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계의 양대 산맥으로 아니메(애니메이션의 일본식 약어) 덕후와 아이돌 덕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돼도 일반인이 질색할 텐데, 만약 이 둘을 합쳐 놓는다면? 아니메 아이돌 오타쿠가 그야말로 ‘덕 중의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회사 블로그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을 정도로 내일 없이 살고 있지만, 차마 그 분야만큼은 제 마음속에 허락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않았습니다’라는 과거형 문장에서 이미 눈치채신 분들이 있겠죠? 23년 2분기에 글로벌에서 가장 히트한 작품, <최애의 아이>의 아이돌 캐릭터 ‘호시노 아이’에 의해 저는 드디어 함락당했습니다. 제 마지막 저항선이 함락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완벽한 아이돌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 아래 내용에는 현재 방영 중인 <최애의 아이>의 심각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조건 1) 굴욕 없는 비주얼과 퍼포먼스
작중 완벽한 아이돌로 묘사되는 ‘호시노 아이’는 중소기획사의 아이돌 그룹 ‘B코마치’ 부동의 센터입니다. <최애의 아이> 7화에서 주인공 호시노 아쿠아는 자신의 이상형을 묻는 동년배 여자애들의 물음에 ‘얼굴 예쁜 여자’라고 대답하여 경멸의 시선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최애 호시노 아이를 떠올리며, 아래와 같은 조건을 덧붙입니다.
“태양 같은 미소.. 완벽한 퍼포먼스.. 그야말로 무적인 것 같은 말과 행동, 빨려 들어갈 듯한 타고난 눈동자”
사실 이 세상에 얼굴이 예쁜 아이돌은 너무나 많고, 특히 아니메 아이돌은 각양각색 취향을 반영한 예쁜 비주얼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을 빼기 위해 먹는 걸 참을 필요도 없고, 코를 높이기 위해 수술을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냥 예쁘게 그리면 됩니다. 하지만 예쁜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아이돌 관련한 수많은 동영상 콘텐츠가 생산되는 요즘, 1초당 30개씩 생산되는 수많은 이미지 중 가장 안 예쁜 것을 캡처한 ‘굴욕샷’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아이돌 무대처럼 급격하게 바뀌는 카메라 앵글에 따라 1초에 수십 장의 그림을 고퀄리티로 그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아이돌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러브 라이브>의 제작사 선라이즈는 3D 모델링을 활용하여 아이돌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재현해 냅니다. 일일이 손으로 그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카메라 앵글을 마음대로 회전시킬 수도 있고, 음악 타이밍에 맞추어 완벽한 액션이 가능합니다. 이 성공사례가 국내에서도 최근 성과를 내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 <이세계 아이돌>이나 <소녀 리버스>의 탄생을 불러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3D 모델링 캐릭터와 2D 작화 캐릭터와의 이질감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캐릭터 디자인 자체가 3D에 맞춰 열화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도 비주얼로는 저를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러브라이브>의 제작사는 건담의 제작사로 유명한 선라이즈.
아이돌 퍼포먼스는 3D 모델링을 쓰면서, 정작 건담의 로봇 전투씬은 손으로 그린다.
<최애의 아이>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돌파합니다.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보다는 호시노 아이를 가장 매력적으로 한 장 한 장 그려내는 데 집중합니다. 가장 힘을 주는 부분에서는, 단 한 장의 그림만으로 시청자를 압도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역동적인 퍼포먼스 부분은 어떻게 할까요? 퍼포먼스 자체를 그려내기보다는 그 퍼포먼스에 함락되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병원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동년배 여자아이도, 그 여자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의사도, 그저 그런 양산형 아이돌이라고 비아냥대던 방송사 관계자들도 호시노 아이의 퍼포먼스가 시작되는 순간,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저도 호시노 아이의 완벽한 퍼포먼스에 함락됩니다. 저는 그 퍼포먼스를 실제로는 보지 못했기에, 어떠한 ‘굴욕샷’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조건 2) 행복을 주는 거짓말
<최애의 아이>1화는 시골 마을 산부인과 의사 고로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날조하고, 과장하고, 불리한 부분은 깨끗하게 감추는 이 세상에서 차라리 완벽한 거짓말을 해주는 존재를 원한다.
그게 바로 아이돌 팬이라는 존재다. 이 업계에서, 거짓말은 무기다’
<최애의 아이>의 스토리는 ‘거짓말’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고로는 자신의 최애 아이돌 호시노 아이가 임신부로서 자신의 병원에 방문한 사실을 알게 되고, ‘출산 사실을 거짓말로 숨기겠다’는 그녀의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자식 한두 명쯤은 끝까지 잘 숨겨야 일류 아이돌이지!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며 어떤 괴로운 일이 있어도 무대 위에서 행복하게 노래하는 즐거운 직업이야’
<러브 라이브>나 <아이돌 마스터>의 수많은 소녀들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라는 순수한 의도로 아이돌을 꿈꾸는 데 반해, 호시노 아이의 거짓말은 너무나 뻔뻔하고 당돌합니다. 고로는 그런 아이에 더욱 빠져들게 되고, 그녀의 출산을 직접 맡기로 결심합니다. 드디어 출산의 날, 고로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사생팬에게 살해당합니다.
출산의 순간 살해당한 고로는, 그녀의 아이로 다시 태어납니다. 자녀를 숨긴 채 아이돌 생활을 해야 하는 호시노 아이와 전생이 의사인 사실을 숨긴 채 아기로서 생활해야 하는 호시노 아쿠아의 ‘거짓말’ 생활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최애가 자신의 엄마가 된 행복한 생활에 아쿠아는 자신을 죽여준 사생팬에게 감사할 정도입니다. 저도 여기까지 봤을 때, 이 작품이 명랑 판타지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아이돌 활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돔 공연이 예정된 날, 호시노 아이는 집에 찾아온 사생팬의 칼에 찔려 살해당합니다. 아쿠아는 자신의 눈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최애이자 엄마인 존재를 잃습니다. 그는 슬픔을 억지로 묻어두고, 호시노 아이를 죽게 만든 사람, 사생팬에게 계속 아이의 정보를 흘릴 수 있는 사람, 즉,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내어 복수할 것을 다짐합니다. 아버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예계의 한복판에 들어간 아쿠아는, 연예계의 온갖 추악한 거짓말과 위선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최애의 아이> 1화의 내용입니다. 호시노 아이는 오직 1화에서만 등장합니다.
조건 3) 절정에서의 죽음
호시노 아이가 완벽한 아이돌로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최고의 순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연애 스캔들이든, 사건 사고든, 아니면 단순한 노화든, 어떤 아이돌도 최고의 순간을 영원토록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한때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돌이 점점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하지만 호시노 아이는 최고였던 모습으로만 팬에게 기억됩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호시노 아이는, ‘팬들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하다 보면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제안에 아이돌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팬이 많이 생겨도, 심지어 아이를 낳아도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愛, 일본어로 ‘아이’라고 읽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아이들(아쿠아, 루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진심을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랍니다. 호시노 아이는 아이돌로서 최고의 순간임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사랑을 깨달은 절정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쿠아를 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호시노 아이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한 장의 그림에 들어간 애니메이터의 열정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 커트 코베인, 제프 버클리와 같이 실제 요절한 아티스트의 죽음을 미화하는 것은 왠지 좀 죄책감이 듭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죽음을 마음껏 예쁘게 그려도 되니, 이것도 참 좋습니다.
4) 글로벌 히트곡
완벽한 아이돌의 마지막 조건은 당연히 좋은 노래입니다. <최애의 아이>의 오프닝 곡 ‘아이돌’은 현재 J-POP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는 35일 만에 1억 뷰를 달성하여 기존 J-POP 최단 기록인 62일에서 무려 27일을 단축하였습니다. 작성일 현재 빌보드 재팬 7주째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각종 글로벌 차트에서도 TOP 10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이돌’은 호시노 아이의 성우가 부른 곡이 아니며, 일본의 유명 일렉트로닉 듀오 ‘요아소비’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전적으로 호시노 아이가 화자로 등장하고 있으며, 뮤직비디오 또한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 및 자녀에 대한 사랑을 잘 담고 있습니다. 역시 노래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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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의 아이>는 호시노 아이의 당찬 이미지로 홍보하고 있지만, 사실 그 이미지들이 아름다울수록 더 슬픈 울림을 줍니다. 최애이자, 엄마였던 최고의 존재를 ‘상실’한 사람들의 삶이 이 작품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쌍둥이 오빠 아쿠아는 아이를 죽게 만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죽이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쌍둥이 동생 루비는 엄마를 이어 아이돌이 되기만을 꿈꿉니다. 아쿠아는 연예계에서 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나지만, 호시노 아이와 비교하며 무시해 버립니다. <최애의 아이> 엔딩 크레딧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호시노 아이와의 추억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필자처럼 나이가 들다 보면, 상실과 그에 따르는 추억의 아픔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 누군가를 최애로 삼거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 상실의 기억마저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매력을 가진 아이돌을, 다시 한번 기다려봅니다.
내가 목숨을 걸어주니까, 건네주니까.. 넌 시간을 주었던 거겠지
온갖 소망을 전부 이루게 되면, 아아 이뤄낸다면, 널 만나고 싶어
(<최애의 아이> 엔딩 크레딧 OST 「메피스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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