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08 : Special Edition - 몸을 말하다 vs. 몸으로 말하다 - 현상 : 몸을 위한 열망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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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소비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기호?
 
 
  몸을 말하다 vs. 몸으로 말하다
  1 - 현상: 몸을 위한 열망들
 
박 은 아 | 광운대 디지털경영연구소 연구교수
eunapark@hotmail.com
 
올 여름 우리의 눈을 끄는 새로운 자극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tattoo)이다. 흔히 우리는 문신이라 하면 일부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수단으로,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감을 주려는 일종의 기호(sign)로 가슴이나 등에 새겨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요즘 흔히 만나는 젊은 여성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억센 남자들의 팔뚝에 새겨졌던 그 문신과는 전혀 다른 기의를 담고 있다. 그녀들의 팔이나 어깨에 새겨진 문신에는 ‘즐기는 몸, 향유하는 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몸’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소비의 대상, 능력 표출의 수단
 
 
   
사회학자 베블렌(T. Veblen, 1857~1929)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귀족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가냘픈 허리, 그리고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그 몸이 육체적 노동과는 거리가 먼 휴식과 돌봄의 대상으로서의 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귀부인이 걸친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한 드레스는 차이 기호가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유한 계급에게 몸은 아름다움을 주어야 하는 배려의 대상이기에, 이들은 몸을 가꾸고 관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였다.
인간의 몸이 삶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하나의 문화적 사실로서, 어떤 문화에서도 인간과 사물의 관계 및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는 양식을 반영하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몸은 사유재산 일반과 똑같은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즉 전통적인 사회질서 하에서 인간은 몸에 대해 나르시스즘적인 열중도, 구경거리로서의 시선도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노동과정 및 자연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도구적인 육체관만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청교도시대 이후 인본주의라는 사상적 흐름과 함께 인간의 육체 및 성(性)에 대한 해방을 표방하면서 ‘몸’에 대한 재발견이 행해져, 오늘날에는 인간의 몸, 그 중 특히 여성의 몸이 대중문화 전반에 범람하게 되었다. 이렇듯 노동의 도구로서의 의미가 퇴색하고 심미적 대상으로 그 의미가 변화된 현대인의 몸은 이제 가꾸고 관리해야 하는 배려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몸이 단순히 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능력에서의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호로서 작용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즉 현대인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비의 대상이 된 몸은 나르시스즘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같은 육체에 대한 열중은 동시에 다른 사람과 경쟁하게 되는 자본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었다. 현대인에게 몸은 이제 하나의 자산으로서 관리·정비되고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여러 기호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몸에 대한 자기도취적 숭배는 여성들로 하여금 아름다움 추구의 당위성을 부여하였고, 심미적 대상으로 그 위치가 격상되는 과정에서 에로티시즘이 탄생하여 몸은 향유하고 탐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비 대상이자 자신의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자본으로서 투자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몸의 지위 변화는 ‘몸 프로젝트’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신체 관리 프로그램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체관리는 신체 내부를 위한 관리와 신체 외부를 위한 관리로 나눌 수 있다. 신체 내부를 위한 관리에는 건강을 지키고 몸을 즐겁게 하는 데 필요한 소비 품목들이 주로 해당된다. 그것은 각종 비타민·건강보조식품·보약·정력제와 보양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주로 건강이 염려되는 중년층이 주요 소비층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몸에 대한 물신숭배적 가치관이 증대하면서 지금은 이들 제품의 소비계층의 연령대가 점차 넓어져서 젊은 사람들도 각종 보양식을 즐기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신체 외부를 위한 관리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주로 여성들의 몫으로 간주되었다. 신체 외부를 위한 소비 품목으로 다이어트식품은 기본이고, 체지방 줄이기를 위한 각종 약물과 주사, 체지방 제거수술, 연예인 OOO의 눈, XXX의 코와 같이 원하는 이목구비를 위한 미용성형, 피부 톤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한 각종 피부 스케일링, 주름 제거를 위한 보톡스(Botox) 주사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드는 외모와 아름다운 몸을 위해서 우리가 지출하고 투자할 수 있는 항목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더욱이 최근에는 남성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해져 남성을 위한 화장품과 향수, 남성전용 미용실 등이 늘어나고, 귀걸이나 목걸이 등 액세서리로 치장한 남성을 거리에서 쉽게 만나게 되었다. 이제 외모 가꾸기는 여성만의 관심사가 아니며, 20~30대 젊은이들만의 몫이 아님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몸을 향한 욕망을 분출하는 행위의 극치는 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누드(nude) 사진 찍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몸 간직하기의 ‘사회적’ 열망
몇 년 전 현직 교사가 자신과 아내의 벗은 몸을 인터넷에 올린 사건을 기억한다. 그 교사의 의도는 ‘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상업주의적 에로티시즘으로 인해 왜곡되었음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의도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젊은 날을, 그것도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몸을 기억하고 싶어서 젊은 부부나 연인 혹은 친구끼리 누드를 찍어 인터넷에 올리거나 간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누드동호회에 가입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인터넷의 누드 동호회 ‘누드러브’의 게시판에 올라있는 어떤 글을 보면, ‘과감하게 나를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 설령 아무도 나를 보지 않더라도 내가 발가벗었다는 느낌만으로도 뭔가 지금껏 내 머리 속에 박혀있었던 생각의 틀을 깨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진짜 쾌감이 밀려든다’고 쓰여 있다.
또한 각종 여성지나 매스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이어트 성공사례나 비법에 관한 내용들은 모두 아름다운 몸 만들기에 대한 우리들의 열중을 정당하고 당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논리에는 의지와 정신으로 몸을 다스리고 몸이 원하는 대로 관리하자는, 육체 중심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한 연예인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의 다이어트 경험담을 소개하며 “그 살은 원래 제 몸에 있어야 할 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이 빠지니까 이제야 진짜 내 모습을 찾은 것 같아요”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붙어있는 살이 자기가 아니라면, 과연 ‘자기’는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
이렇게 현대인들은 자신(정신)과, 자신의 몸을 분리해서 인식하고, 몸에서도 있어야 할 부분(피부를 이루는 살)과 있어서는 안 되는 부분(피하에 있는 여분의 살)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 모든 일련의 현상들, 일반인도 자신의 벗은 육체를 탐닉하여 심미적 대상으로 향유하려 하고, 아름다운 몸을 소유하기 위해 투자하고 관리하며 생의 목표로 삼아 노력하는 행위의 저변에는 자신의 몸을 객체화하여 인식하는 몸에 대한 변화된 시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객체화된 신체의식이란 자신의 몸을 마치 다른 사람이 관찰하듯이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객체화시켜 인식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보이는(to be look at)’ 대상으로서의 구성체로 생각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학습하기 때문에, 마치 외부 관찰자인 것처럼 자기 신체를 보는 것을 배우고 여성적 신체에 관한 문화적 기준을 내재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하며, 이 기준은 노력하면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아름다움이란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여성에게 부과된 아름다움에 대한 당위적 요구는 항상 여성으로 하여금 시대에 따라 규정된 아름다운 몸의 조건을 향해 노력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따라야 할 기준으로 삼게 되는 이상적 신체 이미지(ideal body image)를 내면화하고, 그 기준에 의해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여 자신감을 갖거나 열등감을 갖게 된다.
 
 
타인의 시선이 지배하는 ‘내 몸’
 
맥킨리(McKinley; 1995)가 제안한 ‘객체화된 신체의식(objectified body consciousness)’ 개념은 현대 여성들이 왜 그렇게 다이어트와 외모 가꾸기에 집착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그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객체화된 신체의식이 높은 여성일수록 자기 신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객체화된 신체의식은 세 개의 하위 구성 요소로 개념화되는데, 첫째, 신체 감시성(body surveillance), 둘째, 문화적 신체 기준의 내면화와 이에 따른 수치심(internalization of cultural body standards and shame), 셋째, 외모에 대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appearance control beliefs) 등이다.
신체감시성은 자신의 신체를 문화적 기준에 맞추려 하고, 항상 ‘외부관찰자’와 ‘객체’의 관계로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지속적인 신체감시는 여성에게 부정적 경험을 수반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이유는 외부 기준에 근거해서 자신을 평가하면 대부분의 경우 기준과의 불일치를 지각하게 되고, 그 불일치가 개인에게 신체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체에 대한 수치심은 문화적으로 이상화된 신체 이미지(ideal body image)를 내면화한 여성이 그것과 자기신체를 비교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몸에 대해 수치심을 형성하도록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문화적 신체 기준을 내면화하게 되면, 여성은 이 기준이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스스로 형성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자발적으로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한다는 것이다. 보통 여성이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조작된 이미지의 여성적 신체에 관한 문화적 기준을 완전히 달성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지난 수십 년간 매스미디어에 등장한 신체이미지는 점차 더 마른 신체를 매력적으로 여기는 쪽으로 변해 왔는데, 그 결과 정상 체중의 여성들조차 자신이 비만하다고 지각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체중감소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이어트는 결코 중단할 수 없는 몸 프로젝트의 핵심이자 기본 과제가 된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인들이 갖는 외모에 관한 통제 신념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을 사회적 기준에 맞게 관리하지 못하는 것을 무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자신의 몸을 보기 좋게 관리하는 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외모를 통해 개인을 평가하는 것을 합당하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내 몸을 감시하거나 음미하고, 수치심을 갖거나 유능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타인의 시선을 만드는 일등 공신으로 ‘조작되고 만들어진 이상화된 신체 이미지(idealized body image)’들이 범람하는 매스미디어를 지목할 수 있다. 인구당 화장품 소비량 세계 1위, 보톡스 주사 소비율 세계 1위, 성형수술률 세계 1위라는 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 가히 몸 프로젝트를 위한 한국의 소비시장은 한창 개발중인 금광처럼 반짝이지만, 그 안에서 정작 내 몸은 ‘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