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04 : Culture Club - 블록버스터 시대로 접어든 공연예술 문화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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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게! 더 강하게!” - 블록버스터 시대로 접어든 공연예술 문화
 
 
 뮤지컬이 뜬다!
 
이 희 인 대리 | CR1그룹
hilee@lgad.lg.co.kr
 
너무 늑장을 부리는 건 아닐까?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은데 지나치게 여유작작했던 건 아닐까? 그래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인터넷 공연 티켓 예약사이트를 찾은 건 2월 14일 오후. 베케트의 쓸쓸함, 채플린의 애잔함, 톨스토이의 철학을 아우르고 있다는 러시아 광대, 슬라바 플로닌의 <스노우 쇼>의 환상적인 무대를 기대하며 검색어에 적어 넣지만, 결과는 전회 매진. 2월 23일 마지막 공연까지 열흘의 시간이 남아 있건만 LG아트센터의 그 많은 객석이 빈 자리 하나 없이 모두 차버렸단다! 벼르던 공연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실망감도 잠시,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되어 서둘러 새로운 검색어를 적어 넣는다. ‘검색어 : 캣츠.’ 이미 볼 사람은 다 봐서 뉴욕 브로드웨이·런던 웨스트엔드에서조차 막을 내렸다는, 그래서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거라는 ‘위협’ 소구에 진정으로 위협을 느끼며 <캣츠>의 빈 좌석을 훑지만 이럴 수, 이럴 수가! 자리가 없다! 보름도 훨씬 넘게 남은 3월 2일까지, 2,300여 석 위용을 자랑하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 나를 위한 자리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녕 이제 다시는 <캣츠>를 볼 수 없게 된 걸까? 허탈해 할 사이도 없이 퍼뜩 정신을 차려 새로운 검색어를 또 적어 넣는다. 까마득하게 남은 5월, 몇 만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다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화려하게 올려지는 공연 제목을 자못 떨리는 손으로 적어 넣는다. ‘검색어 : 투란도트’…
 
 
공연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하듯 공연 예술이 단순한 문화의 영역을 뛰어넘어 하나의 당당한 산업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대박의 꿈에 부푼 영화의 제작에 투자사와 대기업의 주머니가 열렸듯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해외 뮤지컬과 대형 공연에 투자의 손길이 뻗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좀더 색다른 공연, 좀더 품격 높은 문화 생활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문화 소비자들의 요구가 밑바탕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분야에서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이 그러하였듯이, 공연예술 분야에서 이와 같은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된 작품이 있다. 지난해 우리 무대예술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장 7개월 여에 걸쳐 공연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바로 그것. 보통 5억 원을 밑도는 제작비가 소요된 그 동안의 국내 뮤지컬 제작 관행을 뛰어넘어 110억 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과감하게 투여한 것부터가 무모한 모험이거나 위대한 도박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의 유령>의 유령 같은 행보를 숨죽이며 지켜보았으며, 마침내 이 유령과도 같은 성공에 놀라 움츠렸던 태도를 뒤바꾸기에 이른 것이다.
이 작품은 총 매출 192억 원, 총 관람객 24만 명, 최장기 7개월 공연, 평균 객석점유율 96% 등 하나같이 우리 공연사에 길이 남을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 연 200억 원으로 추산되던 뮤지컬 시장을 400억 원대 규모로 확장시킨 것이 가장 큰 업적으로 남을 만하다. 아울러 9차례에 걸친 배우 공개 오디션, 펀드를 조성해 제작비를 조달하는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시스템 도입 등 공연 제작에 있어서도 <오페라의 유령>이 내디딘 걸음걸이는 가히 기념비적이다.
 
 
또한 이 작품의 성공은 투자사·기업들로 하여금 뮤지컬 같은 대형 공연을 ‘돈이 되는’ 산업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샹들리에가 무대로 곤두박질치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비롯해 뮤지컬의 본고장 뉴욕·런던 등과 비교해 그다지 손색 없는 장엄한 무대를 목도하며 우리 공연문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부심을 느꼈을 터다. 작품만 좋다면 연극 한편에 10여만 원을 호가하는 비용을 아낌없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이른바 ‘공연문화의 명품족’이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 이후 이미 수 년 전 우리나라를 찾은 바 있는 <레미제라블>과 <캣츠> 등이 러브 콜을 받아 다시금 이 땅을 찾았다. 또한 <토요일 밤의 열기> <풀 몬티> <왕과 나> <라이언 킹> <마마 미아> <미스 사이공> 등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굵직한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여러 투자·제작사들에 의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아울러 국내 출연진에 의한 번역 뮤지컬과 순수 국내 창작 뮤지컬도 더불어 호황을 누렸다. 브로드웨이와 동시에 상연된다는 상대적 만족감을 전면에 내세웠던 <유린 타운>을 비롯해 <풋 루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포비든 플래닛> 등 해외 유명 뮤지컬과 <춘향전> <블루 사이공> <로미오와 줄리엣> <몽유도원도> 등 야심에 찬 국내 순수 창작 뮤지컬들이 줄을 이었다. 수 년간 장기 공연된 <지하철 1호선>과 <갬블러> 등은 독일·일본에 역수출되어 큰 박수를 받으며 한국 뮤지컬의 저력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부쩍 성장한 국내 뮤지컬의 질적, 양적 역량도 우리 공연 문화를 바꾸는 하나의 중요한 흐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듯 밝은 전망이 넘쳐나는 뮤지컬 시장에 풀어야 할 과제나 난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 막대한 제작비를 투여해 만든 무대에 비해 공연 일수가 지나치게 짧다는 사실이 가장 큰 숙제인데, 예술의 전당과 정동 등에 뮤지컬만을 전문으로 장기 공연하는 전용극장이 건립되고 있다는 사실은,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한편 미국·영국에 비해 물가가 싼 한국에서, 대체로 높게 책정되는 입장료도 곧 풀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뮤지컬 분야와 마찬가지로 순수 연극계에서도 해외 공연 단체들에 의한 ‘침공’은 이미 일상화된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발(發) 침공이라면 순수 연극무대의 경우 러시아와 동유럽 쪽이 대세를 이룬다. 러시아 극단 데레보의 <신곡>, 러시아 슬라바 플루닌의 <스노우 쇼>, 리투아니아 네크루수스의 <오델로>, 러시아 카마 긴카스의 <검은 수사>, 러시아 유리 부드소프의 <보이체크>까지, 리투아니아·러시아 등의 수식어가 새롭고 품격 있는 공연의 대명사인양, 객석을 채워줄 든든한 보증수표인양 남용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부조리극, 미국 리얼리즘극 등이 쇠잔해진 자리를 대신해 러시아·동구권이 세계 연극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아울러 영미·유럽 연극에 상대적으로 익숙한 관객들에게 낯선 미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들 연극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 연극이 대체로 드라마틱한 내용의 측면에서보다는 미쟝센(mise-en-scene)이나, ‘그림’을 이루는 배우들의 앙상블, 상상을 뛰어넘는 무대장치, 미술 등 주로 시각적 아름다움에 의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현란한 뮤지컬의 성황이라는 현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각적 아름다움이 강화되는 경향과 궤를 같이해 연극의 ‘극적(dramatic)’ 성격이 퇴화되고 있다는 진단은 ‘넌버벌(non-verbal)’의 전성시대라는 또 다른 현상으로도 설명된다. 드라마에 대한 갈증이 영화나 TV에서 충분히 해갈되고 있는 까닭에 굳이 값비싼 연극에 그 매력을 구하지 않는 대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무대에 눈이 가는 한편, 복잡한 대사 없이 춤과 음악, 화려하고도 말초적인 시청각 효과로 가득 찬 넌버벌 무언극들이 관객들의 원초적 욕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 신화를 일군 (주)제미로에 의해 따로 40억 원의 전용극장까지 설립된 오프 브로드웨이 인기 레퍼토리 <델라구아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70여분간의 스탠딩 공연으로, 허공과 벽을 날아다니며 새로움을 갈망하는 젊은 관객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이 기이한 퍼포먼스는 열렬한 성원 속에 장기공연 중에 있다.
한편, 태생이 서민의 음악극이라 할 만한 뮤지컬이 이만큼 귀족화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귀족의 문화를 대표해 온 오페라는 이 땅에서 어떠한 길을 걷고 있을까? 클래식 음악계 최대 베스트셀러인 빅3 테너의 월드컵 공연을 기점으로 클래식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척되면서, 오페라 공연도 이제 소수 엘리트에 의한 범접할 수 없는 고급문화가 아닌, 조금 높은 문화적 욕구를 지닌 대중들이 두루 누릴 수 있는 공연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듯하다. 지난해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가 해외 유명 성악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넓은 객석을 꽉 채운 것을 비롯해 3월에는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가 일본 후지와라 오페라단과 공동으로 제작 공연되며, 역시 해외 성악가들이 참여하는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아이다>도 어김없이 일정이 잡힌 상태다.
무엇보다도 올 공연예술계 최대 이슈가 될 매머드급 오페라 <투란도트>는 근래 변모된 공연 문화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실험의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 <영웅>의 감독 장이머우에 의해 천안문 광장의 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투란도트>의 웅혼한 무대가 상암 월드컵경기장으로 옮겨와 오페라의 대중화를 선언하는 마당이 될 성싶다. VIP석 50만 원, R석 30만 원 등 사상 초유의 입장료로 당당히 ‘명품’ 공연의 면모를 갖추면서도, 많은 대중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월드컵경기장을 무대로 활용함으로써 오페라의 대중적, 상업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효도 선물로 굳건히 자리잡은 악극과 어린이를 위한 아동극,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가족 상설무대, 지하철 무대 등 우리 공연 문화는 세분화된 타깃과 형식, 컨셉트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90년대까지 활발하게 꽃을 피웠던 순수 국내 창작 연극은 새롭고 다양한 공연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전을 금치 못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더 많은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 들였듯이 뮤지컬과 대형 공연들이 당분간 더 많은 문화 소비자들을 화려한 무대 앞으로 불러모을 것은 분명하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