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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나 문화비평가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문화나 문명의 위기를 고발한다는 생각은 어느덧 맥을 추지 못하게 된 지 오래이다. 그들이 맡아 하던 역할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노로고(NO LOGO)>라는 책에서 ‘멋 사냥꾼’이라고 부른 시장조사자들이 떠맡고 있다. 그들은 통신원과 포토저널리스트를 동원해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게토(Ghetto)¹를 누비고, 그들의 은밀한 언어 안에 깃들어 있는 성향과 감수성을 파악한다.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비자 욕구 조사의 거대한 정량기법의 사회 통계를 비웃으며 이들은 도시의 인류학자들이 되어 민속지를 쓴다. 과포화된 미디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열광적인 정보통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다. 시대의 풍경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흐릿해지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각보처럼 기워진 세계의 이미지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시장 조사자들과 트렌드 연구자들, 그리고 미래 예측가들의 덕택이다. | ||||||||||
트렌드, 그 예측 불가능의 생태계 이미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미래생활사전>이나 <클릭! 미래 속으로>의 저자이고, 조금은 섬뜩하지만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의 명성을 얻은 페이스 팝콘(Faith Popcorn)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혹은 청소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의 기상예보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스푸트니크(Sputnik, Inc.)’라는 회사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케터 혹은 트렌드 분석가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단지 상품의 판매를 위한 아이디어 제공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문화분석가이기도 한데, 이는 문화와 경제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홍대 앞에서 자신이 흠모하는 영국의 펑크 밴드를 카피하는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부르기 위해, 또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 ‘인디음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거나 빌려 쓰게 되고, 다시 그것은 인디음악이라는 ‘일련의 성향’을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인디음악의 정신을 반영하고 집행하는 연주자들의 묶음으로 인디음악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인디음악은 우발적으로 뒤섞이고 또한 외부의 반응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재투입하면서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돌연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인디음악과 ‘짝퉁’ 인디음악을 나누고 가늠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반복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을 순수한 인디음악으로 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디음악의 연주자가 되는 것은 인디음악의 ‘법’에 마침내 다가섬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해석해 냄으로써 어느덧 인디음악의 연주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해석자’와 ‘해석하는 대상의 거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학철학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순수하게 분리시켜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트렌드 역시 이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트렌드를 묘사할 수는 있지만 분석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트렌드라고 묘사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에워싸고 다양한 말을 쏟아내며 행위를 추가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생태계를 만들어 낸다. |
‘컨텐츠’로서의 비, 그리고 서태지 문화산업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의 대중문화의 기류 역시 트렌드의 정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용필과 서태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조용필을 위대한 대중음악가로 기억한다. 대중음악의 가인(歌人)이자 장인 혹은 거장으로서의 조용필과, 신세대 문화의 아이돌로서의 서태지 사이에는 대중음악가란 점을 빼곤 일치하는 점이 없다. 그 사이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소년 보이밴드의 댄스뮤직 일색의 대중음악을 향한 볼멘 푸념과 저항은 음악문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명분을 들먹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을 에워싸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주장일 것이다. 물론 대중음악의 생산이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기획사의 시스템을 통해 제작되고, 거대 자본에 의해 집중된 배급 체제와 미디어를 통해 유통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영화산업이나 음반산업의 구조를 보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산업의 구조가 획일화된 대중 소비자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은서태지를 통해 입증된다. | |
대중문화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그것이 ‘진정한 체험과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고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조작된 욕망에 길들여지도록 한다’는 데에 모아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판은 경제와 문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은 문화산업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세계를 상품이라는 보편적인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이른바 ‘신경제’의 시대로 불리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계속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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