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매체 서비스만을 전문으로 하는 미디어 에이전시가 과연 우리나라 광고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지에 대해 광고전문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방송광고 판매를 독점하고 있는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의 존재, 광고물량과 관계없이 고정적인 방송광고료, 그리고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가 광고산업의 주류를 이루었던 실정을 감안하면 매체 대행 부분만 따로 맡길 광고주도, 비즈니스 승산이 높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 미디어 에이전시도 별로 없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상황은 달라졌다. 광고회사간의 제휴로 만들어진 매체전문대행사인 PDS 외에도 유니버셜 맥켄(Universial McCann)·스타컴(Starcom) 등이 유관 광고회사로부터 조심스럽게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심지어 광고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수 미디어 에이전시라고 할 수 있는 꺄라(Carat)까지 서울에 입성하게 될 만큼 전문 미디어 에이전시의 출현이 가시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매체전문대행사가 우리나라 광고산업에서도 뚜렷한 역할을 할 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 아니면 혹자의 평가처럼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을지 아직은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두고, 글로벌 매체전문대행사의 성장 배경과 변화 추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광고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보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매체 전문대행사의 현황과 전망을 논하는 데 있어 굳이 그 성장 배경을 살펴보겠다고 한 것은, 나름대로의 전망이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오히려 뒤로 돌아가 그 발생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매체전문대행사의 정의와 유래
‘매체전문대행사(media agency)’라고 함은 기능적인 면에서 기존의 종합광고회사(full-service advertising agency)에서 매체 부서가 수행하는 서비스만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회사를 통칭한다. 그런데 주요 종합광고회사의 매체 부서는 대개 매체기획(media planning)·매체구매(media buying)·매체연구(media research) 등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초기의 매체전문대행사는 매체구매 서비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매체전문회사(media specialist company)’보다는 ‘매체구매회사(media buying company)’라 불리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매체 전문대행사의 등장과 성장은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광고산업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비롯됐는데, 글로벌 차원의 네트워크를 가진 매체전문대행사의 시초는 프랑스의 꺄라[69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70년에 웨스턴 미디어(Western Media)가 세워졌으나, 구매하는 매체의 종류나 전송 범위 혹은 관리하는 광고주의 사업 범위 등이 주로 지방에 국한되어왔기 때문에 미국 내 전국 규모의 매체 전문대행사가 본격화된 시기는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럽 내에서도 매체대행사가 등장하게 되는 동인(動因)이나 양상을 살펴볼 때 80년대를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성격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두 시기 모두 광고 산업의 내부 요인과 주변의 상황적인 요인간의 상호작용으로 촉발된 점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시기 중 전기(前期)라 할 수 있는 60~70년대는 새로운 사업기회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한 개인들이 종합광고회사에서 독립해 시작한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80년대 후반 이후의 후기(後期)는 상황 변화에 따른 경쟁력 강화를 위해 광고회사들이 조직 전체 차원에서 추진한 ‘전략적이며 정책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이 그 차이라 하겠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전기에 등장한 매체대행사는 이미 유럽보다 상업 방송광고가 훨씬 발달해 광고제작 서비스는 필요 없고 매체 업무만 서비스 받고 싶어하는 미국 광고주들의 등장, 그리고 매체서비스까지 감당할 역량이 없는 신생 크리에이티브 부티크의 아웃소싱 필요성 등을 간파, 독자적인 사업 가능성을 깨달은 폴 그린(Paul Green)과 같은 전직 광고회사 매체디렉터에 의해 시작되었다(Banks 1997).
이에 비해 80년대 후반 이후 매체전문대행사가 급증한 현상은 적어도 유럽에서 매체산업의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광고회사가 매체 부서의 역할을 재조정하려는 전략적인 노력에 따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라 할 만한 80년대 이후 유럽 매체산업의 변화 특징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TV에 대한 규제 완화 정책에 힘입어 민영 TV방송사가 증가되었다는 점이다. 80년과 90년 사이 유럽에서는 위성방송을 포함해 새로운 전국 규모 민영 TV방송사가 26개나 신설되었으며, 이로 인한 광고방송 가능시간이 118%나 증가되었고(Jacobs 1991), 이러한 매체의 확장과 함께 같은 기간 동안 유럽의 총 광고비 증가 비율은 미국이나 아시아에 비해 더 높았던 것이다.
두 번째, 한 매체사가 국경을 초월해 여러 가지 다른 매체를 동시에 소유하는 현상이 급속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동종 복수 혹은 이종 매체간 교차 소유는 대개의 국가가 정치적, 윤리적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제해 왔다. 그러나 방송 규제 완화로 민영방송에 대한 기회가 증대되면서 매체 소유주들은 매체사업의 범위를 초국가적으로 넓혀 각기 다른 국가에서 여러 가지 매체를 동시에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매체 소유의 집중화는 비단 위성방송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문·잡지와 같은 인쇄매체에서 더 먼저 빠른 속도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세 번째 특징은 앞서 말한 매체 소유주들의 집중화에 따른 부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동일 매체명과 포맷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성공한 ‘범유럽 매체’가 증가한 현상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80년대 초만 해도 유럽 전역에 성공적으로 발간되는 ‘대중잡지’는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90년대 초에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보그(Vogue)> <하퍼스 바자(Harper's BAZZAR)> <프리마(Prima)> <마리끌레르(Marie Claire)> 등 그 수가 급증하였다(Jacobs 1991).
이처럼 8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매체 소유가 집중되어 규모가 매우 커졌고, 이에 따른 막강한 힘의 보유는 광고 산업, 특히 광고회사 경영에 있어 매체 업무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Morgan 1989).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광고 지면이나 시간을 거래하는데 총 구매량에 따라 가격협상력이 다르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는 반부패법[샤팽법]의 발효 전까지만 해도 광고주가 매체사와 매체대행사 간의 실제 거래가에 대해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불투명한 시장이었다. 즉 매체시간이나 지면 거래에서의 할인율은 각각의 개별 광고주에 대해서도 계산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매체 구매조직(매체대행사나 종합광고회사)의 총 구매량에 따라 가격협상력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오래된 거래 관행이었으나 매체사가 거대화·집중화할수록 광고회사는 그와 대등한 비즈니스를 위해 경영상의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서로 다른 또는 동일 계열의 광고회사 매체 부서들을 떼어내 하나의 통합된 매체대행사로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총 광고물량에 따른 ‘규모의 경제’가 통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치 커뮤니케이션그룹(Saatchi Communication Group)이 제니스(Zenith)를 만들어 사치&사치·BSB Dorland and KHBB의 매체 업무를 일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는 앞서 설명한 매체사들의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광고단가의 인상, 매체기획을 포함한 매체 관련 의사결정 과정이 전문화·세계화되는 광고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Morgan 1989, Mandese 1999). 또한 기존 매체의 증가와 새로운 매체의 등장, 광고 지역의 확대 등의 환경 변화는 매체서비스 부분의 전문화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서는 연구비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고거래에 있어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시장에서나 그렇지 못한 시장에서나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매체전문대행사는 변화하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광고회사가 조직 전체 차원에서 내린 전략적 비즈니스 형태의 선택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