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분쟁이 격화되면서, 유튜브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시업 콘텐츠들이 재업로드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활용해 조회수를 벌어보겠다는 의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두 집단 간 증오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국가 간 전쟁부터 납치, 살해, 테러까지… 보복은 더 큰 보복을 낳고, 그 '증오의 연쇄'를 중단하기 위해 평화적인 타협을 시도한 사람은 급진파에 의해 암살됩니다.
그렇다고 그 급진파를 마냥 욕할 수만도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살 곳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무참히 살해당한 아픔을 '그냥 잊고 평화롭게 살면 안 되나?'라고 편안하게 얘기하는 것도 죄책감이 듭니다.
일본 또한 식민지 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이들의 증오를 만들어 낸 국가입니다.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는 우파 정치인이 있는 반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반전 메시지를 보내는 지식인과 콘텐츠도 많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지긋지긋한 '증오의 연쇄'를 멈추고자 했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소개해 드립니다.
그 목표는 불가능에 가까워서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테러리스트입니다.
1. 모든 무력 활동은 더 강한 무력으로 파괴하겠다
<건담 더블오 시즌1> 세츠나 F. 세이에이
<건담 더블오>는 우주 태양광이라는 대체 에너지로 인해 인류가 석유의 속박에서 벗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영구적인 에너지를 얻었다고 해도 인류 간 분쟁은 여전합니다. 그 에너지를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그리고 석유라는 힘을 잃은 중동지역의 국가들.
<건담 더블오>의 주인공 코드명 세츠나(본명: 소란 이브라힘)는 중동 국가의 소년병이었습니다. 그는 신의 사명을 받들기 위해 부모까지 살해할 정도로 세뇌된 상태였습니다. 분쟁의 최전선에서 살인 도구로 활용되던 세츠나는, 건담과의 만남을 계기로 '솔레스탈 비잉'이라는 정체 모를 단체의 일원이 됩니다.
<건담 더블오>는 '솔레스탈 비잉'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목적을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세계 최강국의 신무기 발표 현장에 나타난 건담은, 월등한 성능으로 신무기를 간단히 제압해 버리고 자신들의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솔레스탈 비잉, 기동병기 건담을 소유한 사설 무장 조직입니다. 우리 솔레스탈 비잉의 활동 목적은 이 세계로부터 전쟁을 근절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기하여 모든 인류에게 선언합니다. 영토, 종교, 에너지,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든 전쟁 행위에 대해 무력 개입을 개시할 것입니다"
'무력을 막기 위한 무력 행위'는 말 자체로 모순적입니다. 당사자들도 작품 내에서 그 모순을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드문 일은 아닙니다. 국가 내에서 경찰은 무력을 막기 위해 합법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국제 사회로 봐도,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무기는 없었지만) 하지만 이렇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 위에서 경찰 노릇을 한다고 하면, 타국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게다가 그 경찰도 자국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솔레스탈 비잉'은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종의 테러 집단으로, 국제 사회나 자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뛰어넘은 압도적인 성능을 가진 무기, 건담으로 전 세계의 모든 무력 분쟁에 개입합니다. 특히 세츠나는 무력 분쟁에 도구로 활용되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분쟁의 존재 자체를 견딜 수 없는 인물입니다. 세츠나와 그의 건담 엑시아는 이런저런 전후 사정 같은 것은 파악하지 않고, 분쟁 발견 즉시 모든 무력 사용 주체를 파괴합니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을 막을 수 있을까요? 자신들보다 상위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각 국가연합, 분쟁으로 먹고 살았던 용병 집단 등 기존 기득권 세력 모두 솔레스탈 비잉의 적이 됩니다. 그동안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던 세력들은 서로 협력하여 건담에 필적할 만한 무기들을 만들고, 실력 있는 용병들을 활용하여 솔레스탈 비잉을 공격합니다. 결국 <건담 더블오 시즌1>의 결말에서 솔레스탈 비잉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와해됩니다.
과연 솔레스탈 비잉은 전 세계가 연합하여 만들어낸 무력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건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애당초 그들은 왜 이렇게 해서까지 인류의 모든 분쟁을 없애려고 했던 걸까요?
2. 이제 서로 증오하지 말고, 날 증오해라
<코드 기어스> 를르슈 람페르지
<코드 기어스(부제 : 반역의 를르슈)>는 '일본이 식민지가 되어 나라와 이름을 잃게 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발상에서 시작하는 작품입니다. 극 중 브리타니아(영국과 미국을 합친 듯한 세계 최강 제국)에 의해 국가를 빼앗긴 일본은, 11 구역 주민이라는 뜻의 ‘일레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심한 차별을 받습니다. 독립을 원하는 일레븐은 브리타니아인 거주구에 지속적인 테러를 감행하고, 브리타니아 군대는 보복으로 일레븐 거주구에서 무참한 학살을 벌입니다. 이 증오의 연쇄는 우리가 과거에서 본 것과,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브리타니아 제국의 왕자인 를르슈는 어린 시절 의문의 총격으로 어머니를 살해당하고, 그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린 여동생 나나리와 함께 일본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일종의 볼모인 자신들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은 채, 브리타니아가 일본을 점령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를르슈는 어머니를 지켜주지 않았고, 여동생 나나리의 안전마저 보장할 수 없게 자신들을 방치한 아버지를 증오합니다. 를르슈는 일본 수상의 아들이자 절친인 쿠루루기 스자크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브리타니아를 멸망시킬 것을 다짐합니다. 하지만 를르슈는 체스와 전략의 천재일 뿐,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연히 말려들게 된 일레븐 학살 현장에서 그는 브리타니아인에게 호송되던 의문의 소녀 C.C.('씨투'라고 읽음)를 구하게 되고, 함께 살해당할 위기의 순간에 그녀로부터 '기어스'라는 미지의 힘을 얻게 됩니다. 그가 가지게 된 기어스는 누군가의 눈을 보고 특정 명령을 하면, 무조건 복종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는 가면을 써 자신이 브리타니아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테러리스트 '제로'라는 이름으로 일본 독립 조직과 협력하여 브리타니아를 공격합니다. 반면 일본인인 스자크는 오히려 합법적인 방법으로 일본인의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 브리타니아 군인으로서 '제로'의 테러를 저지합니다.
를르슈는 기어스라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체스 말처럼 조종하면서, 자신의 천재적인 전략을 실현합니다. 하지만 브리타니아에 큰 타격을 입힐수록,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증오의 연쇄'라는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갑니다. 점점 통제되지 않는 기어스는 오히려 온건파들이 상대방을 학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일본인 동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제로의 동료가 된 것인지, 아니면 기어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를르슈는 결국 브리타니아와 일본 독립 조직을 비롯한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이유였던 여동생 나나리마저 기어스로 조종해 궁극의 무기(현실의 '핵'과 유사한 무기)까지 빼앗은 를르슈는 세계 전체를 무력으로 억압하는 악의 황제가 됩니다.
나나리를 비롯해, 과거의 모든 적과 동료를 처형대에 올려놓은 를르슈. 그 순간 테러리스트 제로가 나타나 어쩐지 허술한 경호원들을 다 무너뜨리고 를르슈를 암살합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를르슈와 스자크가 미리 짜놓은 계획이었습니다. 를르슈는 증오의 연쇄를 막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증오하도록 만든 상태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방법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가 배신했던 모든 사람과 그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를 떠올리며, 아래와 같은 말을 남깁니다.
"나는 세계를 부수고, 세계를 창조한다"
를르슈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평화는 과연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수많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가 아직까지도 오랜 내전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면, 를르슈의 죽음이 의미를 가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3. 세상에 둘 중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면, 그건 너희가 아니라 우리
<진격의 거인> 에런 예거
*해당 내용은 현재까지 공개된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진격의 거인>은 최근 10년간 글로벌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애니메이션으로, 하마스-이스라엘 분쟁이 이슈화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거인의 침략을 피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살아야 하는 인류의 모습은 외부 이스라엘에 의해 격리된 가자/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과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여러 시즌을 거쳐오면서 그 벽이 침략을 막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운 존재들을 가두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매 시즌마다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로 인하여, <진격의 거인> 주인공 에렌 예거의 스탠스도 계속 변화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에렌은 자신이 살던 마을을 파괴하고, 엄마를 먹어버린 거인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종시켜 버리겠다며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거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거기에 더해, 함께 싸우던 동료의 일부가 사실은 벽을 파괴한 거인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벽 너머의 땅끝에는 다른 인류가 있었고, 그들은 거인을 이용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충격을 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진격의 거인 시즌4>는 이야기의 무대를 과감하게 전환하는 시도로 또 한 번의 신선한 충격을 안겨줍니다. 주인공이었던 에렌, 미카사, 아르민이 아닌 벽 밖 인류의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재구성합니다. 벽 안의 인류는 ‘엘디아인’으로 불리며, 거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해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죄로 인해 벽 밖에 남아있던 엘디아인은 마치 히틀러 시절의 유대인들처럼 완장을 하고 격리구에서 생활하며, 전쟁 도구로 이용당합니다. 그들은 벽 안의 엘디아인을 마치 악마처럼 인식하고 있으며, 그 벽을 깨고 나오려는 에렌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합니다.
자신이 거인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에렌은, 과거 자신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더 큰 증오를 심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벽 밖에서 살아온 에렌의 배다른 형 지크 예거는 둘 중 하나의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런 증오의 연쇄를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에렌에게 엘디아인이 번식을 멈추고 조용히 멸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렌이 과연 그 생각에 동의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즌4 이후로 에렌은 철저히 타자화되어 있기에, 동료들도 적들도 에렌의 의도를 계속 추측만 할 뿐입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벽 안의 엘디아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그 순간, 거인화된 에렌이 나타나 행사장을 무참히 파괴하고 주동자를 집어삼켜 버립니다. 그 과정에서 국적, 성별, 연령이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전세계인의 주적이 된 에렌은 형과 힘을 합쳐 모든 엘디아인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지만, 마지막 순간 형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증오의 연쇄를 막기 위해 둘 중 하나의 인류가 사라져야 한다는 형의 상황 판단에는 동의를 했으나, 에렌이 원한 해결책은 정반대였습니다. 에렌은 벽을 구성하고 있던 수많은 초대형 거인을 움직여 벽 밖의 전 인류를 몰살하기 시작합니다.
에렌은 정말 벽 밖의 모든 인류를 몰살하려는 것일까요? 에렌의 오랜 친구 미카사와 아르민, 에렌을 배신했던 벽 밖의 거인 전사들,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 간의 증오를 잠시 멈추고, 에렌의 진심을 알기 위해 함께 에렌의 뒤를 쫓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11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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