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02 : Special Edition - LG애드 Vision Statement "YEON" - 1.What is Yeon
201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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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애드는 Vision Statement인 ‘연(緣)’에 대한 이해와 실천방안 모색을 위해 지난해 12월 12일부터 18일까지 LG인화원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임직원 워크샵을 가졌습니다. 이 글은 이 자리에서 연의 철학적, 학문적 연원과 광고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등을 소개한 영산대 배병삼 교수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편집실
광고와 동양사상의 유사점 “진리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좋은 광고 역시 먼 곳에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내 주변 도처에 있었건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내 주변 도처에 [광고거리가] 있었건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라는 대목 가운데, 그 ‘눈’(眼目)이라는 단어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 사는 일의 궁극은 다 통하는 바가 있거니…”라는, 숨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지요. 間, 緣, 道 (사이, 연 그리고 길) 위의 세 마디는 이 강연의 구성이자, 주제이면서 또 소재입니다. ‘間’은 서론이면서 유교사상을, ‘緣’은 본론이면서 불교사상을, ‘道’는 결론이면서 도교사상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강연은 동양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일종의 투어(tour)인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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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후략)” 라고 노래합니다. 이 시 속의 그 ‘아들이자, 아버지이고 동생이면서 형인’ 나, 요컨대 ‘관계적 자아’(inter-subjective)는 유교사상 속의 나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서양근대의 ‘나’가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개인(in-dividual)이라면, 우리 전통적 세계에서의 나는 ‘관계 속의 존재’입니다. 이것이 잘 표현된 것이 오륜(五倫)의 그 윤(倫), 인간(人間)이라고 할 때의 그 간(間) 같은 개념들입니다. 가령 부-자간의 관계를 친(親)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써서 잘 수행할 적에, 또 부-부간의 관계를 특별남(別)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써서 잘 수행할 적에야 ‘사람다운 사람’(仁)이 ‘되는 것’(becoming)이지요. ‘사이’ 속의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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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계보학 우선 연이라는 개념이 불교적 인연이라는 의미를 함장하고 있다면, 분명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이 합쳐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연이라는 중국어에 불교적 의미가 포함된 것이지요. 이 상황을 알약, 가령 ‘콘택600’에 비유해볼까요? 애초에 중국에서 ‘緣600’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의미없이 언어만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 인도에서도 ‘인연’의 의미를 포함한 어떤 개념이 또 존재하고 있었겠지요. 이것이 어느 날 합쳐진 것입니다. 전통중국에서의 연 인도에서의 연 |
그런데 불교에서는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감촉되는 이 현상(相)을 형성하는 원인자를 둘로 나누어 봅니다. 그 1차적, 근본적 요소를 헤투(Hetu)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인(因)이라고 번역됩니다. 또 2차적, 부차적 환경을 바로 ‘프라티아야’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연(緣)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쌀이 있습니다. 그 쌀을 만들게 한 1차적 원인인 씨앗, 즉 볍씨가 헤투가 됩니다. 물론 볍씨가 쌀의 주 요인이지만 그렇다고 볍씨만으로 쌀이 될 수는 없지요. 여기에는 적당한 햇살과 비, 농부의 김매기, 추수와 같은 노력이 함께 들어가야만 현상으로서의 쌀이 형성됩니다. 이런 볍씨를 제외한 2차적 조건, 환경적 요인들이 ‘프라티아야’인 것이지요. 그러니 인연(因緣)이라는 말 자체가 헤투-프라티아야라는 불교적 개념인 것으로, 이 개념이 중국 땅에서 씨앗·원인을 보다 강렬하게 표상하는 ‘因’자와, 그리고 가선·테두리처럼 좀 변방적 의미를 함의한 ‘緣’자를 택해 ‘인연’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연의 탄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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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문재, <지구의 가을>- 제1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결연자의 계보학 그런데 이런 샤먼 가운데 특출한 자, 또는 샤먼을 다른 이름으로는 성인(聖)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기 성인의 聖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귀신의 소리(口)를 귀기울여서(壬) 듣는(耳) 존재’라고 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聖의 특성으로서 그 ‘귀기울여 듣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고대 결연자의 원형인 샤먼의 특성은 ‘말하는 자’, ‘지도하는 자’, ‘알려주는 자’이기 이전에 ‘듣는 자’, ‘소청을 받는 자’, ‘수용하는 자’라는 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샤먼으로 하여금 정치 지도자가 되게 만든 실제 힘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귀신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능력자로서의 샤먼은 점차 인지가 발달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그 역할을 새로운 형태의 결연자가 맡게 됩니다. 그것이 공자(孔子)의 출현으로 야기된 ‘군자(君子)’라는 인간형입니다. 이들은 귀신의 소리를 듣는 존재에서 사람의 소리를 듣는 존재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자의 특성 첫째, 군자는 성찰(省察)하는 존재입니다. 우선 이들은 부끄러움(恥)을 발견하였습니다. 가령 ‘<논어>의 군자는 문제점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고, 소인은 바깥에서 찾는다’는 지적은 문제점을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성적, 성찰적 존재’로서의 군자상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차마(忍)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맹자>는 바로 이 ‘차마’라는 부사 위에 지어진 사상입니다. 아니, 유교사상 전체가 바로 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孝)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慈)이든, 앞서 규정한 관계적 존재로서의 자아론의 핵심은 바로 이 ‘차마’라는 마음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될 뿐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움’(恥)과 ‘차마’(忍)는 군자로 표징되는 결연자의 중요한 심리적 특성입니다. 둘째, 군자는 경청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샤먼, 성인(聖)의 듣는 존재로서의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명령하고 지령하는 입(口)이 아니라, 수납하고 용납하는 수용성으로서의 귀(耳)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셋째, 군자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시(詩), 서(書), 예(藝), 악(樂)을 두루 섭렵한 창작가들이었다는 점은 특히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이는 광고인들이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요컨대 군자란 우리가 알고 있듯 ‘도덕군자’이기 전에 크리에이터였습니다. 넷째, 군자의 특성은 호학(好學)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어떤 영예로운 표현도 마다했던 공자이지만 이 한마디, “배우기를 좋아한다”(好學)는 말은 스스로 자처하기조차 하였습니다. <논어>의 첫 마디가, 다 아시다시피, ‘배우고 또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으랴(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지 않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라는 구절도 주변에서 무엇이든 배우려 드는 ‘호학’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
연을 실현할 광고인의 덕목(2D, 2L)과 속성(2C)
앞서 우리는 연의 의미와 그 연을 실현해왔던 결연자들인 샤먼과 군자의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와 브랜드, 또는 공공성과 사익을 연결하고, 나아가 욕망과 분노를 소통시키는 광고인의 그 결연자로서의 특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동양사상의 입장에 서서 연을 매개로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 광고인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네 가지 덕목과 두 가지 속성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네 가지 덕목이란 발견자(discoverer), 현상자(developer), 호학자(learner), 경청자(listener)입니다.
첫째, ‘발견자’란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그 <주역> 속의 지중유산(地中有山) 이야기처럼 주변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하고 특별한 진리의 틈새를 발견하는 안목[눈]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고인이 갖출 첫 번째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현상자’란 필름상태의 음화(陰畵)를 사진상태의 양화(陽畵)로 만드는 과정, 그 현상적 과정을 뜻합니다. 아무리 일상적 삶 속의 비범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눈, 또는 발견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광고인들은 이를 이미지, 디자인 혹은 카피로 표현해내는 기술이 함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셋째, ‘호학자’란, 사회와 기호(嗜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과 사회, 그리고 기술의 변화를 언제나 넉넉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논어> 식으로 표현해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체화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열린 마음가짐(open mind)’이 필수적이겠습니다.
현재 나의 수준, 또는 나의 성과(작품)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에고의 문턱이 있는 경우에는, 새롭게 닥치는 변화의 물결이 아무래도 사소하거나, 또는 잘못된 경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보수화되어버리면, 광고인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넉넉히 그리고 깊숙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학습하는 자세는 광고인에게 필수적인 또 하나의 덕목이겠습니다.
넷째는 ‘경청자’로서의 덕목입니다. 이것은 샤먼과 군자의 그 듣기 특성을 잇는 것입니다. 소비자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또는 사회의 공공성의 요구를 귀담아 듣는 것, 그리고 생산자의 욕구를 제대로 간파하는 것들이 다 경청자로서의 덕목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광고인의 속성입니다. 앞서 샤먼으로부터 면면한 결연자로서의 속성인 연결자(connector)와 소통자(communicator)로서의 계보를 오늘날 광고인들이 그대로 잇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연결자’로서 광고인이 도모할 바는 ‘화(和)’의 실현입니다. 화란 일요일 아침드라마의 그 하하호호 웃는 장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실은 팽팽한 긴장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운, 그러나 한 순간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절묘한 조화입니다.
공동체 또는 회사 내부에서 화의 실현은 두 가지의 덕목이 서로 교차할 때 이뤄집니다.
상급자(또는 임원진)들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맥락을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화란 다른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열린 마당을 뜻합니다. 반면 동(同)은 유일한 가치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즉 화이부동이란 ‘다른 견해를 충분히 용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가 서(恕)라고 할 수 있는데, ‘서’란 ‘남의 입장으로 접어서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려는 자세, 이것이 화이부동을 실현하는 구체적 태도가 되겠지요.
반면 하급자(또는 일반 사원)들은 ‘화이불류(和而不流)’의 맥락에 유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화이부동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고, 화이불류는 <중용>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어쨌건 화이불류라고 할 때의 화란 상급자와의 훌륭한 소통상태, 또는 그야말로 화목하여 따뜻한 상태를 뜻합니다. ‘류(流)’란 그 화목함이 넘쳐서 자기 주장이 앞서서 전체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지경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요컨대 화이불류란 “화목을 지향하되 그것이 개체들의 자기 주장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는 예절지(禮節之: ‘예로써 매듭을 짓다’, <논어>)입니다. 즉 상하, 또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태도이지요.
이렇게 ‘남의 입장으로 접어서 생각하는’ 서(恕)의 태도와 공동체의 질서를 지켜 화목을 유지하려는 예절지(禮節之)의 태도가 팽팽하게 교차할 적에야 화(和)는 실현되는 것이지요.
둘째는 ‘소통자’입니다. 소통이란 원망(怨)과 정체, 욕망의 불통을 해소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오늘날의 갈등은 소통의 부재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광고인들은 더욱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이 소통을 도모하는 파일럿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소통자’로서의 광고인이 되기를 당부하는 공자의 작은 메시지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공자의 제자인 ‘중궁’이 인(仁)을 여쭈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문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든 ‘큰손님’으로 여기고 공대하며,
아랫사람을 부릴 적엔 큰 대회를 치르듯 하시게.
자네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나라에서건 원망(怨)이 없을 것이야.” (<논어> 12:2)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요구하지 않음(己所不欲, 勿施於人)”, 이것이야말로 ‘소통자’가 되기 위한 첩경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배병삼 / 1959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경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儒道會) 부설 한문연수원에서 수학했고,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산대학교 매스컴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한글세대가 본 논어 1·2>,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산문집), <삼국통일과 한국통일>(공저), <율곡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공저), <다산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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