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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 진즈 광고캠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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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통 시슬리 브랜드의 광고캠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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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공격적인 남자를 위한 고탄력 XXX 콘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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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현대사회를 ‘이미지 범람의 시대’라고 부른다. 영화, 텔레비전, 만화, 현란한 광고물 등 온갖 이미지들이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정신을 물들이며,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들을 세뇌하고 유혹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자연환경이나 물질적 환경에서 하나의 ‘이미지 환경’으로 뒤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대두된다. 우리의 삶을 ‘현실 자체가 사라진 현실’로 규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덮어버린 이미지가 갈등과 욕망들로 이루어진 인간 세상을 완벽하게 비현실화했으며, 예전에 그러했듯 믿음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현실이 아니면서 현실인 척 하는’ 이미지가 우리의 삶을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지에 의해 모든 것을 얻고 수정하고 모방·생산하는 것이 가능한 환상 속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주체적 성찰의 기능이 마비된 채 이 세상에 대해 정서적 반응만 보이는 눈먼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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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이 주지 않는 욕구를 충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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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품 자체가 지닌 실질적인 효용과 기능보다 그 상품과 관련된 이미지(브랜드·광고 등)가 중시되고, 소비자는 그 상품을 소비하면서 그 이미지에 의해 연상되는 문화를 즐기고 소비한다는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요즈음의 현상도 기실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그러한 비판에도 상당한 함정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상품의 실질적인 가치에 의해 충족되는 인간의 욕망은 진정한 욕망이고, 상품의 이미지나 브랜드에 의해 충족되는 욕망은 가짜 욕망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그러한 비판이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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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이 하나의 물질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진정성을 보장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재화(財貨)들은 인간의 심층적 욕망의 산물이면서 인간의 심층적 욕망을 채워 줄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것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심층적 욕망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만든 재화도 결국은 인간 욕망의 표현이면서 욕망 충족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 자체가 인간이 창출한 하나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환경인 것이다. 즉, 자연만이 우리의 환경이 아니고, 우리가 창출한 문화도 하나의 환경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다. 인간이 이미지를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 그 이미지가 하나의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게 된 현상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환경 (자연환경을 포함해서)에 또 다른 환경이 덧붙여진 것일 뿐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 욕망에 의해 변형을 겪게 될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품 고유의 기능·효용성과 그 상품의 브랜드·이미지는 서로 존재 양태만 다를 뿐 그 자체로 진정성과 거짓의 단순한 이분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상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 및 이미지·브랜드 자체가 각각 인간들의 심층 욕망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이다.
기업의 이미지, 상품의 이미지는 기업과 상품을 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접하는, 폐기할 수 없는 우리의 환경으로 존재하며, 실제의 기업, 실제의 상품과는 또 다른 위상으로존재한다.
그리고 소비자는 브랜드나 이미지에서 상품에서 찾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찾고, 상품에서 느끼는 욕구 충족과는 다른 욕구 충족을 느낀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기본 생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평화로움, 따뜻함을 전하는 광고와 브랜드에 이끌린다. 몰라서, 속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따뜻함을 갈구하는 욕망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품의 질이 좋다는 단 하나의 내용만으로는 상품이 팔리지 않고(그때는 하나의 브랜드면 충분하리라), 여러 브랜드를 자꾸 창출해 내야만 하는 형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사회가 다원화해 간다는 것의 반영이자 변화 속도의 반영이다.
새로운 브랜드의 출현은 따라서 그 전까지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인간적 욕망의 발현을 정확하게 반영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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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의 차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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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인간의 심층 욕망과의 관련하에서 볼 때 상품 자체보다 그 상품에 대한 이미지가 맡고 있는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상품이란,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윤 추구를 위해 생산해낸 것이고 소비자에게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지만, 이미지는 그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며 그 이상의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미지는 상품이 갖고 있는 본래의 목표를 가리거나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 자체와 함께 나가며 다른 욕망을 충족시킨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이윤 추구라는 경제원칙으로 어느 정도 획일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도적 인식 구조이인데, 그렇게 획일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가치를 내면으로 갈구한다. 그때 상품의 브랜드와 이미지가 전해주는 의미는, 어찌보면 상품 자체와는 독립된, 심한 경우에는 상품 자체의 의미와는 대립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소비자는 브랜드가 지니고 있는 의미 자체를 소비하면서 획일화되었거나 억압적인 지배 구조에 저항하거나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숨구멍을 마련한다. 즉, 상품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그 실용성·효용성이지만, 상품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상품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의 독자적인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업 이미지, 브랜드 이미지, 광고에서의 이미지에 대한 판단을 반드시 상품과 이미지와의 관련하에서만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상품은 진짜고 이미지는 가짜인 것이 아니라, 다만 상품은 상품대로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으며, 상품의 이미지는 나름대로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미지 소비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어떤 이미지를 소비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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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하자. 좋은 이미지란 인간의 심층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미지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의미는 바로 그 인간의 심층 욕구이다. 인간에게 언제나 감추어진 심층적 욕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욕구 자체가 다원적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다양성, 사회의 다양성은 그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에 담겨 있는 마음, 정신, 욕구들 사이에 존재한다.
예컨대, 요즘처럼 현란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그 겉모양의 다양함 자체가 곧 인간 욕구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단순해지고 게을러지고 느려지려는 욕망이 고개를 드는 게 인간이며, 그렇게 억압된 욕망을 충족시켜줄 대상을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생명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언제나 불완전하기에 그 다양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없다. 또한 하나의 사회는 반드시 지배적 가치, 지배적 인식 체계 및 그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심층적 욕망의 겹구조로 되어 있게 마련이며, 따라서 좋은 이미지란 바로 그 억압되어 있는 심층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숨구멍 역할을 해주는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나쁜 이미지는 당연히 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그대로 순응적으로 반영하는 이미지이다. 경제원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은 으레 그러한 경제적 욕망만을 지니고 있으리라 간주하고 그 욕망에 호소하겠다는 의도하에 만들어진 이미지는 나쁜 이미지이면서 생명력이 길 수 없는 이미지이다.
인간 내면에는 육식동물로서의 공격적인 본능, 채식동물로서의 평화적 본능이 공존하고 있으며, 산을 정복해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욕망, 한없이 상승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하면, 조용한 곳에서 안온함을 느끼고 싶은 욕망, 포근하고 따뜻한 곳에 웅크리고 싶은 욕망도 있다. 건강한 개인, 건강한 사회란 그런 다원적인 욕망들이 비교적 균형을 취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한 사회가 건강하지 못할 때 그 다원적 욕망 중의 어느 부분은 그 충족 대상을 찾지 못하고 인간의 심층 무의식 속으로 숨어든다. 이에 나쁜 이미지는 그 심층 무의식으로 숨어든 욕망을 더 억압하면서 지배적 가치, 지배적 힘의 강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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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의미’ 를 소비하는 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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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중이 상품의 실질적인 가치와 상관없는 브랜드, 이미지에 열광하는 현상을 단순히 기만적인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속아 넘어가는 현상만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대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수동적인 기계가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또 ‘이미지의 의미’를 소비하면서, 이미지가 전하는 의미와 소통하면서 그들의 억압되어 있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 현상은 가짜 만족도 아니고 자기 기만도 아니며, 내면의 건강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엄연한 생명 현상이다.
따라서 나쁜 이미지는 대중을 일시적으로 현혹시킬 수 있을지를 모르지만, 그것이 대중의 심층 욕구와 닿아 있지 못하기에 그 생명력이 길 수가 없다. 결국 좋은 이미지, 생명력이 긴 이미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이미지를 생산하여 그 의미로 대중 소비자와 소통하려면, 대중들에게 숨어 있는 욕구, 한 사회에서 결여되어 있는 가치, 현 사회의 틀 속에서 제대로 표현 방법을 찾지 못한 욕망이 무엇인가를 탐색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은 상품 뿐만이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 및 각 상품의 이미지들도 생산해낸다. 이에 기업의 컨셉트를 축약해 보여주는 것이 기업 이미지라고 할 때, 그것은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여러 상품의 이미지들(브랜드·광고)의 모태(母胎) 이미지가 되어야 한다. 즉, 기업의 이미지는 각종 브랜드들의 종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기업의 이미지는 변화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 인간의 다양한 심층적 욕구들을 가능하면 모두 담을 수 있는 크고 깊은 이미지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상품의 브랜드가 기업 이미지와 상충된다거나, 효용성 높은 새 브랜드의 출현 때문에 기업 자체의 이미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은 모태 이미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각각의 브랜드는 다양한 심층적 욕망의 변화를 반영하고, 기업의 이미지는 그 가능성들을 수용하는 크고 깊은 그릇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큰 이미지(어느 정도 불변적인), 작은 이미지들은 모두 대중의 숨어 있는 깊은 욕망과 소통한다.
결론적으로 좋은 이미지, 생명력 있는 이미지 생산에 선행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가변적인 사회의 표면적 변화를 뒤쫓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심층 욕망, 그 다원적 욕망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가를 탐구하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한 탐구를 통해 생산되는 이미지는 한 사회의 억압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숨구멍의 구실을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기업 자체의 생명력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