 분석하며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홍대 앞에서 자신이 흠모하는 영국의 펑크 밴드를 카피하는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부르기 위해, 또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 ‘인디음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거나 빌려 쓰게 되고, 다시 그것은 인디음악이라는 ‘일련의 성향’을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인디음악의 정신을 반영하고 집행하는 연주자들의 묶음으로 인디음악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인디음악은 우발적으로 뒤섞이고 또한 외부의 반응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재투입하면서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돌연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인디음악과 ‘짝퉁’ 인디음악을 나누고 가늠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반복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을 순수한 인디음악으로 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디음악의 연주자가 되는 것은 인디음악의 ‘법’에 마침내 다가섬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해석해 냄으로써 어느덧 인디음악의 연주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해석자’와 ‘해석하는 대상의 거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학철학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순수하게 분리시켜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트렌드 역시 이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트렌드를 묘사할 수는 있지만 분석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트렌드라고 묘사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에워싸고 다양한 말을 쏟아내며 행위를 추가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생태계를 만들어 낸다.

‘컨텐츠’로서의 비, 그리고 서태지

문화산업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의 대중문화의 기류 역시 트렌드의 정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용필과 서태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조용필을 위대한 대중음악가로 기억한다. 대중음악의 가인(歌人)이자 장인 혹은 거장으로서의 조용필과, 신세대 문화의 아이돌로서의 서태지 사이에는 대중음악가란 점을 빼곤 일치하는 점이 없다. 그 사이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소년 보이밴드의 댄스뮤직 일색의 대중음악을 향한 볼멘 푸념과 저항은 음악문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명분을 들먹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을 에워싸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주장일 것이다. 물론 대중음악의 생산이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기획사의 시스템을 통해 제작되고, 거대 자본에 의해 집중된 배급 체제와 미디어를 통해 유통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영화산업이나 음반산업의 구조를 보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산업의 구조가 획일화된 대중 소비자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은서태지를 통해 입증된다.
멀리 거슬러갈 것도 없다. 지난해 가장 뜬 ‘비’라는 뮤지션을 생각해보자. 그는 요즘 뜨고 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인 외모와 인상, 분위기…. 시중에서는 그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컨셉트의 진정한 재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꽃미남’의 느끼한 감상적 호소와도 거리를 두고, 촌스럽고 멍청한 ‘진짜 사나이’와도 무관한 그의 이미지는 물론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HOT와 GOD 모두 분발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자본을 거느린 기업의 생산물이 아니라 작은 기획사의 용의주도한 기획과 마케팅을 통해 시장에 나왔다. ‘비’를 기획한 회사는 그를 정보경제의 컨텐츠로 가공하고 판매하는 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의 음반은 디지털 컨텐츠의 쿠폰을 내장하고, 그의 초상은 상품권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간접광고 기법을 도입해 여러 브랜드와 윈윈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모 치킨회사의 광고에 출연해 야마카시라는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를 선사하며 브랜드를 감성화한다. 그의 음반에는 ‘비의 1일 매니저 되기’와 ‘리니지 무료이용권’이 들어 있어 고객관계관리, 멋진 말로 ‘관계마케팅’을 솔선한다. 그렇다면 그는 두루두루 트렌드의 첨단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정보통신산업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하면서 섹슈얼리티와 ‘몸’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트렌드와 함께 한다.
이처럼 현재의 문화산업은 세분된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혹은 트렌드의 방향에 따라 틈새시장의 골목을 누비며 제작되고 마케팅된다. 즉 요즘 유행하는 표현처럼 ‘비는 뮤지션이 아니라 컨텐츠’인 것이다.
조용필이라는 대중음악가가 ‘딴따라’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창적이며 천재적인 개인, 영웅으로서의 예술가’라는 미학적인 신념 속에 대중음악을 향유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청취자로서 FM 음악방송을 열심히 듣고 연주회에 참여하는 전 시대의 대중음악 향유자들과 지금의 대중음악 수용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태지가 대표하듯이 대중음악은 곧 ‘그 시대를 향한 태도’라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원까지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제 나와 대중음악가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서태지는 ‘우리’가 된다.
물론 우리는 이를 밥 딜런이나 비틀즈,

그리고 마돈나·에미넴 등의 차이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록큰롤의 천재적인 아티스트였으며 반항적인 시대의 영혼이었던 비틀즈나 밥 딜런과는 달리 마돈나와 에미넴은 동시대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틀즈를 ‘록큰롤의 모차르트’라 부른 것처럼 마돈나와 에미넴을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요즘의 트렌드 분석가의 표현을 빌자면 신화의 제조자이고 생활양식의 창조자들이며 시대의 이야기꾼이고 삶의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그것이 ‘진정한 체험과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고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조작된 욕망에 길들여지도록 한다’는 데에 모아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판은 경제와 문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은 문화산업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세계를 상품이라는 보편적인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이른바 ‘신경제’의 시대로 불리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계속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트렌드라는 개념이 난데없이 부상하고 그에 관련된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현상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잘 팔릴 것인가’를 예상하고 소비자의 욕구를 조사하던 시대의 트렌드는 우리 시대의 트렌드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트렌드란 결국 ‘문화’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 역시 다르지 않다. 결국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의 부상은 새로운 상품 세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때 ‘문화는 곧 상품이고 상품은 곧 문화’인 듯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따로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집약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트렌드’일 것이다.
‘쿨(Cool)’에 관한 강박증을 생각해보자. 청소년 하위문화와 대항문화의 레퍼토리를 모방하고 전용한 이 희대의 트렌드는 곧 상품의 세계이자 문화적 관례의 세계이다. 그것은 의류와 가방·음반에서부터 심지어 마약과 윤리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며, 광고와 마케팅·홍보에서 교육과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결국 펑크가 룩이 되고, 그런지가 패션이 되는 세계, 그것은 또한 트렌드의 세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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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게토(ghetto)
게토는 ‘중세 유럽에서 설치한 유태인의 강제 거주지역, 나치 독일이 만든 유태인 강제수용소’처럼 ‘강제로 수용되어 자유가 없는 공간’을 뜻하며, ‘소통이 없으며, 반대로 외부의 영향이나 규제도 받지 않는 공간, 그들만이 모여 사는 곳’ 등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