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유목민’의 개념은 30년 전에 마샬 맥루헌(Marshal McLuhan)이 미래 인류의 증가된 이동성과 그를 돕는 전자기기들에 대한 행동모델을 예측하면서 구체화시켰지만, 정작 ‘디지털(digital)’이란 단어와 ‘유목민(nomad)’이란 단어를 꿰어(coining) 대중화시킨 것은 프랑스의 자끄 아딸리(Jacques Attali)와 질 들뢰즈(Gilles Deleuze)다.
‘유목민’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동경’과 ‘채집생활에 대한 향수’라는 함의, 그리고 그 어원이 되는 희랍어에서의 ‘초원’이라는 낭만무쌍한 어원론적 인상 덕분인지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말은 학자·기자·저술가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즐겨 쓰는 말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바로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긍정적 미래관이 들어 있다. 그 미래관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실 노트북·PDA·휴대전화로 인해 예전보다는 훨씬 더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그러면 정말 자유롭게? 오히려 일에 점점 더 매이는 건 아니고?).
그런데 이렇듯 디지털 기술이 우리에게 ‘어디에서나’라는 자유를 허용했다면, 그 ‘어디에서나’는 반대로 ‘이 자리에서 꼼짝 않고’라는 식으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디에나 갈 수 있는 백지 티켓 위에 행선지를 ‘바로 이곳’이라고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이 땅의 코쿤족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나
인터넷 보급 초기에 국내외에서 ‘디지털 생존게임’이 유행했었다. 외출을 하지 않은 채 인터넷과 방안의 설비만으로 일정 기간을 살아보는 것이다. 즉 음식을 비롯한 생필품의 습득은 물론 여가와 복지·위생문제까지도 모두 그 공간에서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인터넷이라는 도구의 범용성을 알리자는 목적과 신기술에 대한 대중의 공포 및 지향을 적절히 이용한 흥미로운 시도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이를 바꿔 말하면 이제 인류는 ‘완전한 방랑의 자유’를 얻은 동시에 ‘완벽한 칩거의 자유’도 얻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코쿤(cocoon: 번데기)’이란 용어를 일정한 트렌드를 설명하기 위해 최초로 쓴 사람은 마케팅계의 전설인 페이스 팝콘(Faith Popcorn)1)이라는 아줌마다. 아마도 무당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케팅 트렌드 예측에 있어서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보이며 ‘마케팅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별명까지 얻은 팝콘 여사는 코쿤이라는 개념을 통해 홈쇼핑·인터넷 쇼핑·홈 엔터테인먼트, 공기와 물의 정화 등 사람이 독립적 공간에서 코쿤[칩거]하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는 산업의 붐을 예견했었다.
집에서 나오지 않고 칩거한다는 의미의 코쿤족. 사실 이 말이 나오기 전에도 비슷한 의미의 말이 있었다. 이른바 ‘방콕족’을 기억하시는지. ‘방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이 말은 그러나 사실 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 상황에 의해 나갈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다. 비록 영화 <카피 캣(Copycat)>의 시고니 위버 만큼의 지독한 광장공포는 아니더라도 놀아줄 친구가 없어서, 돈이 없어서, 햇볕이 너무 눈부셔서 등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혼자 노는 형편의 인간을 연민 삼아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코쿤족은 이와 다르다. 그야말로 번데기가 개체의 생존과 변태에 필요한 모든 자급자족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듯, 혼자서 생존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는 번거로움과 남 때문에 피해를 받는 불쾌함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상태(contented state)’를 성취한다는 코쿤족의 이상은 타인의 존재를 대체하거나 제어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 발전을 전제로 한다. 코쿤족의 이러한 특징은 놀이문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최근 들어 확장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 홈씨어터 시장과 플레이스테이션2·X-Box 등의 콘솔 게임이나 온라인 컴퓨터 문화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대체나 안전거리로부터의 제어를 통해 개인화된(customized) 소통의 욕구해소를 반증한다. 원하지 않는 관심을 지우고 원하는 관심을 만들어내며 소통의 정보량을 스스로 조절하는 가운데, 결국은 타인의 인성(人性) 역시 조절 가능한 또 하나의 요소로 가공되는 것이다. 사뭇 사용자 편의를 위해 이해과정과 조절방법이 훨씬 빠르고 편리하게 개선(?)된 ‘인간관계 ver. 2.0’이라고나 할까? 물론 현실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상호작용의 경우의 수도 온라인상에서는 안전하고 알기 쉽게 가짓수가 제한되어 있다.
요즘 여러 매체에서 다루고 있는 ‘폐인문화’ 역시 코쿤의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모 디지털 카메라 사이트로부터 시작되어 ‘아 ’2) ‘업ㅂ은’ ‘손발리 오그라든다’ ‘방법’ ‘압박’ ‘귀차니즘’ ‘뻘쭈미네이션’ 등의 무수한 신조어를 탄생시킨, 이 일종의 비정규적 무브먼트는 일반적인 생활 가치인 쾌적한 환경, 제대로 된 식사, 청결한 육체를 가꾸는 시간을 희생시켜 뭔가 다른 비생산적인 유희에 몰두하는 생활양식을 지칭한다.
종이컵 300개로 피라미드를 쌓고, ‘지우개똥’으로 CD플레이어를 만들고, ‘샤프심 꼬다리’로 에펠탑을 쌓는 등 마치 청나라 말기의 장인들 같은 집요함을 보이기도 한다. 또 남의 게시물에 누가 먼저 리플을 다는가 하는 ‘순위놀이’, 같은 게시물을 반복적으로 올리는 ‘도배’ 등 마치 까뮈(Albert Camus)의 소설 속 에피소드나 고다르(Jean-Luc Godard)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허무한 짓을 하고는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의 행동 양식을 대변하는 ‘귀차니즘’이란 말 역시 처음엔 밥을 차려먹고 몸을 씻고 방을 정리하는 것에 대한 귀찮음에서 비롯돼 차츰 모든 행위, 심지어는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바를 내리는 행위마저 귀찮아하는 ‘능동적인’ 귀찮음의 경지 까지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처음엔 ‘이즘’이란 아카데믹한 귄위와 ‘귀찮음’이란 일상어가 어울리는 불협화음의 아이러니를 즐기기 위해 만든 말이 이제는 나름대로의 권위와 무게를 가진 채 코쿤들의 행동양식을 지배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엔트(Ent)’3)들이 유구의 세월을 거쳐 차츰 나무가 되어 가는 듯 장엄하기까지 하다.
코쿤족의 양상은 나라마다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무엇으로부터 칩거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 칩거를 뒷받침해주는 기술의 발전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범죄에 대한 극심한 공포가 지배적 정서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도시 지역의 코쿤들은 보안 하드웨어나 공기 필터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그럼 한국의 코쿤족들의 지배정서인 ‘귀차니즘’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세상사 귀찮아서 칩거중이라는 것인가? 새로운 대중군(群)으로 떠오른 한국의 코쿤족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향후 한국시장의 마케팅 트렌드를 예측하게 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