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08 : 광고세상 보기 - 草綠同色? 啞然失色!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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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綠同色? 啞然失色!  
박 윤 석 | 광고정보 기자
panda@kobaco.co.kr
 
실종된 도박사들, 튀지 않는 광고들

<조스>와 <ET>를 들고서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최근의 할리우드를 바라보며 이렇게 개탄했다고 한다. “그 위대했던 도박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말은, 어떻게 해서든 본전은 지켜야 한다는 판단 하에 가장 안전한 원작을 찾고, 속편에 기대고, 성공한 작품을 분석해서 그 규칙 안에서 무한 자기복제만을 시도하는 거대 자본의 시대에 대한 분노의 일갈이리라.
영화와 광고는 다르다. 그러나 두 가지는 같다. 한 가지는 ‘봐주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이 깊은 철학을 담아 찍었다는 고고한 예술영화라 하더라도 그 영화를 찾는, 이른바 ‘시네필’들이 있어 봐주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관객을 외면하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춘수 시인이 멋있는 한 마디 해주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물며 광고에 이르러서야 봐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남과 분간해서 나를 봐주는 시선은 그야말로 광고가 태어난 이유이다.
다른 한 가지는, ‘하이 리스크(High Risk), 하이 리턴(High Return)’이라는 규칙이다. 주목받으려면 남들과 다르게 보여야 하고, 튀기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니까. 스필버그의 탄식은 이 두 번째 규칙을 깔보는 풍토에 관한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언제나 안전하게 검증된 밥상만 차려진다. 튀지 못해서 새로운 시장도 만들지 못하고 큰 이득도 낳지 못하지만, 적어도 당장 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발명과 발견들은 당시에는 무수히 반복되던 어리석은 실패의 일부였다. 광고 역시 예외일 수 있겠는가?

방어적 광고 집행, 따라하기의 함정

한국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가장 큰 문제는 광고주 상호 간의 지나친 동질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같은 업종의 비슷한 경쟁자가 이런 마케팅을 하면 자기도 해야 하고, 저런 광고를 하면 자기도 해야 한다. 상대가 유머광고로 치고 나오면 나도 유머로 맞불을 놓아야 하고, 상대가 액티브한 젊은이들의 파티문화를 들고 나오면 나 역시 젊은이들의 트렌디한 화면으로 맞서야 한다. 휴대폰 광고 그랬고 맥주 광고가 그랬다. 이러다 보니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건 어느 브랜드의 광고가 아니라 어느 업종의 광고이다. “그 OO브랜드 광고 모델 누구지?”가 아니라 “맥주광고 나오는 걔 있잖아”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에서는 광고는 공격이 아니라 철저히 방어를 위한 수단이 된다. 광고를 집행하는 이유가 오직 상대가 하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자기 색깔 없이, 그저 질 수는 없다는 오기의 철학들이 담긴 유사 광고들은 대개 광고 한 편 보고 제품 구매하기는 어려운 고관여 제품들에서 특히 많이 쏟아진다. 가끔씩 예외가 있지만 예외란 건 말 그대로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최근에 방영된 아파트 광고 모델들을 대라고 하면 상당수가 이영애·이미연·유호정·김남주·김희선·채시라·김정은 같은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모델들과 그가 광고하는 브랜드를 정확히 매치시킬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심각한 고민과 주위의 의견 수렴 없이 정확하게 줄줄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관계자나 해당 모델들 모두를 사랑하는 팬밖에 없지 않을까?

브랜드는 사라지고 업종만 기억되는 광고들

상당히 양보해서, 브랜드 이름까지 떠올렸다고 치고, 그럼 그 광고의 내용은 뭐였을까 하고 묻는다면? 이거야말로 쉬운 질문이다.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환한 빛이 내리쬐는 초록 배경, 그 안에서 뛰노는 건강하고 예쁜 아이, 그 옆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미모와 경력을 두루 갖춘 우리의 여자 모델들.” 십중팔구 맞는다. 대개 그렇게들 찍으니까.
왜 그럴까?
우선 광고를 보고 아파트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서울 시내 아파트 가격이 평당 2,000만 원을 육박하는 시점에 광고를 보고 혹해서 아파트 사러 가는 사람이 있을까? 당장 제품 살 것을 권유하는 대신 장기적으로 우리 브랜드를 좋은 이미지로 기억해달라는 것이 광고의 목적이다. 괜히 이런 상황에서 한번 튀어보자는 제안을 꺼내기는 어렵다. 장기 캠페인이라면 모름지기 진중해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습관적인 상식이 아닌가.
두 번째로, 광고주가 요구하는 사양을 맞춰줘야 하니까. 광고주가 “이번 광고는 밝고, 환하고, 환경친화적이고, 사랑스럽고, 가정적이고, 럭셔리하게 찍어 줘, 끝에 반드시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 브랜드 이름도 읽어줘”라고 주문한다면 옛날 광고의 기획안을 찾는 것 외에 광고인이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구태여 그렇게 안 하겠다는 광고주를 계약을 놓칠 가능성까지 무릅쓰며 설득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안 튀니까, 나 역시 튀지 않아도 적어도 중간은 가는 것이다. 일단 광고를 했으니까 시청률 조사해서 ‘이런 도달률이 나왔다’라고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시점에서 질문 하나. 광고의 목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광고의 목적이란 널리 알리고 자기 브랜드를 기억시키며, 거기에 좋은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전파를 타고 있는, 신문을 덮고 있는 무수한 아파트 광고들 중 상당수는 그야말로 곧 다시 메워질 구멍을 파대는 삽질에 불과하다.
광고인들은 흔히 ‘남의 돈 갖고 예술하려 들지 말라’는 교훈을 되새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남의 돈 갖고 아무도 분간하지 못할 똑같은 메시지들 찍어내는 것도 할 일은 분명 아니다. 물론 무조건 튀기 위한 크리에이티브는 아니 하는 것만 못하겠지만, 분간과 구별을 위한 아이디어의 개발을 찾기란 왜 이리 어려운 요즈음인지 모르겠다.
정말 광고주와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의 도박은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체 게바라(Che Guevara) 의 말대로,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