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을 씹어 먹고, OTT/영화관까지 점령해버린 빌런의 매력 <케이팝 데몬 헌터스> 진우 vs <귀멸의 칼날:무한성 편> 아카자
2025. 9. 2.
자, 이번엔 어떤 버스를 탈까?
지난 글에서 국내에서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는 <진격의 거인> 버스를 탑승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글을 보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직접 만난 자리에서 본인의 감상도 말씀해 주시는 등 기분 좋은 대화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껏 고무된 저는 이번에는 더 좋은 버스를 타리라 다짐했습니다.
이번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와 <귀멸의 칼날 : 무한성 편(이하 귀칼)>의 쌍두마차를 타보려고 합니다. 이 두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서 현재 글로벌에서 가장 핫한 ‘콘텐츠’입니다. <케데헌>은 넷플릭스 최고 흥행 영화를 넘어, 2025년 하나의 현상으로 대중문화계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케데헌>의 성공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고, 수록곡들은 빌보드와 스포티파이 차트 줄 세우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귀칼>은 일본에서 먼저 개봉하여 전작이 세운 일본 역대 흥행기록을 차례차례 갈아치우고, 한국에서도 2025년 모든 영화 중 최고의 흥행속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는 등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가장 뜨거운 열기’라고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영화관은 시도하는 곳이 아니다. 확인하는 곳이다
<귀칼> TV 시리즈 방영 당시에, 저는 전화영어로 필리핀 현지인과 매일 통화를 했습니다. 월요일의 통화주제는 항상 그 주 방영된 <귀칼>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글로벌 OTT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은 동시에 콘텐츠를 보고, 그에 대한 반응(덕질!)을 감정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작품의 글로벌 흥행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히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영상 플랫폼입니다.
반면, 글로벌 OTT의 흥행으로 직격탄을 맞은 곳은 바로 영화관입니다. 이미 지불한 구독료로 전 세계 수많은 콘텐츠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건당 15,000원 정도를 내야 하는 영화 관람은 반드시 그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이 영화 재미있을까?’하면서 영화관에 방문하지 않습니다. 이미 콘텐츠나 캐릭터에 대한 팬심을 가지고, 그 감정을 확인하고 공유하기 위해 영화관을 방문합니다. 많은 상영관이 아이돌, 트롯가수, 일본 밴드의 공연 실황, 스포츠 중계, 명작영화 재개봉 등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케데헌>과 <귀칼>의 박스오피스 흥행은 이런 단면을 더 확실히 보여줍니다. <케데헌>은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을 위한, 단 2일의 싱얼롱 상영만으로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번에 개봉한 <귀칼>은 사실, 수십 시간에 이르는 시리즈 물의 최종화입니다. 기존 시청 이력이 없는 사람들은 접근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존 콘텐츠의 팬들은 N차 관람도 마다하지 않으며 기꺼이 돈을 씁니다. 홍대 거리의 상당수가 오타쿠를 위한 전문샵들로 채워져 가는 모습을 보면, ‘오타쿠를 만들지 못하면, 더 이상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걸레 빤 물에서 꺼낸 것 같은 클리셰 덩어리. 그 속에서 빛나는 캐릭터
전 세계적인 화제성에 비해 <케데헌>이나 <귀칼>이나 스토리 자체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고,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케데헌>은 진지하게 개연성을 찾으려고 하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전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서울 상공에서 추락할 비행기 어쩔 거냐고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입장도 노래 한 번에 휙휙 바뀌어버립니다. 그야말로 노래는 이 콘텐츠에서 만능의 해결책입니다.
<귀칼>의 스토리 라인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의 과거 회상씬이 등장하며, 시청자들의 강제 공감을 유발시킵니다. 전투-회상-전투-회상-전투-회상으로 이어지는 반복적인 이야기 구조에 기존 팬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노래 실력이 아닌 구구절절한 개인 사연 오디션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슈퍼스타K>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결함들은 딱히 문제 되지 않습니다. <케데헌>에서 주인공 루미를 물리치기 위해 지상에 올라온 악귀 진우. 넘어진 루미를 일으켜 세워주지 않고 조롱했던 모습이 바로 몇십 분 전입니다. 다소 뜬금없이 루미를 위해 희생하는 진우의 모습에 글로벌 팬들은 오열합니다. <귀칼>은 더합니다. <귀칼>을 세계적인 콘텐츠의 반열에 올려놓은 2020년 개봉 극장판 <귀칼: 무한열차 편>은 영화관에 온 모든 사람들의 눈물 콧물을 다 짜내어 역대급 흥행에 성공하였습니다. 제 와이프도 렌고쿠 쿄주로가 보여준 정의로움과 그의 장렬한 죽음에 1시간 가까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귀칼: 무한성편>에 메인 빌런 아카자의 사연을 접하더니 또 불쌍하다며 웁니다. 아니, 그때 렌고쿠를 죽이고 치사하게 도망한 혈귀가 ‘아카자’라고… 그때 그 나쁜 놈이라니까!
이번 글에서는 주인공을 씹어먹고 세계마저 정복해 버린 두 빌런의 5라운드 매력 대결을 관람하겠습니다. 격렬한 싸움에 쌍두마차가 조금 흔들릴 수 있으니 꼭 잡으세요!
네이버 영화 예고편 저장소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렌고쿠 신규 예고편
tv.naver.com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 렌고쿠 특별 예고편. 당시에 세상의 모든 주목을 받다가, 이제는 아웃오브안중이 된 렌고쿠 형님 지못미…
ROUND 1) 외모 배틀
진우 승!!! 아카자도 혈귀 중에서는 나름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전 세계 여심을 흔들어버린 진우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유튜브에는 진우가 등장하는 순간 자지러지는 리액션을 담은 비디오들이 넘쳐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든 빌런이든 이렇게 매력적인 현실 외모를 가진 애니메이션 자체가 참 오래간만입니다. <겨울왕국>을 마지막으로, 매력적인 외모와 몸매를 가진 (백인) 주인공을 설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케데헌>은 이런 속박을 교묘하게 피해 갑니다. 루미나 진우나, 모두 아시안, 유색인종이잖아요! 예쁘게 그리고 싶은 만큼 예쁘게 그려도 됩니다!
<귀칼>의 캐릭터들은 고유의 특성이 직관적으로 반영된 만화적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장된 외모의 캐릭터들은 사실 제 취향은 아닙니다. 그나마 그중에서는 아카자의 외모가 묘한 울림을 줍니다. 과거 병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를 할 때, 잡힐 때마다 몸에 새겨진 죄인의 문신은 이제 얼굴과 온몸을 뒤덮고 있습니다. 혈귀가 되어 인간을 잡아먹었던 그의 죄가 쌓여가듯이.
ROUND 2) 성우 배틀
애니메이션 캐릭터에서 성우는 캐릭터의 매력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산업 못지않게 성우 시장이 매우 발달된 곳입니다. 아카자의 성우인 이시다 아키라도 엄청난 연기력으로 캐릭터에 딱 맞는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케데헌> 진우의 성우는 역대급 신의 한 수라고 표현할 만합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배우 안효섭이 맡았는데, 목소리가 얼굴보다 잘 생겼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의 편이 되어 있습니다. 진우 승!!
ROUND 3) 파워 배틀
<귀칼>은 제작사 유포터블의 뛰어난 연출력으로 유명한데, 특히 전투씬 연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가 서로의 맞부딪힘에서 순간적으로 정지하는 애니메이션 기술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귀칼>의 전투씬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시청자가 혈귀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귀살대의 집념, 노력에 완벽하게 감정이입 된다는 것입니다. 전투 시간이 지나갈수록 인간은 상처를 입고 체력이 소모되지만, 혈귀는 금세 상처를 회복해 버립니다. 점점 불리해져 가는 전투의 순간에서 필사적으로 생각해 낸 방법을 적중시킬 때의 쾌감, 그런데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에 사용한 필살기마저 소용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 이 모든 것이 전투씬에 담겨 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궁극의 수련을 통해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귀칼>의 무대에서도, 아카자는 ‘강함’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필살의 노력 끝에, 목을 베었음에도 기어코 다시 살아나는 아카자의 강함은 시청자에게 완벽한 절망의 순간을 선사합니다. 저희 와이프는 당황한 나머지 영화관에서 입 밖으로 ‘어떡해…’를 내뱉어 버렸습니다. 반면, 진우는 계속 도망 다니기만 하고 딱히 보여준 게 없네요. 마지막 순간에 귀마의 불길을 막아 루미를 지켜주기는 하지만, 불길은 상대적으로 너무 포근해 보입니다. 아카자 승!!
ROUND 4) 사연 배틀
개인적으로 <케데헌>에서 가장 어이없는 부분은 진우의 사연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쾌락을 위해, 가족을 버린 것 정도 가지고 그렇게 오랫동안 숨기고 고통스러워할 정도인가… 그에 비하면 아카자의 사연은 신파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귀칼: 무한열차 편>부터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잘 그려진 캐릭터, 감성을 폭발시키는 음악 등으로 애틋한 사연을 기가 막히게 연출하여, 캐릭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듭니다. <귀칼: 무한열차 편>에서도 렌고쿠는 거의 처음 보는 캐릭터였고, 심지어 이번 <귀칼: 무한성 편>에서 아카자는 극악무도한 빌런 캐릭터였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전투씬 중 삽입된 잠깐의 회상씬 만으로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응원을 무참하게 좌절시키고, 오열하게 만듭니다.
아카자의 사연에 시청자들이 설득당하는 이유는, 아카자가 지속적으로 보여준 ‘강함에의 집착, 약함에의 경멸’을 제대로 설명해 내기 때문입니다. 비겁한 약자들의 술수 속에서, 아카자는 자신의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아버지, 자신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은인, 비참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여인을 잃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 모두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절망의 순간에, 아카자는 무잔의 피를 받아 혈귀가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저는 이번 배틀에서 아카자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하단에는 귀멸의 칼날의 캐릭터 '아카자'에 관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ROUND 5) 최후 배틀
4라운드까지 배틀은 2승 2패. 지금까지 매 라운드는 한 캐릭터의 압도적인 우세로 진행되었지만, 마지막 라운드는 매우 치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바로 ‘빌런의 최후’입니다.
<케데헌> 진우는 주인공 루미를 공격하는 귀마의 솜털, 아니 불길을 대신 맞고 죽습니다. 그의 영혼은 루미의 무기가 되어, 귀마를 쓰러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솔직히 저에게는 실소가 나오는 설정입니다만, 유튜브에는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진우!!! NO!!!’ 하며 오열하는 팬들의 영상으로 가득합니다. 이 정도면 역시 제가 삐딱한거겠죠?
<귀칼> 아카자의 최후는 제 기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역대급 퇴장씬입니다. 아카자의 강함에 모든 방책이 무용함을 깨달은 절망의 순간, 팔에 힘이 풀려 칼을 놓친 탄지로의 주먹이 아카자의 기억을 되살려 냅니다. 인간 시절의 기억을 깨닫고 자기 스스로를 공격하는 아카자, 하지만 너무 강한 그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재생됩니다. 다시 혈귀로 재탄생하려는 그 순간,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코유키의 한마디는 아카자를 다시 인간이 되게 만듭니다. 인간이 된 아카자는 재생을 멈추고 서서히 최후를 맞습니다.
이 두 최후 가운데, 어떤 것에 승리를 줄까요? 저는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각자의 사연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겠습니다. 진우의 변절과 죽음은 적어도 유미만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귀칼> 주인공인 탄지로는 아카자가 왜 갑자기 죽었는지, 아카자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아예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해 내고 결국 인간이 되었지만, 귀살대에게 아카자는 끝까지 악독한 혈귀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그 씁쓸함에 저는 한 표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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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저는 이 두 작품을 만든 제작사에 무한한 존경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만, 결국 이 엄청난 작품들을 만든 것은 바로 소니픽쳐스와 유포터블, 두 애니메이션 제작사입니다.
소니픽쳐스는 디즈니와 픽사가 식상해진 이 시점에 스타일리시한 3D 애니메이션으로 트렌드를 이끌고 있습니다. OST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단 하나의 장면에도 위트를 담아내는 소니 픽쳐스의 스타일은 전작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시리즈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내년 개봉 예정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시리즈의 최종 3부가 정말 기대됩니다.
유포터블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에서도 작화 퀄리티 끝판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이트> 시리즈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퀄리티는, 다소 진부한 만화였던 <귀멸의 칼날>마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IP 시리즈로 만들었습니다. 이번 <귀칼 :무한성편>도 제작 상의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작화 퀄리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한 유포터블 대표 콘도 히카루의 유명한 답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뛰어난 작화의 비결은… 잠을 자지 않는 것입니다”
(와세대 대학 강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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