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氏와 브랜드君
제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제 자랑 같아 말씀드리기 쑥스럽지만, 그 녀석 얘기 좀 해보겠습니다. 이 아이는 왼손으로 연필을 겨우 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까지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립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던지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몇 끼를 굶은 사람이 급히 빵을 먹는 것처럼 정말 허겁지겁, 쓱쓱 그려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유 한 모금을 들이킵니다.
이런 아들 녀석은 물론 저의 DNA를 물려받았겠지요. 매 순간순간마다 뭐든 그려내고 싶어 하는 모습은 제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팔불출이라 웃으시겠지만, 사실 이 녀석은 음악적 재능 또한 타고난 것 같아서 피아노학원에도 몇 달 보내 본 적이 있습니다.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잘할 것 같았지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두 달을 채 못 넘기고 싫증을 내더군요. 제 아들에겐 ‘그림’이 제1의 적성인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느 부모와는 자식교육을 차별화하겠노라 다짐한 저희 부부는, 물론 많은 학습지 광고에서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재능을 확실히!’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전문적인 미술학원을 찾아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미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향후 세계적인 화가로 촉망 받을(우선, 우리 동네에서) 아이로 포지셔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미술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인정 받은 아들이 한번은 제 친구 내외와 함께한 가족모임자리에서 팝송 한 곡을 멋들어지게 뽑은 적이 있습니다.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더니 노래도, 영어도 참 잘하는구나!”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지요. 하나의 차별된 이미지가 확고한 아들에게 그 이외의 자잘한 장기들은 기존 이미지에 카니발리즘(Cannibalism)으로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해 주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뜬금없이 웬 아들자랑이냐고요?
저는 여러분께 광고주와 마케터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브랜드’와 ‘크리에이티브’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아들 녀석 자랑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차차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늘 아래 재능 없는 브랜드는 없나니’, 제 아들도 그랬지만, 요즘 세상에 태어나면서 한 가지 재능(USP)만 가졌다고 하는 브랜드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 브랜드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적어도 10개 이상, 많게는 몇 십 개의 기능과 장점, 자랑하고 싶은 신개념들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한 열성 학부모와 같은 관심과 열정으로 이 브랜드를 무럭무럭 키우겠다고 다짐한 광고주의 눈에, 천부적인 재능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브랜드’라는 녀석은 크게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크리에이터들에게 당당하게 보내집니다.
“크리에이터氏, 이렇게 끼 많은 저희 브랜드君은 어마어마한 재능(USP)을 타고난 것만 같은데…. 아직 안 시켜봐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뭐라도 될 놈이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이것저것 다 시켜보고 싶습니다! 어떨까요?” 이럴 때 크리에이터가 해야 할 역할은 광고주의 기대에 부응해 브랜드君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장점 중 제1의 적성을 발견하여 전문교육을 통해 세계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재능 배양을 뒷받침해주는, 자식 키우는 부모의 그것과 다름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크리에이터로서의 생활을 돌아보면 ‘단순히 오뉴월 청개구리 튀듯 폴짝폴짝 튀는 크리에이티브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닌지, 광고주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왔다갔다 갈피를 못 잡으며 애꿎은 브랜드君을 미술학원에 보냈다가 피아노학원에 보냈다가 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요즘은 ‘길을 걸으면 발에 채는 게 브랜드’인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슷비슷한 끼와 재능을 가진 수많은 브랜드가 있는 경쟁시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일단 눈에 띄도록 하는 것에 바쁩니다. 그것이 차별화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남들보다 더, 더, 눈에 띄도록 통통 튀어봅니다. 일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수십억에서 수백억까지도 기꺼이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응당 광고주의 마음일 터입니다. 따라서 타 브랜드와의 차별화가 가능할 것 같다 싶은 자극적인 크리에티브야말로 광고주들에게 그 중요도가 커져 가는 부분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브랜드에 대한 진정한 애정 없이 크리에이티브에만 애정을 쏟아 부어 소비자들에게 시각적인 자극만 준 광고로 브랜드를 위해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한다면 과연 크리에이터로서 당당할 수 있을까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전문적인 학원에 보내는 과감한 투자를 했지만 값비싼 학원에 다닌다는 것만 사람들에게 알렸을 뿐, 아이가 가진 엄청난 재능과 실력은 전혀 알리지 못한 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광고인들 사이에 여전히 ‘광고가 시각적인 자극을 준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모바일·온라인·OOH 등의 수단을 통해 소비자들이 손쉽게 참여하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통상적인 지금 세상에서 아직도 그런 말이 설득력을 지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브랜드 앞에 장사(壯士) 없다
‘광고는 튀었는데, 그게 무슨 브랜드였지?’ ‘그 왜 있잖아, 누구누구 나오는 TV광고, 몰라?’ ‘왜 그거, 쿵~하고 그거 웃기던데… 제품명이 뭐였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야심만만 광고를 준비하고 몇 날 며칠 밤을 새어 만든 사람이나, 그런 광고에 적잖이 많은 돈을 투자하며 기대했던 광고주에게 이토록 치명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하루에도 10편 이상의 TV광고가 온에어되고 있는 터라 튀게 만든다고 만들었지만 브랜드명조차 남기지 못하는 광고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비자로 하여금 브랜드명도 기억에 남기지 못한 광고가 브랜드의 충성도와 브랜드 에쿼티를 올려야 하지 않느냐 운운하는 것은, 마치 갓 태어나서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어서 결혼해 손자를 보자는 성급한 부모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브랜드가 태어나고 브랜딩을 시작함에 있어 이것저것 아무리 욕심나는 게 많더라도 최우선으로는 크리에이티브 속에 브랜드명이 잘 녹아든 광고물을 제작하고, 매체비용이 닿는 데까지 지속적인 브랜드의 노출을 시도해 브랜드 존재에 대한 인지도부터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기반을 다진 후에 브랜드의 자산을 논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어필하는 데에도 욕심을 내면서 브랜드의 충성도를 올려주는 굳히기 광고<광고 1, 2, 3>를 지속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것을, 모를 리가 없는 데 말입니다. 잘 알지만 ‘일단 튀고 보자’는 생각에 목숨 걸다가 눈에 뭐가 씌운 건 아닌지, 크리에이티브를 전개하는 순서나 범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초보자도, 베테랑도 그런 순간에는 새까맣게 잊고 넘어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니다.
브랜드의 확장이 크리에이티브의 답인가?
광고 아이디어로 고민하다 보면 나름 많은 비용을 쏟아 부으며 커뮤니케이션을 해왔지만 브랜드 인지도나 충성도가 가파른 상승을 보이지 못하고 평범한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브랜드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크리에이터들에게는 새롭고 차별될 만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난 이슈도 찾아보기 힘든 이런 브랜드를 광고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차별된 크리에이티브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대안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아직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브랜드를 확장하겠다며 ‘브랜드 확장’을 시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른 제품으로의 확장이 아니라 기존의 브랜드에 새로운 ‘펫네임(Pet Name)’을 붙여 그에 맞춘 새로운 광고를 만드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브랜드의 확장이란 자고로 엄청난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시도할 경우에 한해 그 결과로 이미지 업그레이드나 제품 확장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겠으나<광고 4>, 브랜드 파워가 미비한 상태에서는 그나마 가진 브랜드 이미지마저 카니발리즘에 의해 손상을 입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예전에는 필자를 포함한 많은 크리에이터들과 AE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매일 함께 사는 어린 아들의 재능이나 장래에 대한 것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서 시켜보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사교육에 앞장서는 부모들의 오판 같기도 합니다.
위의 두 가지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던 때에 필자가 경험했던 실수(실수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잘못)를 예로 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브랜드 이미지라는 것이 광고 하나로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비용적인 부분을 본다면 광고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Brand Solution Company’를 지향하는 우리 LG애드의 크리에이터들에게는 브랜드를 위하여, 마치 자식의 장래를 위해 고민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에게 우유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주면서 사랑을 베푸는 역할까지 담당할 임무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크리에이터들은 앞으로 제3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브랜드와 더욱 밀착되어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크리에이터로 살아오면서 맞닥뜨렸던 실수와 경험에 관해 서로 공유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적어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결코 정답일수가 없는, 한 작은 크리에이터의 생각일 뿐이며, 다른 많은 크리에이터들의 이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터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브랜드’란, 그리고 ‘크리에이티브’란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임을 알아주시고, 용어나 내용에 있어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