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PPL 담당자로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조심스럽지만, 한번 솔직하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요새 TV 프로그램은 재미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재미가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유튜브 콘텐츠도 식상합니다. 비슷한 구성의 콘텐츠에서 고만고만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왜 이렇게 재미없게 느껴질까? 콘텐츠 제작자나 출연자가 엄청나게 조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조금이라도 편향된 주제를 다루거나 문제 여지가 있는 출연자가 등장하면, 프로그램 폐지에 대한 청원이 빗발칩니다. 저는 부정적 이슈 때문에 업무에서 피해를 입은 적도 여러 번 있고, 그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모두가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지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일종의 직업병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본 실제 시청자들의 대부분은 그런 이슈에 대해 별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좀 있더라도 그냥 그 프로그램을 봅니다. ‘쟤 나쁜 짓 했다더라’는 내용은 오히려 또 하나의 오락으로 소화될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시청자 게시판에 비난을 남기는 시청자는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회수 벌이를 하는 언론사들은 한낱 TV 프로그램 관련 이슈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아젠다인 양 기사들을 쏟아냅니다. 브랜드 세이프티를 유지해야 하는 스폰서나 광고주는 부정적 이슈가 있는 프로그램이나 출연자(모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돈 문제가 생기면, 그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결국 제작자나 출연자는 언제 어떤 이유로 등장할지 모르는 불특정 소수 시청자의 눈치까지 봐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기 검열을 하는데, 정작 괜찮을 것 같은 부분에서 또 이슈가 터집니다. 그렇게 프로그램은 ‘욕먹지 않았던’ 기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힙합 스타마저 K팝 아이돌식 90도 선후배 인사를 하게 됩니다.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일까요. 저는 왠지 이렇게 남의 눈치를 보는 콘텐츠들이 비겁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세상일지라도 다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강한 존재를 간절하게 원합니다. 확고한 자아(EGO)를 가지고 있다면, 거짓말을 좀 해도, 사고를 좀 쳐도, 갑질을 좀 해도 괜찮습니다. 애니메이션 <블루록>에 우글우글 등장하는 에고이스트들을 살펴보며, 강력한 에고를 가진 슈퍼스타의 등장을 기다려 봅니다.
만화 역사 상 가장 유명한 에고이스트는 <드래곤볼>의 ‘초사이어인’일 것이다. 초사이어인이 되면 전투력만큼 에고가 성장한다. 다만 여기서 강한 에고는 오히려 약점으로 취급된다. 우주의 운명을 가르는 싸움에서, 강한 에고의 초사이어인은 자아도취에 빠져 프리저의 3단 변신을 기다렸고, 셀의 완전체를 허용했다.
청춘 스포츠 만화의 정반대 지점에서 시작하는 <블루록>
스포츠 만화를 떠올리면 으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 그 아래 퍼지는 고함과 응원 소리, 함께 노력하는 동료들의 땀 냄새, 그들이 구르면서 만들어 내는 흙먼지, 그 안에서 피어나는 우정,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의 아름다움, 비록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함께 했던 우리의 청춘은 영원할 거야...
<블루록>은 우정과 낭만을 강요하는 스포츠 만화의 클리셰를 혐오합니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최선이든, 우정이든, 청춘이든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나약함이 일본 축구가 정체되어 있는 원인은 아닐까? 일본 축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조직력과 패스 플레이를 자랑하면서도, 20년이 넘도록 월드컵 16강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구뿐일까요. 일본의 정치, 경제도 수십 년째 정체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그냥 더 열심히 하자’와는 완전히 다른 해법이 필요합니다.
괴물을 탄생시키기 위한 무한경쟁의 감옥 ‘블루록’을 만들다. 에고 진파치
“응? 혼다? 카가와? 음… 그 녀석들, 월드컵에서 우승 못했잖아? 그럼 쓰레기지. 세계 최고에 대한 얘기 중이었는데? 나는” (우리나라도 대입하면 박지성, 손흥민 정도를 디스 한 거라 보면 됨)
블루록의 창시자. 외모에서부터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광기와 집착이 느껴집니다. 그는 절대적 스트라이커의 부재가 일본 축구의 정체를 가져왔다고 진단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예의와 양보를 미덕으로 하는 일본의 국민성에 있습니다. 필드 위는 전쟁터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잠깐의 망설임에서 스트라이커의 수준이 갈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골을 넣고야 마는 강한 에고를 가진 스트라이커, 그 단 한 명의 스트라이커를 만들기 위해 ‘블루록’을 고안해 냅니다.
그는 300명의 고등학생 스트라이커만을 선발하여 ‘블루록’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놓고, 인생을 건 극한 경쟁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 미드필더나 수비수는 필요 없습니다. 팀 플레이 같은 건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게임에서 내가 골을 못 넣는 것보다는 내가 해트트릭을 하고 지는 게 낫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태된 299명의 미래는 없어도 됩니다. 단 한 명의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답답한 현실에 대한 그의 충고는 처음부터 끌까지 일관됩니다. 이게 바로 제가 에고 진파치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절대로 ‘골을 넣어라, 다만 다른 사람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을 때는 패스해라’ 같은 무책임한 덕언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너희들에게 있어 축구란 뭐지? 11명이서 힘을 합쳐 싸우는 스포츠...? 인연을 소중히? 동료를 위해서...? 다르다고. 그러니까 이 나라의 축구는 몇 년이 지나도 약소한 거다... 가르쳐주지... 축구란 건 말이다… 상대보다 큰 점수를 따는 스포츠다. 점수를 딴 인간이 제일 잘난 거라고. 사이좋게 인연 놀이 하고 싶으면 돌아가”
괴물에 걸맞은 에고로 성장하다. 이사기 요이치
이사기 요이치는 평범한 고교 축구팀의 공격수였습니다. 그는 중요한 경기 마지막에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슈팅 찬스를 잡았으나, 동료와 감독의 지시에 따라 더 좋은 장소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합니다. 하지만, 그 동료는 결국 찬스를 놓쳤고, 팀은 그대로 패배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팀 동료들은 ‘비록 졌지만, 너희들과 함께해서 자랑스러웠다’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하지만 이사기는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결국 졌는데, 뭐가 자랑스럽다는 거지?’
블루록이라는 정체 모를 트레이닝에 초청받은 이사기. 실력순으로 부여받은 번호를 보고 자신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선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국 단위 유망주가 득실득실한 공간에서 이사기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모두가 블루록의 규칙을 믿지 못하고 있을 때, 첫 번째 미션을 통해 전국 최고의 유망주가 탈락해 버립니다. 그 순간, 이사기는 블루록이 생존을 위한 처절한 집착이 없다면 바로 도태되어 버리는 공간임을 깨닫습니다.
냉혹한 블루록에서 끝까지 살아남기에 이사기가 가진 운동능력은 너무나도 부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사기는 생존의 고비에서 매번 극적인 실력 향상으로 살아남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실력 향상이 한층 강화된 에고에서 비롯한다는 점입니다. 강한 에고는 쉽게 자만하게 되어 결국은 패배한다는 클리셰를 많이 봐 왔습니다. 하지만 <블루록>에서 생존에 대한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에고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순간에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위한 열쇠를 찾아냅니다.
이사기는 처절한 승부 끝에 블루록 대표팀의 일원이 됩니다. 블루록 대표팀은 자신들의 존속과 일본 대표 자리를 걸고, 현 일본 U-20 대표팀과 시합을 벌입니다. 시합에서 승리한 후, 이사기는 미디어가 경악할 만한 포부를 밝힙니다. ‘자만’이라고 표현해도 실례가 될 수준이지만, 이사기는 진지합니다. 자신이 진짜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루록은 U-20 월드컵에서 우승하겠습니다. 저희들… 아니… 제가 일본을 U-20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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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으로 살기는 참 쉽습니다. 자기 삶의 궤적은 이미 정해졌다고 결론지어버리고, 젊은이의 삶에 충고만 늘어놓으면 됩니다. 그 충고란 것이 자신의 삶에서 우러난 지혜에 기반한다면 그나마 좀 낫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충고는 AI 양산형 블로그에 있는 글귀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뻔한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뻔한 충고들의 집합은, 명백히 나쁩니다.
매사에 너무 신중하여 성과가 지지부진한 사람에게는 ‘목표를 세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되지’라고 충고할 수 있습니다. 목표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계속 사고를 치는 사람이라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해’라고 하면 됩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해내. 하지만 문제는 안 생기게 신중하고’라는 조언은 무의미할뿐더러, 무책임합니다. 이런 착한 문장들이 만연한 세상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합니다.
<블루록>은 ‘주변 사람 보기를 벌레 보듯 하라’고 충고합니다. 매우 비현실적이고, 편향적이고, 폭력적인 충고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속은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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