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04 : Case Study -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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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은 Sex다
 
 
캘빈 클라인 (Calvin Klein)
 
김 원 규 CD | CD2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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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과 예술 사이

얼마 전 평소 똑똑해 보이던 한 여자 탤런트가 ‘위안부 누드’라는 해괴망측한 걸 들고 나와 모두를 분노하게 만든 적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다시 한번 과거 치욕의 역사에 치를 떨었고, 그들의 불손한 기획 의도에 울부짖었다. 국민들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급기야는 기획사와 탤런트측이 국민과 위안부 할머니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고, 마침내 예의 작품(?)을 소각하기에 이르러서야 진정 기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불씨는 거기서 진화되지 않고 그 탤런트를 연예계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성난 목소리가 인터넷 사이트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 동안 연예계 주변에서는 일부 연예인들의 누드 열풍에 대해 ‘언젠가는 누가 다쳐도 다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우려처럼, 더 자극적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극단의 강박관념이 이번 사고(?)를 저지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누드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치졸한 상업주의와 야합할 때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누드를 찍는 여자 연예인들은 젊은 날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욕구에서 시도했고, 또한 그 아름다움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은 의도에서 서비스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겠는가? ‘누구누구는 누드 찍어서 몇 십억 벌었대!’라는 소문과 유혹이 그녀들을 벗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드를 시도한 연예인들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아름답다’는 칭찬에서부터 ‘돈의 노예’라는 혹평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아마도 광고나 영화·문화상품 등 에로티시즘을 소재로 한 것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건 외설이라고 매도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느 것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평가를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 잣대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브롱크스의 다섯 살배기 소년들

캘빈 클라인(Calvin Richard Klein)은 1942년 11월 뉴욕의 가난한 동네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헝가리에서 이민 온 레오 클라인과 오스트리아 이민자의 딸 플로라 스턴의 세 자녀 중 둘째였는데, 그가 태어난 동네는 동유럽과 아일랜드 그리고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힘겨운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당대에 알아주는 재봉사로 조그만 양복점을 꾸려갔는데, 어린 클라인이 그곳에 자주 놀러 가면서 아마도 외할머니의 재주가 손주에게 대물림된 것은 아닌가 싶다.
한편 그의 동업자 배리 슈와츠도 클라인의 집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살았는데, 가정 형편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5살부터 친구로 지냈는데, 어린 나이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의 이런 모의(?)는 바야흐로 패션 제국 캘빈 클라인을 건설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특히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도 훗날 걸출한 인물을 줄줄이 배출한 PS 80에 다녔으며, 동창으로는 그 유명한 랠프 로렌, 그리고 그의 첫 부인 제인 센터 등이 있다. 물론 랠프 로렌은 그보다 4살 위였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만난 일은 없지만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자존심을 건 승부를 펼치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고 한다. 특히 미술에 탁월한 끼를 발휘해 학교 5층 복도에 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은 그가 학생들에게 거의 신적인 존재로 보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동네를 떠나 맨해튼의 산업미술고교(High School of Industrial Art)로 진학했는데, 동네에서는 비범한 학생으로 떠받들어졌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돋보이지는 못한 듯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부모는 대학 진학을 원했지만 그는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위해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로 방향을 바꿔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번갈아 하면서 드디어 1963년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졸업을 하자마자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을 키웠는데, 그러던 중 아버지로부터 1만 달러를 빌려서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1968년 3월, 맨해튼 7번가에 있는 요크호텔의 엘리베이터 바로 앞쪽에 위치한 613호실에 거의 구멍가게 수준의 사무실을 오픈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캘빈 클라인의 전신이 된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들의 원대한 꿈과는 반대로 처음에는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본위트 테일러 백화점의 상품부장인 돈 오브라이언(Don O’Brien)이 층을 잘못 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쇼룸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매장을 둘러보고는 그 유명한 커스틴(Mildred Custin)에게 샘플을 보여달라고 했으니, 그것이 성공으로 달리는 고속철이 되리라고는 캘빈 클라인 본인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캘빈에게 독점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1차로 5만 달러어치를 주문했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5만 달러.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산지사방에서 그의 옷에 반한 바이어들이 주문에 주문을 거듭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에게 성공은 빨리 찾아 왔다. 금전적으로도 성공했지만, 73년에 최연소 나이로 미국 패션 비평가들이 수여하는 코티상(Coty American Fashion Critics Award)을 받았고, 83년과 86년에는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여성복 분야의 상을 수상했으며, 93년에는 여성복과 남성복이 동시에 상을 받는 최초의 디자이너로 등극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또한 96년에는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ADC)에서 그의 독보적인 광고활동에 대한 매니지먼트 메달을 받기도 했다.
한편 그는 1976년에 청바지를 출시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완전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런 그에게 퓨리턴 패션에서 라이센스 계약 의뢰가 들어왔다. 디자인과 광고는 캘빈 클라인이 맡고, 생산은 퓨리턴에서 하는 조건이었다. 그에 따라 78년에 출시하자마자 20만 장이나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 타임스 스퀘어에 엉덩이를 쑥 내밀고 있는 대형 사이즈의 옥외광고물을 설치하기도 했는데<광고 1>, 이에 여성단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80년에 터진 15세 소녀 브룩 쉴즈(Brooke Christa Shields)의 광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진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그들은 TV광고를 집행해서 경쟁사들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는데, 15세의 쉴즈가 모델로 기용된 이 광고는 논쟁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독서가 영혼과 맞닿아 있다면 캘빈 진은 내 몸과 맞닿아 있죠. 내 옷장엔 캘빈 진이 일곱 벌이나 있어요, 만약 그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난 타락하고 말 거예요. 돈이 생기면 캘빈을 사요. 그 나머지 돈으로는 집세를 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그 유명한 카피가 이어진다.
“나와 캘빈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 것도 없어요(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
광고가 나가자마자 그 다음 주에 무려 40만 장 이상이 팔리는 대기록을 수립했지만, 여론의 질타와 여성단체의 분노, 교육자들의 저항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분노에도 아랑곳없이 옷은 한 달 만에 200만 장 이상 팔리는 이변을 낳았다. 광고에 대한 질타가 오히려 수많은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셈이 되었고, 방송 보도와 신문에서의 논쟁이 오히려 광고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연간 30억 달러의 판매를 가능하게 한 사건(?)의 발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결국 오늘의 캘빈 클라인의 성공을 만든 것은 바로 광고였다. 아니, 더욱 엄밀히 말한다면 광고보다 더 효과를 거둔 것은 미국 언론의 호들갑이었다. 섹스어필 광고를 집행할 때마다 언론의 대대적인 비난 기사와 사회단체들의 분노의 목소리가 나옴으로써 오히려 회사 입장에서는 퍼블리시티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캘빈 클라인의 은밀한 광고전략으로 보이며, 오늘도 캘빈 클라인의 광고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95년에는 새로운 청바지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어린 남녀 모델들을 너무나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극적으로 표현하여 문제가 되었다.
흰 속옷이 다 드러나 보인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앳된 소녀의 모습과<광고 2>, 미소년이 짧은 청바지 사이로 흰 팬티를 드러내 놓은 광고<광고 3>가 나가자 의도적으로 어린이 포르노를 광고에 이용했다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특히 타임스 스퀘어에 내걸린 옥외광고물은 어린이 포르노라는 이유로 시민단체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광고 2>. 더 결정적인 것은 <뉴욕 데일리>지가 모델 중에 미성년자가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었는데, 마침내 FBI가 수사에 나서는 홍역을 치르고서야 광고를 내렸다.
사건이 커지자 캘빈 클라인은 <뉴욕 타임스>의 전면광고를 통해 광고를 일체 중단한다는 성명서를 게재하면서 “이번 광고의 의도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강한 개성과 독립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변명했다.
그 동안 광고가 논란거리가 되어도 중단하거나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사태의 심각성 때문인지 광고를 중단하고야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빈 클라인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치명상을 입었다기보다는 매스컴들의 대대적인 보도가 오히려 광고를 해준 셈이 되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문화가 된 언더웨어

진 시장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캘빈은 1982년, 드디어 언더웨어 시장에 뛰어들었다. 먼저 남성 언더웨어를 출시했는데, 타 제품보다 고가에 판매되었지만 대성공을 거두었다.
광고는 우선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던 톰 힌티너스(Tom Hintinaus)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람한 근육과 섹시함을 한껏 발휘한 것을 선보였다<광고 4>. 특히 버스 대합실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은 붙여 놓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훔쳐가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캘빈 클라인의 인기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남성용에 이어 여성용도 출시되었는데 이러한 언더웨어는 캘빈 클라인이 거둔 성공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는 미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그녀의 딸인 마시 클라인은 “남자와 잘 때마다 그 남자의 팬티에 새겨진 아빠의 이름을 봐야 한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라. 분위기 잡고 남자와 뜨거운 밤을 즐기려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남자의 팬티에서 보게 된다면 마치 그의 아버지가 야단치는 듯한 느낌을 갖지는 않을까?
이처럼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는 수많은 청춘 남녀의 ‘유니폼’이 되어 판매의 수직상승을 가능하게 했는데, 1985년에는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Back to the Future>에 소개되면서 이윽고 타깃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기호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의 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팔리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브랜드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는 이 주장에 가장 적합한 샘플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요즘처럼 성이 개방된 시대에는 언더웨어는 더 이상 ‘언더’가 아니고 패션의 일부분로서, 그의 의도대로 소비자들이 그대로 따라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는 언더웨어가 더 이상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더웨어를 패션 상품으로 개발했고, 이런 그의 의중은 적중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유니폼’인 캘빈 클라인을 입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는 바로 섹스라는 기호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광고 1~8>


‘원초적 본능’으로 정상에

캘빈 클라인은 향수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시대 흐름이나 이슈에 부합해서 가장 트렌디한 향수를 개발할 뿐만 아니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광고 비주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85년에 출시된 옵세션(Obsession: 강박관념)은 아마도 캘빈 클라인 광고 역사상 가장 외설적인 시비에 휩싸인 작품을 선보여 또 한번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성행위를 연상할 수 있는 그림이거나 전라의 모델들이 엉겨 있는 모습들은 일대 충격이고 사건이었다. 특히 아직 소녀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케이트 모스(Kate Moss)를 전라의 모습으로 기용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광고 14>.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다. 섹스 장면을 그대로 연상케 하는 후속 광고들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광고와도 차원이 달랐다. 대개 섹스어필 광고들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관음증을 유발하게 하는데, 이 광고들은 그 정도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저속하지 않고 한 편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이런 반응과는 무관하게 <광고 15~17>은 너무 야하다는 이유로 광고 게재거부 소동까지 일어나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과감하고 파격적인 시도들은 역시 매스컴으로부터 질타를 받기는 했지만, 캘빈 클라인의 인기에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특히 옵세션 광고는 에로티시즘이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이에 1989년에는 미국인 2만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좋게 기억되는 인쇄광고’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으며, 이후 4년 연속 기억률 1위 광고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른 광고와 달리 포르노그래피에 해당하는 비주얼이지만, 추하지 않고, 여자들이 남자들의 성의 노예로 보여지지 않으며, 그 자체로 감상하고 싶은 예술 작품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광고에 대해서 캘빈 클라인은 “광고는 나의 즐거움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느 정도 옵세션(강박관념)이지만, 고백하건대 광고를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즐겁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에로티시즘을 포르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세인들의 부정적인 평가에 쐐기를 박았다.
그는 88년에는 켈리와의 두 번째 결혼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Eternity를 선보였다. 그런데 아마도 기존 캘빈 클라인 광고와 어프로치가 180도 다른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된다<광고 18~20>.
94년에는 유니섹스 향수인 ck one이 은은하고 부담 없는 녹차향 향수로 출시되어 전세계에 또 한번 캘빈 클라인의 이름을 부각시켰는데, 특히 이 제품은 최초로 유니섹스 향으로 개발되어 전세계 연인들로 하여금 커플 향이라는 개념으로 사랑을 받았다. 또한 98년에 자기 이름을 브랜드에 걸고 내놓은 Truth Calvin Klein은 그 향의 고급스러움으로 매니아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다<광고 21~23>.

뉴욕이 훌륭한 101가지의 이유

캘빈 클라인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간 30억 달러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는 패션 디자이너이며, 누구보다 동물적인 비즈니즈 감각을 갖춘 비즈니스맨이고, 광고를 가장 잘 이용한 이미지 메이커로, 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광고인은 “광고 속의 섹스는 20분 안에 죽는다”고 선언적으로 말했다. 20분 안에 기억 속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섹스는 기억하더라도 브랜드는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캘빈 클라인의 광고에서는 철저하게 예외의 법칙으로 존재하고 있다. 많은 소비자들은 한번만 보는 것으로 브랜드를 기억했고, 결국은 지갑을 열 수밖에 없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캘빈 클라인의 견해는 단호하다.
“유능한 크리에이터들과의 작업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킨다. 광고의 경우 언제나 그렇다. 무엇인가 관능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우리는 항상 마지노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위험한 선을 따라 걷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광고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마지노선을 표현했던 것이다. 광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놀라움이나 차별화가 없으면 잊혀진다는 속성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기존의 모든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도발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고자 했던 캘빈 클라인의 전략은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그대로 적중하며, 1984년에는 <뉴욕 타임스>가 뽑은 ‘뉴욕이 훌륭한 101가지 이유’의 리스트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가 시도한 수많은 광고들은 일종의 스캔들 기법으로, 광고가 집행되자마자 바로 사회적 핫이슈로 대두되었고, 뉴스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광고 24~28>.
앞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회사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저항과 언론의 까발리기식 비판에 힘없이 쓰러졌지만, 캘빈 클라인은 오히려 그 힘으로 정상의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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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리사 마시(Lisa Marsh), 박미영 역, <캘빈클라인: 브랜드·디자인·광고의 유혹(The House of Klein)>, 루비박스, 2003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