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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 속의 초발심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초발심(初發心)’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흔히 ‘초심’이란 말이 더 자주 쓰이지만, ‘초발심’이라고 말하는 쪽이 더 깊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연초에 아이와 함께 고즈넉한 산사를 찾았다가, 신년을 맞아 천왕문 편액 아래 걸어둔 플래카드에서 ‘초발심’이란 문구를 보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광고를 보고 왜 그때 가슴이 두근거리며 열광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20여 년도 훨씬 지난 위스키 광고입니다<광고 1>. 네모난 지구본 옆에 양주를 배치하고 있는 단순한 구성입니다. 짝을 이루는 다른 광고도, 네모난 자전거 바퀴에 역시 제품을 나란히 배치한 단순한 크리에이티브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둥근 편이 낫다. 더러는 네모난 게 좋다.’ 대략 이런 카피의 위스키 광고가 광고 초년생의 가슴에 묘한 흥분을 일으켰던 기억이 납니다. 네모난 지구본에 네모난 자전거 바퀴라. 지금 보면 참 유치하고 진부하기 그지없는 발상입니다. 한데 이 광고의 무엇이 그때 가슴을 설레게 했던가?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네모난 제품 용기에 집중하여 다른 사물들의 형태를 뒤집는 발상, 거기에 심플하게 구성된 카피의 배치에 마음이 끌렸던 것일까요? 한때 사무실 책상머리에 붙여 두거나, 자주 꺼내 보는 자료파일 속에 스크랩해 두었던 광고입니다<광고 2>. 우선 광고의 사이즈가 독특합니다. 신문 사이즈로 2단, 3단 정도의 비례라고 할까요? 가로로 길게 늘어진 지면마다 한 귀퉁이에 무언가 사물의 일부분들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색소폰의 마우스피스와 둥근 목 부분인 것 같고, 다음은 바이올린 조율부의 맨 끄트머리인 듯하며, 커다란 공장의 파이프라인처럼 보이는 사진 역시 이내 금관악기의 한 부분임을 알게 하며, 마지막은 하프의 우아한 곡선처럼 보입니다. 사물(악기들)의 일부분을 저렇게 잘라 내거나 다른 각도에서 보니 참으로 뜻밖의 아름다운 형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GRACE’란 카피가 붙은 색소폰 2대의 모습은 ‘우아’한 백조 한 쌍을 은유하고 있고, ‘PEACE’라는 카피에는 지면 밖으로 느릿하게 달아나는 ‘평화’롭고 한적한 달팽이의 모습, 그리고 뭔가 ‘힘’이 느껴지는 공장 모양의 금관 악기에는 ‘POWER’라는 카피, 마지막으로 짜릿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롤러코스터 모양의 하프 곡선에는 ‘EXHILARATION’이라는 카피가 붙어 있습니다. 클래식을 전문으로 하는 FM 라디오 채널의 광고입니다. 악기들의 조화로 자아내는 음악의 아름다움이 바로 우아하거나 박력 있거나 평화롭거나 들뜨게 만들거나, 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새로운 초발심 아트디렉터로서, 고등학교 입시 때부터 매달린 것이 형태와 컬러, 조화와 대립 같은 디자인의 원칙들인데, 정작 광고장이가 되고도 한참을 오로지 디자인에만 눈이 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카피는 카피라이터가 알아서 잘 하면 되는 것이고, 카피라이터가 끼적인 글에 멋진 이미지나 잘 붙여주면 되는 거지, 하던 안일한 생각이 바뀐 것은 몇몇 마음을 움직인 카피 위주의 광고들이었습니다. 디자인의 힘만으로는 표현해낼 길이 없는, 사람살이의 공감이나 통찰력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던 카피들. 그런 카피의 광고를 만나면 카피라이터가 하는 일이 더 훌륭하고 대단한 일처럼 보여 샘이 나기도 합니다. 눈에 익은, 유명한 소니의 기업광고입니다<광고 4>. 흑백으로 찍은 사진들의 느낌과 인상이 참 깊습니다. 형제처럼 보이는 두 사내아이가 찍힌 사진에 다음과 같은 카피가 붙어있습니다. ‘그들의 할아버지는 장난감 트럭을 갖고 다퉜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전지 기차를 갖고 다퉜습니다. 그들은 리모컨을 갖고 다툽니다. 그들의 아이들은 뭘 갖고 다투게 될까요?” 3대를 이어온 가족사의 풍경 속에 소니의 제품이 늘 함께 하고 있음을 멋진 감성적 카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앙증맞은 여자 아이들의 사진에도 비슷한 포맷의 카피가 이어집니다. ’그들의 증조모는 트랜지스터라디오 앞에서 첫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의 할머니는 흑백텔레비전 앞에서 첫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카스테레오 앞에서 첫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의 첫 키스는 어느 것 앞에서 하게 될까요?” 디자인적인 표현에 몰두하던 시절, 그리고 위대한 카피 한 줄의 힘을 맹신하던 시절을 지나 요즘엔 다시 진실과 공감을 주는 힘 있는 이미지의 광고에 끌리는 편입니다. 바야흐로 사진과 회화, 이미지의 시대여서 수많은 전시회와 사진전들이 소비자들의 심미안을 높여놓고 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10년 전, 20년 전 해외광고잡지를 뒤적이니 무척 감회가 새롭습니다. 새로움만이 지고(至高)의 선(善)인 까닭에 새로운 기법, 새로운 소재의 새로운 광고들만이 생명력을 얻고, 지나간 광고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재빠르게 포맷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광고만의 당연한 생리이자 존재 방식이겠지요. 하지만 오래 전 광고들을 뒤적여보고, 때로 그 광고들과 처음 대면했던 가슴 뭉클했던 순간이나 놀람의 구체적인 정황들을 더듬어 보는 것도 그저 부질없는 짓만은 아닐 듯싶습니다. 내 마음에 빛을 주었던 광고들, 이 일에 한평생은 아니더라도 젊은 날을 바쳐도 좋겠다고 희망을 주었던 광고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은 썩 유쾌하고 즐거운 추억의 여행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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