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장래 희망은.. 을밀대 주인 아들입니다!”
HS애드 뒤편에는 최강의 평양냉면 맛집 을밀대가 있습니다. 여름이면 그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좁은 골목에 길고 긴 줄을 섭니다. 그 일대로 확장하고 있는 을밀대를 바라보면서, ‘와~ 이 집주인 돈 많이 버시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주인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음식점의 시작에서부터 매장 관리, 확장 등등 성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오셨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문제가 나의 작은 힘으로는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저는 가끔 상상하곤 합니다. 그런 노력의 과정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으니, 그냥 을밀대 주인 아들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먼치킨’이라는 용어를 알고 계신가요? 먼치킨은 <오즈의 마법사>의 난쟁이 캐릭터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RPG 게임 내에서 ‘다른 캐릭터와 협력해야 한다는 룰을 무시하고 혼자서 미션을 해결하려고 고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여럿이 해야 하는 미션을 한 명의 힘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당연히 그 한 명은 엄청난 능력치를 보여주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먼치킨은 ‘그 세계의 룰을 무시할 정도로 강한 캐릭터’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한국 서브컬처에서만 먼치킨을 이렇게 확장된 의미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만난 친구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사용하실 상황도 없겠지만요.
모든 적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원펀맨>의 사이타마, <진격의 거인>의 (거인을 제외한) 인류 최강 리바이 아커만 등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캐릭터들을 보면, 압도적인 먼치킨으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등장과 동시에 최강임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드래곤볼>이나 <원피스> 같은 기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도 결국에 최강이 된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최강이 되기 위해 그들이 보여준 꾸준한 노력이나 경험치는 오히려 먼치킨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희석해 버리는 느낌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먼치킨은 서울 아파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꾸준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인간을 초월하는 노력과 절제로 서울의 아파트를 힘겹게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사 준 아파트를 그냥 갖고 있는 사람이 더 멋져 보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이미 심화된 경쟁으로 지쳐있는 세대에게 ‘노력’은 더 이상 훈장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최강’으로 설정되어,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적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먼치킨 캐릭터에 대중은 환호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먼치킨 캐릭터들이 손가락 하나로 시원하게 적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면서, 유난히 덥고 짜증 나는 이번 여름을 함께 날려버렸으면 합니다!
1. 최고로 강하면, 좀 건방져도 되잖아! : <주술회전>의 고죠 사토루
<주술회전>은 저주로 인해 생겨난 주령들과 싸우는 주술사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술회전> 본편의 주인공 이타도리 유지는 온갖 치명적인 위기를 힘겹게 넘기지만, 그의 선생님 고죠 사토루는 항상 여유로운 농담을 던지며 위기를 단숨에 해결합니다. 가장 강력한 주령들도 그를 물리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며, 그의 발을 잠시 붙잡아두는 것으로도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사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비술사와 주술사를 포함한 일본의 모든 인간을 혼자서 죽일 수 있습니다.
고죠 사토루의 ‘강함’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꾸준한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타고난 것입니다. 그는 주술 명문가 출신으로 그 가문에서도 400년 만에 한 번 나온다는 천재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강함을 인정받고 자라서인지, 그는 한없이 가볍고, 건방진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사안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관습이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의 판단에 따라 행동합니다. 사토루가 ‘노친네들’이라고 부르는 ‘주술고전’의 의사결정권자들은 항상 제 멋대로인 그를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강력한 주령이나 주저사(주술을 악용하는 주술사 집단)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고죠 사토루의 ‘강함’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만, 전문가는 돼야 한다”
제가 회사 후배들에게 꼰대 모드로 설교를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레퍼토리입니다. 인생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 수 있고, 그런 삶의 태도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내 업무 분야에서 ‘강함’을 보유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약하다면, 클라이언트 앞에서, 팀장님 앞에서 수시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가 충분히 강하다면, 그만큼 당당하고 건방져도 됩니다. <주술회전>의 고죠 사토루는 그래서 더 멋진 캐릭터입니다.
2. 최고로 강하면, 뭐 하나는 빠져도 되잖아 : <모브 사이코 100>의 모브
<원펀맨>에서 주인공 사이타마의 펀치 한 방으로 괴수를 포함한 지구의 일부분이 삭제되어 버리는 장면은 정말 시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강하면, 이야기의 구조가 단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원함도 똑같이 반복되면 더 이상 상쾌하지 않습니다. <원펀맨> <모브사이코 100>등 먼치킨물로 유명한 작가 ONE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압도적인 강함에 대비되는 압도적인 약함을 동시에 캐릭터에 부여합니다. <원펀맨>의 사이타마는 ‘탈모=매력 없음’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물)
<원펀맨>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제가 더 좋아하는 작품인 <모브 사이코 100>의 주인공 카게야마 시게오(통칭 모브)는 겉보기에는 매우 평범한 학생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압도적인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심한 성격이 항상 발목을 잡습니다. 모브는 자신의 초능력이 혹시라도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초능력이 아예 없어 주령을 보지도 못하는 가짜 퇴마사 레이겐의 조수로 고작 시급 300엔을 받으면서 제령 알바를 합니다. 도시 전체를 부술만한 강한 악령들을 손쉽게 상대하지만, 오랫동안 짝사랑해오고 있는 츠모비 짱에게는 한마디 말조차 건네는 것이 어렵습니다.
만약 모브가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이 애니메이션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은 이미 진작에 다 해결되어, 어떠한 위기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작가가 부여한 설정 하나가 상황을 더욱더 위태롭게 만듭니다. 소심한 모브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표정이나 행동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청자는 모브의 무의식 속에 점점 차오르는 감정의 수위를 1~100까지의 숫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숫자가 100을 넘어서면, 모브는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먼치킨이 됩니다. 폭주한 모브는 모든 이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합니다.
<모브 사이코 100> 최종장인 시즌 3에서 등장하는 최후의 보스는 이 세계를 정복하려는 강력한 악당이나 악령이 아닙니다. 최종 보스는 바로 폭주한 모브 자신입니다. 곧 전학을 가는 츠보미 짱에게 고백을 하러 가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모브는 자제력을 잃고 폭주합니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모브, 시즌 1~3의 모든 동료, 심지어 적까지 힘을 합쳐도 모브의 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모브는 이성을 되찾고 결국 츠보미 짱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원하게 차입니다. 자신이 만든 폐허 위를 걸어 돌아가는 모브의 얼굴에는 후련함과 함께 약간의 자신감이 보입니다. 초능력자로서는 이미 더 올라갈 곳이 없지만, 모브는 인간으로서 작지만 어려운 계단 한 칸을 올라섰습니다. 3개 시즌에 걸쳐 이어진 <모브 사이코 100> 이야기의 최종 도달점은 바로 그곳입니다.
3. 최고로 강하면, 뭘 하면 좋을까? : <암살교실>의 살생님
<암살교실>은 황당하고 독특한 초반 설정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급 명문계 중학교의 3-E반 학급에 괴상한 생명체의 형태를 한 선생님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달의 70% 날려버렸으며, 1년 후에는 지구를 날려버리겠다고 선언합니다. 각 국의 수뇌부가 가진 모든 군사력과 기술로도 어차피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 정부는 1년 간 3-E 학급의 담임선생으로 학생들에게 암살을 가르치겠다는 그의 요구를 수용하며, 30여 명의 학생 중 1년 내에 그를 죽이는 학생에게 백억 엔(구백억 원)의 보수를 약속합니다. 과연 학생들은 ‘살인을 가르치는 선생님(살생님)’을 죽이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 교실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만을 바라고, 낙오한 학생들은 버려지는 입시행태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E반은 나머지 A~D반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한 본보기 반입니다. 경쟁에서 낙오된 학생들은 3-E반으로 옮겨지고, 나머지 학생들과 철저하게 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차별 대우를 받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A~D반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의욕도 기대되지 않던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살생님이 나타나 자신을 암살할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살생님은 암살 기술과 암살 의욕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학생들은 그에게서 삶에 대한 의지를 배웁니다. 사실 살생님을 죽이는 건 명문대를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도 말입니다.
왜 살생님은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가지고서도 1년 동안 낙오자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걸 선택한 걸까요? 살생님은 원래 유명한 암살자였으나, 사형 대신 행해진 생체 실험의 과정에서 최강의 병기로 만들어집니다. 그 역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먼치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그가 ‘최강’이 된 순간에 ‘최고’만을 원하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해결하러 간다는 점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물론 자신을 보살펴 준 이의 부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앞으로 1년이라는 본인의 수명을 알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러 갑니다. 만약 당신에게 지구마저 쉽게 부술 수 있는 힘과 단 1년의 수명이 동시에 주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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