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AD에서 제가 담당하고 있는 PPL 업무는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매력은 매번 새로운 위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제작진에 부탁해서 우리를 위한 광고를 만드는 일이 순탄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죠. 사전에 철저하게 체크하고 대비를 해도 제작진, 출연진, 로케이션, 일정, 제품 구동 관련하여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튀어나옵니다. 누구의 잘못이 명확하다면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겠습니다만, 잘잘못을 따질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습관적으로 되뇌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냥 우리 삶이 만들어낸 비극이야’
필자는 TVN <눈물의 여왕>에 메르세데스-벤츠 PPL을 진행했다. 시청률 기록을 경신하는 드라마에 다양한 차종까지 잘 노출되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와, 벤츠 정말 잘 나오네’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마냥 행복한 PPL은 없다…
그때, 출연자 이슈로 촬영 전일에 제작 중단이 된 드라마, 만들어 놓고 공개하지 못하는 영화, 제작은 끝나가는데 정치 이슈 때문에 방영 기일도 잡지 못하는 콘텐츠… 등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처음에는 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지 순수하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내 부끄러운 생각이 떠오르는 걸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저기 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저기에 비하면 난 그래도 살 만한 거 아닌가?’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을 보면서 얻는 은밀한 힐링. 이른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맘껏 느끼시라고 이번에 준비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극도로 가혹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이름하여 ‘불행의 6각형’ 캐릭터입니다. 원래는 남녀 우승자 1명씩을 선정하여 그들의 불행을 살펴볼 예정이었습니다만, 여성 우승자의 경우 간단한 심사평만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매서운 편집자님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녀의 불행은 최대한 순화하여 간략히 표현하려고 합니다.
[불행의 6각형 캐릭터 : 여자 우승자]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 헤븐즈필>_마토 사쿠라
“왜 늘 이렇게 될까? 오래전부터 생각했고, 오래전부터 원망했었어.
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
총괄 심사평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3명의 히로인 중 암울한 설정 때문에 가장 인기가 없는 캐릭터. 프리퀄 작품에서 그려지는 그녀의 유년기조차 지나치게 잔혹하여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다소 순화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마법의 대가 끊길 위기에 있는 친척집에 양녀로 들어간다. 더 촉망받는 언니를 대신하여 가족에게 버려진 것.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벌레 및 양오빠로부터 신체를 유린당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런 그녀를 구해주려 했던 사람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어둠의 마법사가 되어야 하는 그녀의 몸은 인간의 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개조된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자아를 잃고 절대악 그 자체가 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녀가 주인공 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양오빠는 그녀의 더럽혀진 몸과 마음을 폭로하겠다며 협박한다. 순간, 그녀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지며, 오빠는 잔인한 죽음을 당한다. 오빠의 죽음을 본 그녀는, 황폐한 삶 속에서도 그녀의 안식처가 되었던 꿈들이 지독한 현실을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꿈속에서 인형들을 터뜨려 사탕으로 만들며 행복해했지만, 현실에서 그녀는 수많은 인간을 학살하며 자신의 어둠을 채우고 있었던 것. 이제 완전히 자아를 잃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사람에 의해 조종당하는 존재가 된 사쿠라. 사랑하는 사람까지 죽음에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잔인한 설정에 익숙한 나도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진다. 더운 여름 힐링에 제격! (★★★★★)
[불행의 6각형 캐릭터 : 남자 우승자]
<파이어 펀치>_아그니
“왜 나한테 살라고… 그런 지독한 말을 했어…”
<파이어 펀치>는 <체인소맨>으로 차세대 대세 만화가 반열에 오른 후지모토 타츠키의 첫 장편 만화이다. 작가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애니화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일단, 24시간 불타고 있는 주인공을 구현할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이토록 잔인한 설정과 묘사가 필요한 작품에 그 돈을 투자할 곳은 아마 없을 것 같다. 넷플릭스, 조금만 더 힘내줘!
1. 신체 : 몸이 영원히 불타는 극한의 고통을 얻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적에 가까운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를 ‘축복자’라고 부른다. 신체의 일부분이 손상되더라도 금방 다시 재생되는 아그니에게, ‘재생 능력’은 축복이 아닌 저주이다. 얼음마녀라고 하는 축복자에 의해 세상은 영원한 겨울을 지내게 되었고, 식량 부족 속에서 아그니의 몸은 항상 식량이 된다. 자신의 집을 침입한 괴한들에 의해 강제로 식량이 되기고 하고, 자기를 구해준 마을의 노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잘라 식량으로 바치기도 한다. 어린 나이임에도 오늘도 자기 동생을 위해 도끼로 팔을 자르는 아그니. 첫 번째 명대사는 여기서 나온다. ‘오빠는 참 맛있어요’
마을 하나를 통째로 먹여 살리는 아그니. 하지만 그 노력도 무의미해진다. ‘무엇이든 다 태워버리는 불’을 가진 축복자, 도마는 인육으로 연명하는 마을을 용서하지 않고, 통째로 불태워버린다. 아그니의 몸도 함께 불타지만, 그는 재생능력자이다. 그의 몸은 불타고, 재생하고, 불타고, 재생하기를 반복한다. 반복되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온전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수년의 시간이 흐른다. 겨우 호흡을 하고, 잠깐이라도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될 즈음, 그는 복수를 위해 길을 나선다. 영원히 불타는 몸을 이끌고.
2. 가족 :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나가게 만드는 저주에 걸리다
그의 부모는 집에 습격한 괴한들에 의해 식량으로 사용된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여동생 루나. 아그니는 루나를 위해 자신의 팔을 잘라 괴한들에게서 도망치고, 자신에 비해 재생능력이 한참 모자란 루나를 위해 매일 자신의 신체를 잘라 요리한다. 루나만이 그가 세상을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도마의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당하는 아그니.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루나만은 불타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이 만화에서 그런 희망은 금물. 그는 곧 불길 속에서 처절하게 재생하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발견한다. 잿덩이가 되어가는 루나 앞에서, 아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편안해지길 원한다. 지금 죽으면 다음 생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세상에서 부모님과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루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나는 불타는 몸을 질질 끌고 아그니에게 다가와, 평소와 같은 주먹인사를 하며 마지막 부탁을 남긴다. "살아요"
3. 사랑 : (가장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X(가장 증오해야 하는 사람)을 사랑하다
동생 루나는 아그니를 든든한 오빠인 동시에, 이 세상에 남은 몇 안 되는 젊은 이성으로 사랑하고 있다. 루나가 자신의 마음을 아그니에게 고백했을 때, 아그니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루나의 사랑을 억누르려 하지만, 루나에 대한 아그니의 사랑 또한 ‘가족’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그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루나가 극심한 고통 끝에 불타 죽었다는 점도 비극적이지만, 최악은 항상 그다음에 온다. 아그니는 루나의 복수를 위해 자신들을 불태운 조직의 도시, 베헴도르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도시의 지배자 유다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모습은 루나와 똑같이 닮아있다. 아그니는 루나가 수년 전 죽지 않고 살아서 성장한 것이 아닐까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유다는 루나가 아니다. 유다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아그니의 목을 자르고, 더 이상 재생할 수 없도록 먼 바닷속에 영원히 담가 놓을 것을 지시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똑같은 형상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그니는 그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 그렇게 그냥 둘 중에 하나만 죽었어도 최악은 아니었을 텐데… 유다는 모종의 사건으로 기억을 잃고, 결국 아그니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동생. 그 동생을 가장 닮은 자신의 원수. 겉모습이 같다는 이유로 그 원수를 사랑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아그니. 이 정도 고통도 부족하다고? 결국 모습을 드러낸 ‘얼음 마녀’마저, 동생 루나와 닮아있다. 이 정도면 이 만화의 모든 설정은 아그니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4. 윤리(살인) :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다
아그니(파이어 펀치)의 복수의 여정은 수많은 사람의 잿더미 위에 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닿은 사람들은 모두 꺼지지 않는 불꽃에 의해 불타 죽기 때문이다. 꼭 죽이려 하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불꽃 한 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격렬한 전투의 과정에서 그가 쓰러지는 곳마다 불바다가 되고, 결국 베헴도르그라는 도시는 멸망한다. 만약, 아그니의 몸에 붙은 불꽃이 꺼지고 그가 정신을 되찾는 순간이 온다면, 아그니는 자신이 수없이 행한 끔찍한 살육을 견딜 수 있을까?
5. 목적 : 이 고통스러운 삶의 목적. 그 달성의 순간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그니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복수심이다. 자신과 동생을 불태운 원수 도마를 만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너무 흘렀다. 자신들에게 냉정하게 심판의 불을 붙이던 도마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도마는 심약한 모습으로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며 살고 있었고, 속죄를 위해 수많은 고아들을 자식처럼 돌보고 있었다. 도마를 아빠처럼 따르는 고아들을 보면, 복수를 하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그나마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알아서 죽어주면 좋으련만. 또 죽는 건 무서워하는 도마. 정말 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 고통을 참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정말... 내가 죽였나? 어떻게 하면 나를 용서하겠나? 죽는 것 빼고 뭐든 하겠다"
6. 자기결정권 : 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게 나 자신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설명해 온 가학적인 고통만이 <파이어 펀치>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미친 전개’를 끌고 가는 것은 300년 이상 살아온 재생능력자 ‘토가타’의 존재이다. 토가타는 과거의 다양한 영화들을 보면서 영원한 삶의 지루함을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베헴도르그의 습격으로 가지고 있던 영화가 모두 유실되어 삶의 의미를 잃고 만다. 그 와중, 그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전진하는 아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아그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토가타는 복수를 위한 무대를 마련해 주기로 제안하고, 아그니가 그 무대의 주연배우가 되도록 도와준다. 오랜 고통으로 신중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아그니는 토가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한다. 그리고 토가타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다. 토가타가 짜 놓은 각본대로 베헴도르그로 향하는 아그니. 그의 복수는 과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는 누구를 위하여 이 모든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혹시 지금 삶에서 <파이어 펀치>처럼 몸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불평하지 말고, 참고 견디세요! 당신이 직접 그 길을 선택하여, 당신의 의지로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 있는 이유가 당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한 번쯤은 의심해 보시길 바랍니다. 국가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시선, 가족의 기대, SNS의 사진이나 TV속 연예인 등등… 그 고통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정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저는 단호하게 그 고통을 거절하겠습니다.
김영신의 2D 캐릭터 뽀개기 2024.07
'트렌드 > 김영신의 2D 캐릭터 뽀개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人)과 생(生)의 롤모델 캐릭터, 하나와 깅코 (2) | 2024.12.09 |
---|---|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찾아 내돈내취] 지브리 파크 인기 캐릭터 best 5 (0) | 2024.10.29 |
고고한 메인스트림에 날리는 서브컬처의 통쾌한 펀치! – QWER에 영향을 준 캐릭터들 (1) | 2024.06.10 |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고 싶어! 2편> 최애 코스어와 함께하는 코스프레 실전 매뉴얼 (0) | 2024.04.24 |
지긋지긋한 증오의 연쇄를 막을 방법은?_ 불가능에 도전한 테러리스트들 (0) | 2023.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