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이야기] 내가 여여 커플을 응원할리 없잖아,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 - 취향의 한쪽 끝, 백합 장르 입문기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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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는 글로벌에서도, 한국 로컬에서도 마이너한 취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 한국을 넘어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도 <귀멸의 칼날>에 이어, <체인소맨>이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인싸들의 장소인 홍대 거리에 오타쿠 굿즈샵이나 리셀링샵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디바이스), OTT(플랫폼)처럼 개인화된 미디어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개인적인 취향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일반적인 대중보다 특수화된 취향을 공략해야, 돈이 됩니다. 오타쿠도 이제 나름 떳떳한 취향이 되었습니다.

 

오타쿠 문화의 변천사를 분석한 영상. ‘너 그런 거 보니…?’라는 말을 들으며 상대방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마법을 경험했던 내가 이제 ‘나 이런 것까지 본다!’라는 회사 블로그 칼럼을 쓰고 있다. / 출처: 이종범의 스토리캠프 유튜브

 

여기서마저 삐뚤어지고 싶은 저는, 아직도 떳떳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더 깊숙한 취향을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아키하바라나 이케부쿠로의 오타쿠 샵 가장 구석, 혹은 아예 별도 층으로 분리되어 있는 코너가 있습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아예 발을 들이는 것조차 질색했던 그 코너, 바로 BL과 백합 코너입니다.

 

BL은 Boys Love, 백합은 Girls Love(GL)을 말하며, 둘 다 동성 간의 짙은! 우정이나 사랑을 다루는 장르를 뜻합니다. 이 중에서도 BL은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돌팬 중심으로 유구한 BL문학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자분들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 간의 사랑을 자기 손으로 한 번쯤 그려본 적 있잖아요? 하하

 

반면, 백합은 그 서브서브컬처 중에서도 마이너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합물은 본래 여성 독자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로서는 타깃의 성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타깃이 모호하면, 이벤트나 굿즈 등 2차 판매도 애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성이 작다 보니 주요 작품의 애니메이션 화도 늦게 진행된 편입니다. 하지만 가장 늦게 발생했다는 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백합 장르야말로  인류가 이제야 도달한 궁극의 문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한 커뮤니티의 유저 ID (나 아님)

 

이번 글에서 왜 GL장르를 ‘백합’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백합 장르의 역사나 주요 작품 같은 지루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체인소맨>마저 메이저가 된 이 알다가도 모를 세상에서, 우리를 더 자극해 줄 새로운 감정들만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를 인류 궁극의 문명에 도달하게 만든 백합 커플들을 소개합니다.

 

<내가 연인이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 레나코와 아지사이

 

이 작품은 유쾌한 설정과 준수한 퀄리티로 저를 비롯한 수많은 머글들을 백합에 입문시킨 장본인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허들이 높은 것은 바로 제목입니다. 저희 팀 동료가 최근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을 물어봤을 때, 차마 언급하지 못했던 제목 <내가 연인이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이하 <무리무리>). 인기 유튜버 침착맨 공식 ‘황당한 제목의 라이트 노벨 월드컵 64강’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 작품의 황당한 제목이 오히려 밈화되어서 (※무리가 아니었다?!)를 콘텐츠 제목 뒤에 붙여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도 이제 이 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 출처: 침착맨 유튜브

 

당신이 인류 궁극의 문명을 경험하기 위해 건너야 할 2번째 관문은 오타쿠 느낌을 물씬 풍기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입니다. 인기 애니메이션들이 글로벌로 인기를 끌다 보니, 최근에는 인기 J팝 가수들이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을 맡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방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오프닝 곡들도 제법 많이 보입니다. <무리무리>의 경우, 작품의 정서를 200% 반영하였습니다.   

 

당신이 인류 궁극의 문명에 들어오기 위한 마지막 시험대 / 출처: It's Anime powered by REMOW 유튜브

 

주요 캐릭터의 성별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오타쿠들이 감정이입하기 딱 좋게 만들어진 학원 성장물입니다. 주인공 레나코는 중학교 시절 친구 만들기에 실패하여 아싸로 지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레나코. 결국 학교 최고 인싸들의 그룹에 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혼자 집에 틀어박혀 게임하는 걸 좋아하는 레나코가 인싸들의 텐션에 맞춰 대화를 따라가는 것은 너무나 힘듭니다. 인싸들과의 대화에 지쳐 옥상에서 자유를 만끽하다 학교 최고의 인기녀 마이와 마음을 터 놓게 된 레나코.

 

하지만 절친을 만들겠다는 레나코의 목표는 또 다른 위기를 맞습니다. 마이는 레나코의 절친이 되기보다는, 그녀의 연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무리무리>의 TV판 한글 포스터. 성별만 바꾼다면 <꽃보다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

 

절친이 되고 싶은 레나코와 연인이 되고 싶은 마이의 유쾌한 밀당이 이 이야기의 큰 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나코는 편하게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를 원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마이의 매력에 자주 흔들립니다. 마이의 황당한 요구에 당황할 때마다 앞자리에 앉은 천사 같은 소녀 아지사이와 대화를 하며 힐링을 얻습니다.

 

두 남동생까지 돌보다 지쳐버린, 착하디 착한 아지사이의 가출 여행까지 함께하게 된 레나코. 아지사이 또한 레나코에게 절친 이상의 위안을 얻습니다.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아지사이가 레나코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은 치사량 수준으로 달달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이 장면을 본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니 성별 따위가 뭐가 중요해! 나 이 커플 찬성!!"

 

마이의 지속적인 구애에도 ‘친구가 더 좋아!’라며 거절해왔던 레나코. 하지만 아지사이의 진심을 담은 고백은 본인의 성 정체성까지 잊게 만들어버렸다. / 출처: ANIMAX plus (애니맥스 플러스) 유튜브

 

<이윽고 네가 된다> 유우와 토우코

 

부담 없는 수위와 유쾌한 설정을 가진 <무리무리>로 백합 장르에 입문했다면, 이제 <이윽고 네가 된다>로 백합 장르의 정수를 느낄 차례입니다. <이윽고 네가 된다>는 깔끔한 그림체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백합 장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백합 전문 미디어(!) 유리 나비 백합만화 총선거에서 2017년부터 2020년까지 1위를 차지하여, 4연패를 달성하였습니다. 2018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또한, 지금 봐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이윽고 네가 된다> 애니메이션 대표 이미지. 토우코(좌)와 유우(우). <이윽고 네가 된다>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소녀’ 유우와 ‘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공포를 품고 있는 소녀’ 토우코의 사랑 이야기이다.

 

주인공 유우는 평범한 고등학교 신입생입니다. 또래의 소녀와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중학교 시절 내내 친하게 지내던 남사친의 고백을 거절합니다. 그 모습을 본 학생회의 능력자이자, 유력한 학생회장 후보는 토우코는 유우에게 단번에 반해버립니다. 모든 사람의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죽은 언니의 모습을 억지로 재현하며, 자신의 실체를 혐오하는 토우코.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금 모습을 좋아하니, 변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일종의 강요’입니다. 그래서 토우코는 ‘절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을 원합니다.

 

토우코가 가진 깊은 상처와 이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려는 유우의 모습은 그들의 애매한 관계(선후배이거나, 혹은 연인이거나)와 상관없이 깊은 감동을 줍니다.

 

토우코는 모든 사람 앞에서 완벽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유우는 용기를 내어 마음을 벽을 부수고 토우코에게 다가가려고 한다. 다소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막상 어느 것 하나에 빠져들면 열심히 해내는 유우. 드라마에서 나오는 왕자역할 남자 배우들보다 쿨하고 멋지다. / 출처: <이윽고 네가 된다> 공식 홈페이지

 

이 이야기를 백합 장르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 주변 다양한 여여 커플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사야카는 토우코의 절친으로 항상 토우코의 옆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커플의 방해꾼이 될 수 있는 포지션이지만, 실제로 사야카의 마음을 응원하는 팬들도 매우 많습니다. 여학교 시절, 선배의 구애로 사랑에 눈 뜬 사야카는 토우코를 계속해서 좋아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원하지 않는 토우코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 마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동성을 좋아하고, 그것 때문에 피폐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혐오를 가지게 되는 사야카. 하지만 학교 선생님과 여여 커플로 지내고 있는 커피숍의 멋진 언니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최근 자기 긍정 스토리로 세계를 휩쓴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극복해야 하는 장벽이 연애 상대의 성별이라는 것뿐!

 

<이윽고 네가 된다>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모든 갈등이 해소된 주인공 커플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 앞에 당당히 서서 지금의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사야카의 모습은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 출처: <이윽고 네가 된다> 공식 홈페이지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 세이와 시마코

 

이제 백합 장르의 고전을 경험할 차례입니다. 현대 백합 장르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라이트 노벨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 애니메이션도 4기까지 제작되어 매우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없었다면 백합은 하나의 장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는 미션스쿨 리리안 여학교의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소녀들의 학원 드라마입니다.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의 주역 유미와 사치코. 한국 방영 시에는 ‘고품격 스타일리쉬 학원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는 학생회, 부활동, 친구관계, 학교축제, 졸업/입학 등 평범한 학원물들의 소재를 그대로 다룹니다. 다만, 학교 생활의 나머지 90%라고 할 수 있는 ‘연애’가 빠져있습니다. 그 대신 학교 대대로 내려오는 도제식 선후배 관계 ‘쇠르(자매)’가 그 부분을 대체합니다. 강압적인 규율보다 친밀한 언니-동생 관계를 통해 격식과 예의를 전수하기 때문에, 이 학교의 이야기는 더 풍부해집니다. 보통의 언니-동생보다는 조금 더 동경과 설렘이 가득한 관계. 다양한 등장인물의 언니-동생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감정- 대부분 따뜻함, 때로는 긴장감-이 이 작품을 백합 장르의 고전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는 유미가 처음 사치코의 여동생이 되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미 자신이 여동생을 맞이하기까지, 약 1년 6개월 간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의 오프닝. 곡도 곡이지만, 이 오프닝 앞에 나오는 유미의 대사는 이 작품의 정서를 완벽히 반영한다. “마리아 님의 정원에 모인 소녀들이, 오늘도 천사같이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높은 문을 넘어간다. 정결한 몸과 마음을 감싼 짙은 색의 제복. 스커트의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얀 세일러의 옷깃은 나부끼지 않게, 천천히 걷는 것이 이 곳의 몸가짐. 사립 리리안 여학교. 이곳은 소녀의 정원” / 출처: Pedro Probst 유튜브

 

학생회 ‘산백합회’의 간부, 로사 키넨시스(백장미), 로사 페티다(황장미), 로사 기간티아(홍장미)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언니-동생 관계가 소설로는 37권, 애니메이션으로는 4기 분량으로 펼쳐집니다. 그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커플은 로사 키넨시스(사토 세이)와 그 여동생 (토도 시마코)입니다. 다른 쇠르들과는 좀 다르게 가장 연인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표면 상으로는 선후배로서의 선을 절대 넘지 않고, 주변의 그 누구도 둘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표현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은 채 모호함 속에 피신한 그 불안한 관계. 백합 장르가 가진 치명적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동생 시마코 무릎에 누워 잠든 로사 기간티아(세이)의 일러스트 / 출처: 에펨코리아

 

‘우리들은 만나버린 것이다. 긴 여행의 도중에 같은 나무 그늘을 골라 쉬는 자들처럼, 서로 자신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같이 있을 수 있어. 언젠가 다시 헤어져 여행을 하게 될 것을 알면서 짧은 영혼의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상대와, 뭔가를 주고받기 위해서가 아닌, 뭔가를 원하기 위해서도 아니야, 그저 그곳에 존재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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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써 놓고도 저는 이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낼지 많은 고민이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퀴어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단순히 재미로 퀴어 문화를 즐기는 것이 더 혐오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오히려 철저하게 도식화된 HL(Heterosexual Love - 이성애) 콘텐츠들이 더 지겨운 걸요. 저는 당분간 ‘대지의 아이들 (Children of the earth)’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콘텐츠를 자유롭게 더 즐겨볼 생각입니다. 감히 함께 하시겠습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퀴어 영화 <헤드윅>에 나온 명곡 . 사랑의 기원 이전, 한 몸이었던 여-여 생명체를 ‘대지의 아이들 (Children of the earth)’ 이라고 명명한다. / 출처: 혹시 유튜브

 

김영신의 2D 캐릭터 뽀개기 2025.12

 

Posted by HSAD공식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