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와 어제가 별반 다르지 않고, 오늘과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누가 몰래 날짜를 바꿔 끼워 놓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은 나날. 끝도 답도 없는 미팅에 녹초가 된 채 자리에 돌아와 너무나 무심해 보이는 팀장님을 한번 바라봅니다. 그리고 슬며시 두 손바닥을 앞으로 펼친 채,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도겐…!”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서브컬처 용어 중 하나로 ‘중2병’이 있습니다. 중2 시기가 되면 으레 찾아오는 신체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가치관 변화를 우리는 ‘사춘기’나 ‘질풍도노의 시기’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제 주변의 많은 젊은 부모들이 자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중2병에 걸렸다’는 말을 씁니다. 지금 중3 아들을 두고 있는 아빠로서 확실히 얘기하는데, 부모의 말에 반항하거나,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으려는 중2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의 차이를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사춘기’가 감기에 걸리기 쉬운 면역력 저하 상태라고 했을 때, ‘중2병’은 그 시기에 쉽게 걸릴 수 있는 감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2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망상’과 ‘자아도취’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제 경험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 중2 무렵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대전게임이 매우 유행이었는데요. 오락실 아닌 제 방 침대에서 손을 펼치며 ‘아도겐!’을 외쳐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장풍이나 필살기 같은 초능력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망상과 ‘혹시 내가 초능력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수도 있잖아?’라는 자아도취가 결합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2병’이라는 말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위의 사례처럼 누구나 한번 경험했을 정도의 가벼운 증상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미디어 콘텐츠 상에 드러나는 ‘중2병 캐릭터’들은 개인적인 ‘망상’과 ‘자아도취’에 그치지 않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 과시하는 ‘허세’로 점철된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중2병 캐릭터’를 꺼려하고, 캐릭터 자신도 점점 사회에서 고립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중2병 중증자’ 캐릭터의 사례를 통해 중2병을 졸업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처방 1) 망상을 현실로 만드세요 : <슈타인즈 게이트> 오카베 린타로
시간여행을 다룬 애니메이션 중 최고로 꼽히는 <슈타인즈 게이트>의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는 위에 설명한 망상, 자아도취, 허세가 가득한 중2병 캐릭터입니다. 본인을 매드 사이언티스트 ‘호오인 쿄우마’라 칭하며, 글로벌 정보기관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관의 감시를 대비해 출처를 알 수 없는 암호 ‘엘 프사이 콩그루’를 말끝마다 붙이고, 허세 가득한 작전명들을 외치지만, 정작 본인이 곤란해졌을 때는 ‘이것 또한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인가!’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변명만 하는 치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전반부 내내 계속되는 주인공의 중2병 허세를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청 도중에 중도하차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 작품입니다.
악명 높은 <슈타인즈 게이트>의 전반부는 오카베가 중2병에서 졸업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카베는 타임머신 이론 설명회를 참석하고 나온 후, 천재 과학자 크리스(여주인공)가 살해되어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깜짝 놀라 그 사실을 문자로 해커 친구에게 전송하는 순간,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해커 친구와 만든 여러 가지 괴상한 실험기구 중 하나가 작동하여 그 문자는 과거로 송신되었고, 그 결과로 세상은 크리스가 죽지 않은 또 다른 세계선(특정 시점에 분기하여 생긴 또 다른 타임라인)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오카베와 크리스는 이 사실을 깨닫고 함께 타임리프 기술 개발을 진행함과 동시에, 친구들의 콤플렉스를 해결하기 위해 문자를 계속해서 과거로 전송합니다. 그 때마다 세계선은 계속 변화하고, 최종적으로는 오카베의 모든 망상과 허언이 진실이 되는 세계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제 오카베의 망상은 더 망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중2병 졸업 완료!
중2병은 졸업했다고 볼 수 있지만, 오카베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세계선은 너무나 가혹한 세상입니다. 이제 실재하게 된 기관은 오카베의 연구소로 침입하여 오카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소꿉친구 마유리를 살해합니다. 그 세계선에서 예정된 미래는 더욱 잔인합니다. 기관은 오카베와 크리스의 타임리프 이론을 통해 타임머신을 개발하게 되고, 그 기술을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미래를 알게 된 오카베는 자신이 중2병이었던 원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백수천 번의 타임리프(다른 세계선의 자신으로 의식을 전송하는 기술)를 시도합니다.
수많은 시도 속에서 수천번 마유리의 죽음을 목격한 오카베는 맨 처음 있었던 세계선 이동을 수정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최초의 세계선이라면.. 그렇습니다. 크리스가 애초부터 죽어 있었던 바로 그 세계선입니다. 이미 3주간 함께 타임머신을 개발하고, 마유리를 살리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과정에서 크리스 또한 오카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깨달은 크리스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오카베는 마지막 세계선 이동을 통해 마유리를 살려냅니다. 이제 세상은 평화로워졌습니다. 크리스는 없고, 타임머신도 없고, 크리스가 자신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오카베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괴로워하는 오카베를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나 싶은 순간, 하나의 영상 메시지가 오카베에게 도착합니다. 영상 메시지는 남은 인생 내내 크리스의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세계선을 연구해 온 미래의 오카베가 보낸 것입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있는 현재의 오카베에게 너무나 중2병스러운 언어로 마지막 작전을 지시합니다.
“지금부터 마지막 미션 ‘오퍼레이션 스쿨드’의 개요를 설명하지... 그것이 ‘슈타인즈 게이트’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다!
건투를 빈다. 엘 프사이 콩그루”
처방 2) 망상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으세요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다카나시 릿카
제목부터 중2병스러운 이 작품은 중2병 자체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심한 중2병에 걸렸던 본인의 흑역사를 지우고 싶은 토가시 유타는 중학교 시절의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먼 고등학교로 진학합니다. 베란다에서 자신의 온갖 중2병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던 유타는 위층 베란다에서 줄을 타고 탈출하는 소녀 다카나시 릿카를 만나게 됩니다. 릿카는 거대한 힘을 가진 오른쪽 눈을 항상 안대로 봉인하고 있고,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자신의 무기 ‘슈바르츠제크스 프로토타입 마크Ⅱ’(라고 하지만 평범한 자동 우산)를 들고 다니는 중2병 중증자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흑역사가 드러날까 싶어 릿카를 멀리하는 유타. 자신과 비슷한 부류임을 알고 유타를 자신의 동료로 포섭하고자 하는 릿카. 릿카는 자신의 망상 속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주장이 강하고 의지가 높은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 하나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수줍은 소녀입니다. 유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릿카를 항상 돌봐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둘은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유타는 릿카가 중2병에 걸리게 된 계기를 알게 됩니다.
가족들은 어린 릿카에게 아버지의 병과 죽음을 숨겼고, 뒤늦게 이 사실을 들은 릿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날, 수평선 너머의 빛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릿카. 그 이후부터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불가시 경계선(또 하나의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갈망하게 됩니다.
연인이 된 유타의 설득으로 결국 릿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안대를 벗습니다. 중2병 졸업 완료! 하지만, 중2병 동료들의 동아리도 해산하고 평범한 여고생이 된 릿카의 삶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릿카가 자신만만해하던 자신만의 세상은 사라지고, 현실에서의 초라한 모습만 남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유타는 릿카를 위해,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중2병 자아 ‘다크 플레임 마스터’가 되어 ‘불가시 경계선’을 소환해 냅니다. 손발이 다 오그라들 정도의 주문을 거리낌 없이 외치면서!
유타가 열어준 불가시 경계선을 통해 릿카는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중2병에 걸린 자신도 인정하는 릿카. 그런 릿카를 좋아하는 유타. 자신의 망상을 이해해 줄 사람만 있다면 중2병은 그리 걱정할만한 질병이 아닙니다.
너희 둘은 괜찮겠지. 하지만 그걸 보는 우리 눈은 어쩔 거니..
그제와 어제가 별반 다르지 않고, 오늘과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누가 몰래 날짜를 바꿔 끼워 놓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은 나날. 혹시 여러분이 이런 일상을 살고 있다면, 이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요법으로, 여러분께 중2병을 처방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을 수 있다면, 망상이든 자아도취이든 그게 무슨 문제일까요? 혹시나 중증으로 발전할까 봐 우려하신다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중2병에서 졸업하기 위한 방법도 잘 알려드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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