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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라는 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내 자신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신나고 즐거운 선택. 하지만 그 즐거운 순간은 감나무 아래에 누워 열매가 입에 떨어지길 기다려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직접 감나무를 심고 키워 만들어내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해진 날에만 집중적으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짧지만 집중적으로 아이디어를 짜는 것이다. 내가 처음 사람들이 함께 보는 ‘만화’를 그린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일본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 볼>이라는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나는 바로 이 작품을 패러디한 <곤드래 볼>이라는 만화를 싸구려 연습장에 얼기설기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누구의 부탁을 받아 그린 것도 아니고, 그렸다고 해서 일정 대가를 받는 일도 아니었다. 그냥, 단지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렸다. 처음 두세 페이지 정도 그릴 때까지는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조금씩 페이지가 늘어가면서 나의 짝, 뒷자리의 친구, 혹은 1번부터 54번까지 우리 반 아이들이 이 작품의 독자가 되었고, <곤드래 볼>은 그렇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의 연습장은 우리 반을 넘어 옆 반으로, 그리고 그 옆 반으로 넘어가기 시작해 결국 학년 전체를 돌며 아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내 연습장이 걸레짝이 되는 걸 감수해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작품이라고 말할 수준의 만화는 아니었지만 내가 만든 창작물을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하고 더 원하며 호응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짜릿한 흥분이자 좀 더 작업에 몰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작업에서든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가 아닐까 싶다. 독자(소비자)의 호응.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 신바람이야말로 내 자신을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촉매제였기 때문이다. ‘날 잡아서’ 아이디어 집중 캐치 하지만 프로 만화가로 나서면서 양상은 조금 달라졌다. 그저 독자가 기뻐하고 그로 인해 보람을 얻는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말 그대로 동화일 뿐, 프로인 이상 나는 일주일에 정해진 편수의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정선 이상의 재미를 제공해 줘야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특히 개그만화)를 연재한다는 것은 매일매일 줄타기를 하며 사는 것과 비슷하다. 내 아이디어가 조금이라도 독자의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인터넷 만화의 특성상 곧바로 피드백이 오기에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고를 완성하기 직전까지 최선의 아이디어를 작품에 담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24시간 내내 줄타기를 하면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신도 인간에게 6일 일하면 하루는 쉬게 해주지 않았던가.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아이디어를 위한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겉으로 봤을 땐 마치 별 일 아닌 듯 보이지만 상상 이상의 중노동이다. 밥을 먹을 때도 차를 마실 때도 샤워를 할 때도 TV를 볼 때에도 한쪽 머리로는 일을 하고 있음을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꽤 많은 개그만화 작가들이 몇 년 이상 연재를 지속시키지 못하고 결국 자의로 줄에서 내려오거나 떨어지는 운명에 처했다. 아이디어의 샘은, 그렇게 계속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퍼내기만 하면 금세 바닥을 드러내버린다.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해진 날에만 집중적으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짧지만 집중적으로 아이디어를 짜는 것이다. 이성을 유혹하는 마음으로 해보자 처음에는 이런 공장 같은 프로세스로 아이디어를 짜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실제로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정해진 시간 안에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게 가능하다지만, 바이오리듬이 안 좋을 때도 있고, 개인의 심경적인 문제로 개그 아이디어를 떠올릴 만한 상태가 아닐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정해진 작품을 뽑아내야 하는 ‘같은 운명’에 놓인 몇몇 작가들이 정해진 시간에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일주일 간 그려낼 아이디어를 털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다보면 분명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대폭 상승한다. 나는 이처럼 정해진 틀 안에서 아이디어를 짜고, 꾸준히 작업을 해왔기에 그나마 이만큼 연재를 해오며 큰 기복 없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어찌되었든 승자는, 늘 이 아이디어 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작가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으로 만화를 그리느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성을 유혹하는 마음으로 원고를 한다’고. 상상해보자. 내 눈 앞에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그녀가 있다. 그녀의 호감을 사고 싶다. 그러려면 나는 이제부터 그녀로 하여금 5분에 한 번씩 고개가 뒤로 넘어갈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목숨을 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그 소재가 고루하거나 유치하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작은 디테일이 큰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진솔하고 솔직한 내 마음이 거짓 이야기나 나와 관계없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녀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아이디어라는 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내 자신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신나고 즐거운 선택. 하지만 그 즐거운 순간은 감나무 아래에 누워 열매가 입에 떨어지길 기다려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직접 감나무를 심고 키워 만들어내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치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감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커피숍에 앉아 다른 작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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