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08 : Special Edition - 몸을 말하다 vs. 몸으로 말하다 - 진단 : 전통 속의 몸 vs. 현대의 몸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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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어떻게 자본적·사회적 가치로 변해왔나?
 
 
  몸을 말하다 vs. 몸으로 말하다
  2 - 진단: 전통 속의 몸 vs. 현대의 몸
 
김 완 석 |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wsgim@ajou.ac.kr
 
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몸의 의미 지각, 즉 ‘신체개념’은 자신과 타인의 몸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몸과 관련이 있다. 먹고 자고 입고 사랑하고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이 몸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몸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신의 관계, 신체와 정신의 관계, 신체의 기원, 여성과 남성의 차이 등에 관한 종교적·이념적·철학적 가정들, 그리고 사회 지배계급의 지배윤리 등에 따라 서로 달라졌다. 이에 따라 어떤 몸이 건강한 몸인가, 몸은 의지에 따라 변형(성형)해도 되는 것인가, 몸에 구멍을 내어 장식품을 달아도 되는가, 내 몸을 내 의지로 없애버려도 되는가, 늙는 것은 피해야할 일인가, 내 몸은 누구를 위해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가, 옷은 왜 입는가 등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현대사회의 ‘몸 다루기’ 양식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의 차이, 즉 신체개념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종교적 이념과 철학적 가정, 사회지배 이념의 변화 등이 핵심 영향 요인으로 작용한다.
 
 
종교로 반추해보는 몸의 의미
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에는 불교와 유교·기독교의 영향, 그리고 최근의 자본주의 이념의 영향이 혼재해 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몸은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즉 마음이 아니라 몸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고 기독교에서는 이야기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몸은 하느님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출산은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닮은 육체로 환생하는 과정의 상징적 모형이며, 여성은 남성을 위해 창조된 것이어서 여성은 남성에게 봉사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또 인간의 몸은 정신(또는 영혼)과 분리 가능한 것이며, 주로 타락한 욕구, 사악한 욕망이 머무는 사사로운 비합리성의 공간이다. 그래서 몸은 신성한 정신의 계발을 위해 통제하고 금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구원은 신체와 정신 모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가 건강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건강하다는 것이다. 신체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혔거나 또는 이런 욕망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징표라고 한다. 한편 여성은 본디 하느님의 피조물이자 예수의 형상인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남자를 유혹함으로써 하느님을 배반하고 동물적인 존재로 만드는 사악한 존재로 보여지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 전통에서 남성은 정신 및 이성과 연결된 바람직한 존재인 반면, 여성은 육체 및 감성과 연결되어 통제되고 소외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신체를 드러내고 치장하는 것은 사악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만큼 몸을 통제·훈육하고 가리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몸을 가꾸는 의미는 기껏해야 몸의 욕구를 통제하는 수준에 머문다.
그런데 서구에서 중세를 거치면서 나타난 르네상스는 신체개념이 극적으로 바뀐 시기라 할 수 있다. 몸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되었고, 예술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몸의 욕구는 배척과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되었다. 르네상스 이전, 회화의 중심은 항상 하느님이나 천사·예수 등이었으나,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에서는 그 중심에 사람, 특히 여성이 많이 서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몸에 대한 인간 자신의 주인의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화장이나 몸을 드러내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어떠한가? 불교에서 몸은 윤회의 산물이자 대상이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나의 몸을 윤회의 고리 속에서 보자면 이전에는 지금 내가 키우는 강아지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죽은 후에는 옆집 아저씨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또 윤회적 시간관에서는 지금 내가 나중의 너이고, 우리집 강아지가 이전의 나일 수도 있다. 이렇듯 불교에서의 몸은 생성과 소멸의 대상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한정된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잠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은 ‘생노병사’라는 흐름을 거역하지 못한다. 또한 몸의 경험인 ‘감각’은 모두 허구로 본다. 눈·코·귀·입·피부로 경험하는 감각은 모두 허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각은 모두 몸의 고유기능이며, 윤회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이 해탈이자 성불인데, 해탈이란 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불교에서의 몸이란 한계이며 허구의 본산이요 의미 없는 것이고, 많은 경우 해탈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꽃피운 유교에서 몸이란 ‘조상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조상의 조상의 조상, 또 그 조상의 조상은 누구일까 하는 따위의 질문은 유교의 전통에는 없다(이렇듯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내 몸은 부모의 소산이고, 부모는 그 부모의 소산일 뿐이다. 유교에서 개인의 의미를 규정하는 최대 단위는 가족이다. 내 몸은 가족의 일부인 것이고, 그 주인은 부모이므로, 자신의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몸이란 깨끗하고 건강하게 유지해야 할 무엇이지, 그 자체나 일부를 마음대로 없애버리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유교에서도 몸은 기독교나 불교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훈육과 통제의 대상이었다. 몸은 마음을 닦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몸의 욕구는 통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몸의 통제와 훈육의 의미는 다른 종교와 조금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유교가 몸의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사회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즉 유교에서는 몸과 마음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고, 이를 닦는 것을 사회적 행동의 출발점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이를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결국 유교에서의 몸은 사회적 평가와 판단의 일차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 관리 등용의 잣대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는데, 여기서 신(身)이란 사람의 풍채와 용모, 즉 몸의 외양을 뜻하는 것이다.
헌혈이나 장기기증·시신기증·문신이나 수술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통적 거부감은 많은 부분 유교적 신체개념의 탓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옷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관심(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옷에 대한 관심과 소비성향이 높다)이나 명품에 대한 높은 선호 등에도 유교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주의·자본주의 발달로 신체개념에 극적인 변화
그런데 19세기의 과학혁명과 자본주의는 이러한 종교적 이념이나 지배 이념들의 영향을 받은 신체개념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과학주의와 자본주의는 신이나 자연, 조상의 피조물로 보았던 몸의 ‘피조물 의식’을 약화시켰다. 이런 변화는 정신보다는 몸을 중시하는 몸에 대한 관심, 그리고 신체를 기계로 보는 관점, 체기능보다 체형을 중시하는 경향,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변화 등을 낳았다.
초기에 생산기술의 발달을 주도했던 과학기술은 이제는 생명조작기술의 발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이제 인간의 몸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인간의 것’이 되었다. 또한 몸은 하나의 기계가 되었다. 필요한 부품을 갈아 끼우면 얼마든지 더 오래 더 잘 기능하게 할 수 있고, 디자인을 바꾸면 더 멋진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노화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생명복제를 통해 극복할 수도 있을 듯하다.
 
자기 만족·사회적 정체성 표출의 수단화
 
몸 자체를 통제하고 훈육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항상 수단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몸이 수단이라 해도 그 목적이 다르며, 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몸은 더 이상 아름다운 정신, 깨끗한 정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더 많은 소득, 더 많은 존경, 그리고 더 나은 자기이미지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몸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바디빌딩은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예술가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미스 코리아, 미스터 코리아 대회는 자신의 몸을 탐미의 대상으로 하는 가장 극적인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변화에 크게 영향을 끼쳐, 몸은 중요한 자본의 하나가 되었다. 그 초기에는 근력을 발휘하는 체기능이 중요했는데, 특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계층에서 몸은 경제행위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또는 쾌락과 흥분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낮은 계층에서 여성은 몸을 더욱 도구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사실이다). 이들에게 몸은 튼튼하고 잘 고장 나지 않는 ‘기계’와 같은 것이고, 체기능(즉 근력이나 지구력)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몸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있는 계층에게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체형(즉 몸매나 외모)이 더 중요했다. 그 자체로서 관리하고 발달시켜야 할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은 가처분소득의 증가와 함께 ‘체형의 상대적 가치’를 더 높게 만들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운 몸은 튼튼한 몸에 비해 자본적 가치가 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몸매가 골격근의 형태에 의해 결정되고 건강이 내장근의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골격근의 가치가 내장근의 가치보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몸은 더 이상 타고 난대로(생긴대로) 가지고 가야하는 ‘본유적 자원’이 아니다. 얼마든지 바꾸고 고치고 가꾸어서 그 자본적·사회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처분 가능한 자산’이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나 유교의 부정적이며 의존적인 여성관은 크게 약화되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기계이며, 인간의 몸이 인간의 것이듯 이제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되었다. 여성의 치장과 몸매관리는 더 이상 남성에게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귀에 구멍을 뚫든 배꼽에 구멍을 뚫든,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를 들이대어 비난하기 어렵게 되었다. 
 몸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 능력과는 달리 타인에게 쉽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근 여성들의 몸매 가꾸기 열풍은 부정적 여성관을 극복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반동현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흔히들 우리 사회를 ‘가치관 혼동’ 또는 ‘가치관 부재’의 사회라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2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다양한 종교적 영향과 급격한 사회지배이념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우리의 신체개념에는 앞서 살펴본 불교와 유교, 기독교의 신체관과 과학주의·자본주의·개인주의 등의 이념들의 영향이 혼재해 있다. 그래도, 개인차가 물론 있겠지만, 사회 전체적인 수준에서 신체를 조작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경향의 심화와, 정신에 비한 신체의 중요성 강조, 체기능보다 체형을 더 강조하는 등의 변화는 거역하기 힘든 하나의 큰 흐름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런 흐름에서 몸은 적극적으로 고치고 관리해야 할 하나의 소비대상으로서,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이미지의 일부로서,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질 것이다. 최근의 몸소비 현상들은 이러한 변화가 매우 빠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