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1-02 : Culture Club - 스테이지에서 스크린으로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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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Club - 스테이지에서 스크린으로
 
  상상이 던지는 지적 만족의 미학  
정 성 욱 | 영상사업팀 대리
swchung@lgad.co.kr

올 겨울 성수기를 가장 달궈놓은 영화는 누가 뭐래도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였다. 많은 호사가들과 박스 오피스 기자들이 흥행작으로 예측했던 국내외 여러 대작들을 우습게 제치고, 2006년 1월 말 현재 800만 관객을 넘기고 더 큰 목표를 향해 순항중이다. 이준기의 ‘꽃스런’ 외모부터, 의상이나 배경 등의 충실한 시각적 요소, 이병우가 뽑아낸 걸출한 사운드 트랙, 그리고 심지어는 제작예산의 현명한 집행까지 이 영화는 ‘성공’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많은 미덕들을 지니고 있다. 그 장점들 중의 하나는 ‘탄탄한 원작’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이(爾)>는 2000년에 초연되어 각종 상을 휩쓴 화제작이다. 2001년 이 연극에 매료된 개그맨 전유성이 후배 개그맨들의 관람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고 자신이 공연판권을 사서 하얏트 호텔에서의 공연까지 기획했다는 에피소드는 이 작품의 위력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알려주마”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예술이 스크린으로 옮겨가 성공한 경우는 꽤 많다. 한국영화에서는 <라이어>나 <살인의 추억>이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오래전 해외에서도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오페라의 유령> 같은 대표적인 뮤지컬 역시 영화화의 수순을 밟았다. 연극무대와 영화를 오가며 하나의 작품을 두 가지 포맷으로 공개하는 장진 감독 같은 케이스 역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는 애당초 영화화를 목표에 두고 연극무대에 시험 삼아 먼저 올려보는 시도 역시 종종 일어난다. 어쩌면 현재 대학로에서 상연중인 연극 중에 몇 년 후의 ‘대박 영화’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요즘 영화 제작자들에겐 당연한 ‘학습효과’일 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와 연극 <이>의 동반 성공에서 보이는 영화와 연극의 상호 상승효과는, 어쩌면 ‘모든 것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정보중독증을 보이는 새로운 시대의 관객들의 성향에 어필한 케이스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접점에서 점점 더 많은 사업모델들이 생겨날 가능성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좋은 번역이 원어와 번역어에 대한 동일한 이해, 어쩌면 원어보다도 번역어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근본으로 하듯, 좋은 각색 역시 원작에 대한 이해보다 각색되는 장르에 대한 이해를 더 필요로 한다. <왕의 남자> 역시 더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원작이 지니고 있는 권력에 대한 풍자나 성찰을 과감히 접고 좀더 간결한, ‘광대 예찬’이라는 주제를 선택해 역동적이면서도 단순한 내러티브로 전개했다. 그리고 연극이 보여주지 못하는 각종 곡예적인(Acrobatic) ‘놀이’ 장면을 재현하는 등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충분히 살렸다. 장르 간의 근본적인 표현방식 차이나 관객의 성격, 혹은 시장상황 등을 살펴보고 고민한 결과가 좋은 각색을 만들어낸다. 단지 그냥 그대로 옮기는 것은 ‘원칙에 충실했다’는 게으른 자부심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완성물은 원작의 ‘참고서’에 불과하다. 이에 참고서가 되기를 거부한 몇 작품을 소개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1996) - 바즈 루어만 감독, 리어나도 디카프리오, 클레어 데인즈 주연
많은 평론가들이 ‘MTV적 감성’이라는 식으로 폄하했지만, 그 평론가들이 성전처럼 떠받드는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68년 작보다는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단검(Dagger)’ 같은 옛날 무기의 이름을 가진 권총들이나, 요정의 역할을 하는 환각제, 내레이터의 존재를 대신하는 TV 앵커맨 등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살리면서 현실 배경의 장면과 맞물릴 수 있도록 고안된 여러 가지 디테일은 상당히 재치 있다.






<시카고> (2002) - 롭 마샬 감독,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처드 기어 주연
원래 연극이었다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다시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다가 또 다시 뮤지컬영화가 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원작은 ‘쇼에 관한 쇼’라는 ‘메타 픽션’적인 성격이 점점 짙어졌다. 이러한 원작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감독은 현실과 무대를 오가는 연출 테크닉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모든 노래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표현방식은 현실적 연출이 사건을 묘사하는 데 쓰이고, 무대의 장면은 사건의 본질과 주인공들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독특한 효과를 거둔다. 그 한 예가 변호사 빌리 플린이 나이트클럽의 코러스걸인 록시 하트를 내세워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 현실에서는 법원 계단에서 기자들이 록시에게 몰려와 인터뷰하는 평범한 장면이지만, 장면이 무대로 전환되면 록시는 빌리라는 복화술사(腹話術師)에게 조종당하는 인형에 불과하고, 기자들 역시 줄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원작 뮤지컬이 화려한 무대와 공연진의 존재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면, 영화화된 이 작품은 풍부한 구조의 텍스추어로 관객들에게 지적 만족을 선사한다.

<란> (1985)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데라오 아키라, 네즈 진파치 주연
<맥베스>를 각색한 57년 작 <거미집의 성> 이후 구로사와 감독은 자신의 원숙기에 또 하나의 셰익스피어 작품인 <리어왕>을 각색한다. 원작이 주는 처절한 인간 드라마를 일본 전국시대로 무대를 옮겨 만든 이 영화는 단지 배경만 그럴 듯하게 옮겨 놓은 것이 아니다. ‘일본 감독이라서 일본으로 배경을 삼았다’가 아니라, ‘리어왕이라는 내러티브에 가장 잘 맞는 시대가 전국시대라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작보다도 훨씬 더 신빙성 있는 설정이 돋보인다. 원작이 지니는 배신의 모티브가 불완전하고 사악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움직였다면, <란>에서는 전란의 시대에 휩쓸려 가는 인간의 무력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특히 원작의 코델리아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셋째 아들 사부로의 캐릭터는 코델리아가 전달하지 못했던 ‘거역’의 당위성을 아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결과적으로 원작이 주는 ‘인생무상’에 대한 정서를 훨씬 무게 있게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