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02 : Special Edition - LG애드 Vision Statement "YEON" - 1.What is Yeon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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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 緣, 道  
 
1.What is Yeon
 
배 병 삼 | 영산대 교수
ibaebs@ysu.ac.kr
 

LG애드는 Vision Statement인 ‘연(緣)’에 대한 이해와 실천방안 모색을 위해 지난해 12월 12일부터 18일까지 LG인화원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임직원 워크샵을 가졌습니다. 이 글은 이 자리에서 연의 철학적, 학문적 연원과 광고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등을 소개한 영산대 배병삼 교수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편집실


강연요청을 받고나서, 광고인들과 만난다는 데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부담도 잔뜩 가졌습니다. 저는 전통사상을 공부하는 사람, 말하자면 ‘온고(溫故)’를 하는 사람인데 반해, 여러분들은 최신의 업무, 말하자면 ‘지신(知新)’을 행하는 사람들이니까, 그 사이에 관계를 맺을 접점이 있을까 하고 염려됐지요.

광고와 동양사상의 유사점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 대강이라도 알아보고자 광고에 대한 책들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만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진리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좋은 광고 역시 먼 곳에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내 주변 도처에 있었건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이강우, <대한민국 광고에는 신제품이 없다>, 44쪽)

“내 주변 도처에 [광고거리가] 있었건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라는 대목 가운데, 그 ‘눈’(眼目)이라는 단어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 사는 일의 궁극은 다 통하는 바가 있거니…”라는, 숨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지요.
여기 ‘눈’이라는 단어는 곧바로 <주역> 겸(謙)괘를 푼 글 가운데 ‘지중유산’(地中有山)이라는 대목과 겹쳐졌습니다. ‘지중유산’은 “내 발 밑에 산이 있다”, 또는 “내가 걷는 이 지표면이 실은 산의 정상이다”는 뜻이지요. 이는 몸에 익어서 그냥 심드렁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 실은 너무나도 놀랍고 특별나며 비상한 삶이라는 통찰(눈)이 깃든 말입니다. 여기서 평생을 광고업에 종사한 광고인이 획득한 ‘지신(知新)의 안목’과 수천 년 묵은 ‘온고(溫故)의 눈’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냥 만나버린 것(encounter)입니다. 저는 이 경험을 기점으로 여러분과의 만남을 부담감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설레면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 강연이 단순히 ‘낡은 언어’의 세례가 아니라 온고와 지신이 아우러지는 향연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間, 緣, 道 (사이, 연 그리고 길)


위의 세 마디는 이 강연의 구성이자, 주제이면서 또 소재입니다. ‘間’은 서론이면서 유교사상을, ‘緣’은 본론이면서 불교사상을, ‘道’는 결론이면서 도교사상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강연은 동양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일종의 투어(tour)인 셈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한국의 현대시인인 김광규는 <나>라는 시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후략)” 라고 노래합니다.
이 시 속의 그 ‘아들이자, 아버지이고 동생이면서 형인’ 나, 요컨대 ‘관계적 자아’(inter-subjective)는 유교사상 속의 나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서양근대의 ‘나’가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개인(in-dividual)이라면, 우리 전통적 세계에서의 나는 ‘관계 속의 존재’입니다. 이것이 잘 표현된 것이 오륜(五倫)의 그 윤(倫), 인간(人間)이라고 할 때의 그 간(間) 같은 개념들입니다. 가령 부-자간의 관계를 친(親)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써서 잘 수행할 적에, 또 부-부간의 관계를 특별남(別)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써서 잘 수행할 적에야 ‘사람다운 사람’(仁)이 ‘되는 것’(becoming)이지요.

‘사이’ 속의 삶

이렇듯 ‘전통적 인간관’은 ‘차별적 인간관’입니다. 사람이라고 하여 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부르고, 비천한 인간을 소인(小人)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차별적 인간관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여기서 군자란 관계를 중시하는 인간,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하고, 소인이란 ‘오로지 나(egocentrism)’ 만을 중시하는 인간입니다.
이런 관계적 인간관을 저는 전화기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전화기 그 자체로는 제 아무리 예쁘고 많은 기능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통화가 오고갈 곳이 없다면 그것은 전화기로서는 의미가 없듯, 사람도 주변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고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제 아무리 예쁘고 똑똑하다고 한들 인간으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관점이지요.
그러니 인생이란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납니다.
이런 점에서 유교사상의 키워드인 인(仁)이라는 글자가 두 사람(人+二)이라는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요. 仁이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 가령 부-자, 부-부, 군-신, 장-유, 붕-우 간의 관계를 잘 수행할 적에야 드러나는 언어인 셈이니까, 관계적 세계관, 한 마디로 ‘間’의 세계를 잘 대변하는 개념이 되지요.

우리는 관계적 인간관, 즉 間을 달리 연(緣)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연은 間보다는 좀더 운명적이고, 좀더 질긴 관계를 뜻할 때 씁니다. 무엇보다 間이 유교적이라면, 緣은 불교적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연의 계보학

우선 연이라는 개념이 불교적 인연이라는 의미를 함장하고 있다면, 분명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이 합쳐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연이라는 중국어에 불교적 의미가 포함된 것이지요. 이 상황을 알약, 가령 ‘콘택600’에 비유해볼까요? 애초에 중국에서 ‘緣600’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의미없이 언어만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 인도에서도 ‘인연’의 의미를 포함한 어떤 개념이 또 존재하고 있었겠지요. 이것이 어느 날 합쳐진 것입니다.

전통중국에서의 연

전통중국에서 연은 원래 옷의 가선(테두리)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뜻은 더 발달해 옷 자체의 패션을 의미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왕후가 입는 여섯 가지 법의(法衣) 가운데 하나인 연의(緣衣)가 그것입니다.
그러다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연은 철학적인 개념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잘 아시는 <맹자(孟子)의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연은 ‘~에서’와 같은 쓰임새지요. 또 <순자(荀子)>에는 ‘귀로 인하여 소리를 듣는 것이 가능해진다(緣耳而知聲, 可也)’와 같은 용례가 나오고, 또 그 즈음의 <장자>에도 ‘연독(緣督)’이라는 중요한 개념 속에 출현합니다. 연독이란 ‘중용을 쫓다, 따르다’와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도 연이란 ‘~에서, ~때문에’라는 조사로서, 또는 ‘따르다, 기인하다’와 같은 동사로 쓰이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 어디에도 오늘날 연의 쓰임새인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에 내포된 ‘인연’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국의 ‘언어시장’에서 별 볼일 없는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의미로 통용되던 연은 불교의 도래와 함께 완전히 색다른 뜻을 삼키게 됩니다.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의 만남

한(漢)나라 말기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크게 2차에 걸친 역경(譯經)사업, 즉 불경 번역사업이 있게 됩니다. 이 속에서 두 문명이 만난 것이지요. 이 만남의 지성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두 문명 사이에 끼인 점이지대는 문화적인 쇼크에 빠져들게 됩니다. ‘난데없이 처음 본 세계·물건·사상’을 기존의 언어, 이미지로 표현해야 하는 난감함!! 이 결락·괴리·틈새에서 당혹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가령 토마토라는 식물을 처음 본 동양인이 ‘토마토’를 동포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음사(音寫)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도마도’(ドマド)라고 읽는 방식입니다. 둘째는 그 의미를 살리는 것으로, 중국식으로 ‘西紅(서양 홍시)’라고 의미론적으로 오역(?)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추상적 개념의 표현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세계, 사상, 의미를 맥락적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을 피치 못하게 만들거나, 또는 기존의 관념 속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새 개념을 만드는 방식은 가령 philosophy를 ‘哲學’으로, society를 ‘社會’로 번역한 근대 일본학자들의 번역작업이 좋은 예입니다. 哲과 學은 한자이지만, 결코 哲學은 동양사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즉 철학은 새로운 개념입니다.
연이라는 개념도 이와 유사합니다. 실은 연으로 번역된 인도어는 ‘프라티아야(pratyaya)’라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또 프라티아야라는 ‘콘택600’이 또 제 나름의 의미로 인도시장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연이라는 ‘캡슐’에 프라티아야라는 ‘알약’이 새로 합쳐져서 오늘날의 인연·연분·연기설 등등의 의미들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새로운 ‘緣600’의 탄생)

인도에서의 연

그러면 프라티아야라는 말은 인도 땅에서 또 어떻게 달라지는 과정을 거쳤던가를 살펴봅시다.
고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에 의하면, 프라티아야는 믿음(信解:conviction)·의지(依:reliance)라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불교도들이 세를 얻으면서 프라티아야는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간단히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을 살펴보지요. 앞서 間에서 유교에서의 ‘나’를 ‘관계적 자아’로 해석하였는데, 불교에서는 ‘나’를 탐욕과 원망과 어리석음, 즉 탐진치(貪瞋痴)라는 삼독심의 씨앗이 흙·바람·불, 그리고 물 기운(地風火水)를 입어 생겨난 것으로 봅니다. 즉 ‘나’라는 이 느낌의 실체는 실은 실체가 아니라 현상(相)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무릇 상을 가진 모든 것은 다 비고 망령된 것(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고 표현합니다. 요컨대 불교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구름처럼, 이슬처럼 사라지는 헛것이요, 실재는 공(空)이라고 봅니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금강경>).

그런데 불교에서는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감촉되는 이 현상(相)을 형성하는 원인자를 둘로 나누어 봅니다. 그 1차적, 근본적 요소를 헤투(Hetu)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인(因)이라고 번역됩니다. 또 2차적, 부차적 환경을 바로 ‘프라티아야’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연(緣)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쌀이 있습니다. 그 쌀을 만들게 한 1차적 원인인 씨앗, 즉 볍씨가 헤투가 됩니다. 물론 볍씨가 쌀의 주 요인이지만 그렇다고 볍씨만으로 쌀이 될 수는 없지요. 여기에는 적당한 햇살과 비, 농부의 김매기, 추수와 같은 노력이 함께 들어가야만 현상으로서의 쌀이 형성됩니다. 이런 볍씨를 제외한 2차적 조건, 환경적 요인들이 ‘프라티아야’인 것이지요. 그러니 인연(因緣)이라는 말 자체가 헤투-프라티아야라는 불교적 개념인 것으로, 이 개념이 중국 땅에서 씨앗·원인을 보다 강렬하게 표상하는 ‘因’자와, 그리고 가선·테두리처럼 좀 변방적 의미를 함의한 ‘緣’자를 택해 ‘인연’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연의 탄생

정리하자면, 연의 원래 의미인 가선·테두리·두르다와 같은 의미는 슬며시 밑으로 가라앉고, 그것의 추상화된(발전된) 의미였던 ‘인하다, 좇다, 향하다’라는 뜻의 실마리가 불교의 현상계를 형성하는 환경적 요인, 또는 조건을 뜻하는 프라티아야의 의미와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연은 어떤 의미로 간추릴 수 있을까요. 즉 불교적 연의 흐름(緣起: flow of pratyaya)을 어떻게 유형화할 수 있을까요

△첫째, 인 또는 연의 씨앗은 어디든지 존재합니다(또는 숨어있습니다). △둘째, 세계는 인과 연이 관계를 맺고 푸는 과정입니다. △셋째, 인연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해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넷째, 그 특성은 운명적입니다(이 운명성을 파탈하려는 것이 부처의 지향!).

.그런데 오늘날은 도처에서 사이(間)와 연(緣)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있습니다. 결혼기피, 출산기피, 교육대란, 청년실업, 사오정, 삼팔선, 방황과 소외, 자살들, 그리고 국제사회에 항용 벌어지는 테러와 환경문제 등등. 이렇게 인(因)과 과(果) 사이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문재, <지구의 가을>- 제1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문제는 이 ‘사이(間)’에 있습니다. 시인의 지적처럼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 툭툭 끊기고 있는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끊긴 고리, 맺혀서 막힌 결절을 소통시켜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막힌 것은 터주는 ‘소통자(communicator)’, 맺지 못한 인연은 맺어주는 ‘연결자(connector)’, 이런 존재가 요구됩니다. 이런 존재를 ‘결연자(結緣者)’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저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결연자가 광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연자의 계보학

태초에 결연자는 샤먼(巫)이었습니다. 무(巫)라는 한자가 잘 표상하고 있듯, 하늘(윗부분의 一)과 땅(아랫부분의 一)을 연결하는 (사이부분의 l) 사람(人)이 ‘巫’ 인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태초의 결연자, 즉 하늘과 땅 사이에, 또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막힌 것을 터주는 소통자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맺지 못한 인연은 맺어주는 연결자였던 것이지요. 이런 샤먼의 권능이 곧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들었으니 그들이 곧 ‘샤먼킹’입니다.

그런데 이런 샤먼 가운데 특출한 자, 또는 샤먼을 다른 이름으로는 성인(聖)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기 성인의 聖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귀신의 소리(口)를 귀기울여서(壬) 듣는(耳) 존재’라고 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聖의 특성으로서 그 ‘귀기울여 듣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고대 결연자의 원형인 샤먼의 특성은 ‘말하는 자’, ‘지도하는 자’, ‘알려주는 자’이기 이전에 ‘듣는 자’, ‘소청을 받는 자’, ‘수용하는 자’라는 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샤먼으로 하여금 정치 지도자가 되게 만든 실제 힘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귀신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능력자로서의 샤먼은 점차 인지가 발달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그 역할을 새로운 형태의 결연자가 맡게 됩니다. 그것이 공자(孔子)의 출현으로 야기된 ‘군자(君子)’라는 인간형입니다. 이들은 귀신의 소리를 듣는 존재에서 사람의 소리를 듣는 존재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자의 특성

그러면 새로운 결연자인 군자의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군자는 성찰(省察)하는 존재입니다. 우선 이들은 부끄러움(恥)을 발견하였습니다. 가령 ‘<논어>의 군자는 문제점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고, 소인은 바깥에서 찾는다’는 지적은 문제점을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성적, 성찰적 존재’로서의 군자상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차마(忍)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맹자>는 바로 이 ‘차마’라는 부사 위에 지어진 사상입니다. 아니, 유교사상 전체가 바로 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孝)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慈)이든, 앞서 규정한 관계적 존재로서의 자아론의 핵심은 바로 이 ‘차마’라는 마음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될 뿐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움’(恥)과 ‘차마’(忍)는 군자로 표징되는 결연자의 중요한 심리적 특성입니다.

둘째, 군자는 경청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샤먼, 성인(聖)의 듣는 존재로서의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명령하고 지령하는 입(口)이 아니라, 수납하고 용납하는 수용성으로서의 귀(耳)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경청하는 존재로서의 군자는 나를 낮추고(modesty) 남을 배려하는(caring) 덕성(德)의 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스로를 비운 자리에 도리어 그득하게 주변의 먼지들이 빨려드는 진공청소기’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 바로 덕치(德治)이고, 또 이런 역학이야말로 유교에서 내내 강조하는 참된 정치적 힘인 터였습니다. 산을 만들어 남을 위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골짜기를 파내어 주변이 몰려드는 구도를 만드는 것, 이것이 군자의 중요한 특성이고 그것은 바로 경청하는 자세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셋째, 군자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시(詩), 서(書), 예(藝), 악(樂)을 두루 섭렵한 창작가들이었다는 점은 특히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이는 광고인들이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요컨대 군자란 우리가 알고 있듯 ‘도덕군자’이기 전에 크리에이터였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단순히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시, 또는 자신의 작품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정몽주와 이방원의 경우가 그러하지요.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속내를 떠보았을 때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응대합니다. 벌써 그는 시작(詩作) 속에 삶과 죽음의 엇갈림이 발생하는, 아니 목숨 자체를 건 것이지요. 이렇게 군자란 ‘목숨을 걸고 창작하는 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군자의 특성은 호학(好學)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어떤 영예로운 표현도 마다했던 공자이지만 이 한마디, “배우기를 좋아한다”(好學)는 말은 스스로 자처하기조차 하였습니다. <논어>의 첫 마디가, 다 아시다시피, ‘배우고 또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으랴(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지 않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라는 구절도 주변에서 무엇이든 배우려 드는 ‘호학’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끝으로 군자는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일종의 우환의식(憂患意識)이지요. 내 가족뿐만 아니라 먼 이웃, 나아가 동물과 식물조차 어렵고 험한 꼴을 차마 보지 못하고 이를 염려하고 도우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그 ‘차마’의 마음이 널리 확산된 경우에 해당하겠습니다.


연을 실현할 광고인의 덕목(2D, 2L)과 속성(2C)

앞서 우리는 연의 의미와 그 연을 실현해왔던 결연자들인 샤먼과 군자의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와 브랜드, 또는 공공성과 사익을 연결하고, 나아가 욕망과 분노를 소통시키는 광고인의 그 결연자로서의 특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동양사상의 입장에 서서 연을 매개로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 광고인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네 가지 덕목과 두 가지 속성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네 가지 덕목이란 발견자(discoverer), 현상자(developer), 호학자(learner), 경청자(listener)입니다.

첫째, ‘발견자’란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그 <주역> 속의 지중유산(地中有山) 이야기처럼 주변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하고 특별한 진리의 틈새를 발견하는 안목[눈]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고인이 갖출 첫 번째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현상자’란 필름상태의 음화(陰畵)를 사진상태의 양화(陽畵)로 만드는 과정, 그 현상적 과정을 뜻합니다. 아무리 일상적 삶 속의 비범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눈, 또는 발견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광고인들은 이를 이미지, 디자인 혹은 카피로 표현해내는 기술이 함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셋째, ‘호학자’란, 사회와 기호(嗜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과 사회, 그리고 기술의 변화를 언제나 넉넉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논어> 식으로 표현해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체화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열린 마음가짐(open mind)’이 필수적이겠습니다.
현재 나의 수준, 또는 나의 성과(작품)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에고의 문턱이 있는 경우에는, 새롭게 닥치는 변화의 물결이 아무래도 사소하거나, 또는 잘못된 경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보수화되어버리면, 광고인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넉넉히 그리고 깊숙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학습하는 자세는 광고인에게 필수적인 또 하나의 덕목이겠습니다.

넷째는 ‘경청자’로서의 덕목입니다. 이것은 샤먼과 군자의 그 듣기 특성을 잇는 것입니다. 소비자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또는 사회의 공공성의 요구를 귀담아 듣는 것, 그리고 생산자의 욕구를 제대로 간파하는 것들이 다 경청자로서의 덕목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광고인의 속성입니다. 앞서 샤먼으로부터 면면한 결연자로서의 속성인 연결자(connector)와 소통자(communicator)로서의 계보를 오늘날 광고인들이 그대로 잇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연결자’로서 광고인이 도모할 바는 ‘화(和)’의 실현입니다. 화란 일요일 아침드라마의 그 하하호호 웃는 장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실은 팽팽한 긴장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운, 그러나 한 순간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절묘한 조화입니다.
공동체 또는 회사 내부에서 화의 실현은 두 가지의 덕목이 서로 교차할 때 이뤄집니다.
상급자(또는 임원진)들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맥락을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화란 다른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열린 마당을 뜻합니다. 반면 동(同)은 유일한 가치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즉 화이부동이란 ‘다른 견해를 충분히 용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가 서(恕)라고 할 수 있는데, ‘서’란 ‘남의 입장으로 접어서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려는 자세, 이것이 화이부동을 실현하는 구체적 태도가 되겠지요.
반면 하급자(또는 일반 사원)들은 ‘화이불류(和而不流)’의 맥락에 유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화이부동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고, 화이불류는 <중용>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어쨌건 화이불류라고 할 때의 화란 상급자와의 훌륭한 소통상태, 또는 그야말로 화목하여 따뜻한 상태를 뜻합니다. ‘류(流)’란 그 화목함이 넘쳐서 자기 주장이 앞서서 전체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지경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요컨대 화이불류란 “화목을 지향하되 그것이 개체들의 자기 주장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는 예절지(禮節之: ‘예로써 매듭을 짓다’, <논어>)입니다. 즉 상하, 또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태도이지요.
이렇게 ‘남의 입장으로 접어서 생각하는’ 서(恕)의 태도와 공동체의 질서를 지켜 화목을 유지하려는 예절지(禮節之)의 태도가 팽팽하게 교차할 적에야 화(和)는 실현되는 것이지요.

둘째는 ‘소통자’입니다. 소통이란 원망(怨)과 정체, 욕망의 불통을 해소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오늘날의 갈등은 소통의 부재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광고인들은 더욱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이 소통을 도모하는 파일럿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소통자’로서의 광고인이 되기를 당부하는 공자의 작은 메시지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공자의 제자인 ‘중궁’이 인(仁)을 여쭈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문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든 ‘큰손님’으로 여기고 공대하며,
아랫사람을 부릴 적엔 큰 대회를 치르듯 하시게.
자네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나라에서건 원망(怨)이 없을 것이야.” (<논어> 12:2)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요구하지 않음(己所不欲, 勿施於人)”, 이것이야말로 ‘소통자’가 되기 위한 첩경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배병삼 / 1959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경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儒道會) 부설 한문연수원에서 수학했고,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산대학교 매스컴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한글세대가 본 논어 1·2>,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산문집), <삼국통일과 한국통일>(공저), <율곡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공저), <다산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공저) 등이 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