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나요.”
지나치게 친절한 완역으로 악명(?) 높은 모 외화번역가의 이 말 한마디가 검게 변해 버린 화면 위에 흰 글씨로 떠오른다. 영화는 끝났다. 정말? 아직 피핀과 메리는 납치된 상태이고, 프로도와 샘은 여정의 반도 가지 않았다. 가야 할 그곳, 머나먼 죽음의 산, 그 분화구를 바라보는 두 호빗의 모습에서 검게 페이드 아웃되면서 “내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나잔다.
정보에 친숙한 이들이야 물론 사전지식을 통해 영화가 이렇게 이야기를 못 끝낸 채 좌판을 접고 내년에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냥 완벽한 하나의 기결구조를 가진 영화를 기대했던 나머지 '교육되지 않은' 관객들에게 이 세 시간짜리 영화의 결말은 그야말로 맥 빠지는 것이었다.
'속편'이라는 형식으로 같은 영화의 후속이 나오는 것은 무척 흔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시리즈’라는 방식을 따른다. 그 시리즈의 반대말은 ‘시리얼’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 매 편 독립된 에피소드를 다루는 <뉴논스톱>이나 <CSI>는 시리즈의 범주에 속하지만, 매번 완결을 다음으로 미루면서 스토리를 진행시켜 나가는 <대장금>은 시리얼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성공한 할리우드의 프랜차이즈들은 대부분 시리즈의 형식을 띠고 있다. 예컨대 <인디아나 존스>가 나치의 성궤 탈취 계획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이야기가 한 편의 영화를 이루고, 성배 탈취 계획과 십자군의 비밀에 얽힌 이야기가 또 다른 한편의 영화를 이루는 식이다. 어쨌든 한 편, 한 편 정해진 시간 안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시리즈의 특징이다. 이와는 달리 <반지의 제왕>은 마치 한 편의 커다란 영화를 세 번에 나누어 보여주듯 이야기의 끝을 전부 마지막 편으로 몰아버린 시리얼 형식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식의 ‘영화 시리얼’들이 늘어난 느낌이다. 정말 악명 높았던 <제국의 역습>의 엔딩처럼 예전에도 관객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드는 잔인한 시리얼은 있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빈번하게 트렌드화되었던 적은 영화 역사상 없었지 않았나 싶다.
1997년의 <스타워즈> 재개봉을 계기로 시리얼적 성격을 지닌 ‘트릴로지(3부작)’ 극장영화의 가능성이 일반인들에게 조심스럽게 테스트되기 시작했고, 곧 “다스 베이더가 왜 다스 베이더가 되었는지 이제 3부에 걸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스타워즈> 프리퀄 트릴로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2부가 종결된 이야기는 2005년에 마지막 편을 개봉할 예정에 있다.
워쇼스키 형제(Andy & Larry Wachowski)의 트렌디한 SF <매트릭스> 역시 3부작이다.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로 끝난 1편과는 달리 2부와 3부는 ‘과연! 다음주 이 시간에…’를 연상시키는 아슬아슬한 엔딩으로 이어져 있다. 이 둘은 6개월의 인터벌을 가지고 상영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원작의 크기 때문에 세 편으로 나누어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반지의 제왕>이나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사지절단 잔혹활극 <킬빌> 역시 두 편으로 나뉘어 6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개봉된다. ‘홍콩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선언과 함께 등장한 <무간도> 시리즈 역시 3부작으로 되어 있다. 시리얼 형식이 아니라 각 편이 완결성을 지니지만, 결국에는 세 편의 영화에 걸쳐 한 가지 사건을 여러 가지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기존의 다른 3부작들과는 다른 시리얼적 접근이라 볼 수 있다.
극장영화는 그 특성상 시리얼을 하기에는 여러 제약 조건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제작비가 워낙 높은 매체이기 때문에 인터벌이 길 수밖에 없고, 극장까지 와서 돈을 내고 보는 관객들의 높은 능동성을 요구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그 능동적 비용에 상응하는 만족을 줘야 한다는 제작자들의 강박관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이런 종류의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영화, 더 나아가서는 문화상품의 소비행태가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매니아는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다. 매니아·오타쿠(おたく)·긱(Geek)·폐인 등, 언어에 따라, 그 병증(?)의 깊이에 따라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이 모두는 문화를 훨씬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 수용은 ‘거래’다. 지불한 만큼 보고, 그만큼을 얻고, 그걸로 거래는 끝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매니아 계층은 이 거래에 자꾸 가치를 더해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거래를 만들어낸다. 좋아하는 문화현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더 알려고 공부하고 파헤치며 분석하는, ‘노력’이라는 비용을 투자해 또 다른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관련 상품을 구입하고 수집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스스로 흉내 내기까지도 한다.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매체의 탄생 역시 이러한 매니아적인 적극적 소비를 촉진시킨다. DVD라는 매체는 물론 어느 연구소에서 ‘발명’된 것이겠지만,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활용되게 된 것은 매니아들의 집요함 때문이었으리라. 한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을 빨아먹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요즘 DVD들은 본 영화와 더불어 각종 잡다한 서플리먼트를 달고 출시된다. <반지의 제왕>의 제작사인 뉴라인시네마는 이런 DVD시장의 특성을 활용, 기존 극장판에 내용을 추가해서 편집한 ‘확장판’이라는 이름의 DVD전용 에디션을 내놓아 큰 히트를 친 바 있다. 그리고 인터넷의 발전 역시 매니아들이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3부가 개봉되고, 이를 본 많은 이들은 “내년은 무슨 재미로 기다리나”라는 한탄의 말을 내뱉었다. 이 탄식 속에 바로 새롭게 변하는 문화감상의 트렌드가 집약되어 있다.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 기대하고 공유하며, DVD를 통해 추억을 곱씹었던 지난 2년의 세월은 그들에겐 마치 장기간의 피크닉이나 파티 같았으리라. 이러한 적극적인 문화소비의 트렌드가 전체 문화산업에 불러일으키는 놀랍고도 꾸준한 혁명은 아직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영화 팬들에게 말한다, “정말 그대들은 황금의 시대에 살고 있노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