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8 : Creator@Clipping - 36년 내내 새로운, 큐피 마요네즈 캠페인의 아키야마 쇼(秋山 晶)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하라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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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내내 새로운, 큐피 마요네즈 캠페인의 아키야마 쇼(秋山 晶)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하라
 
문 기 연 CD | CR2팀
kymoon@lgad.lg.co.kr
 
만두(饅頭) 탓입니다!! 슬슬 원고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번뜩 큐피 마요네즈의 대부(代父), 아키야마 쇼 영감님이 떠오른 건 순전히 그놈의 쓰레기 만두 탓입니다. 그런데 만두하고 마요네즈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지?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의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의 노수대제(瀘水大祭)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명이 반란군 맹획을 칠종칠금(七縱七擒)한 연후에 드디어 남만을 평정하고 성도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수(瀘水)의 창신(猖神)이 노하여 그 누구도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맹획과 그 곳 토박이들은 공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는 창신이 화를 일으키면 사람 머리 마흔 아홉과 검은 소, 흰 양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가라앉으며 해마다 풍년이 든다 했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원래 사람이 죽어 저 같은 원귀가 되었는데, 어찌 또 산 사람을 죽여 원귀를 늘리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군중(軍中)에서 음식 만드는 이를 불러 영을 내립니다. “너는 소와 말을 잡고 그 고기와 국수를 반죽해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빚으라. 그런 다음 그 속은 소와 양의 고기를 채우고 삶아 제상에 올리도록 하라.”
이른바 만두(蠻頭)는, 처음에는 오랑캐의 머리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후 오늘날 먹을거리의 뜻을 지닌 만두(饅頭)로 바뀌었는데, 이는 눈을 속인다는 의미의 ‘만(瞞)’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공명은 감히 신(神)을 속였습니다. 신께서 드실 제사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공명의 ‘생명을 존중하는 따뜻한 시선’에 감동하여 가짜 만두에 기분 좋게 속아 넘어가 주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도 결국 바른 먹을거리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은 남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을 광고하는 광고인들도 다른 광고와 달리 단어 하나, 카피 한 줄도 엄격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이제 단순히 생존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문화이자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남는’카피는 어떻게 씁니까?

예전에도 이 꼭지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는 아키야마 쇼(秋山晶) CD, 혹은 카피라이터(그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하얀 화선지에 난을 치듯 카피를 쓰고 있습니다)를 보면 노수대제의 공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대표작인 큐피 마요네즈의 카피를 보면 인간에 대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배어있습니다<광고 1>. 그리고 이 시대의 먹는 상품과 문화가 해결해야할 답이 나와 있습니다. 일본의 한 광고평론가는 이 광고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눈앞에 백지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 줄, 무엇을 써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기업의 광고로서 누군가가 납득할 수 있는 한 줄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한 줄은 신문광고로서 전국의 독자들의 눈에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을 쓰면 ‘예스’, 무엇을 쓰면 ‘노’인가….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때, ‘남겨야만 하는’ 말이 카피라이터의 머리를 지배합니다. 감동시키거나 칭찬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립니다. 백 명 중 열 명이 감동해도 나머지 아흔 명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는’ 카피를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이 ‘남는’ 카피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생각으로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미숙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질문의 전제 자체에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 5단이라는 작은 공간, 그 지면은 백색입니다. 가운데 작은 글씨로 한 줄, 카피가 들어 있습니다. 그게 전부인 광고입니다. 헤드라인은 ‘안전이 상품이 되는 시대가 끝나기를….’ 그럼 무슨 이유로 이것이 ‘남는’ 카피일까요? 힌트는 작은 큐피 인형 옆에 적혀있는 슬로건과 그 밑의 작은 카피 안에 숨어 있습니다. ‘food, for ages 0-100’, 이 광고의 새로운 슬로건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0세의 사람이 있다. 80세의 사람이 있다. 인생은 계속된다. 큐피’라고 작은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광고의 주제는 아기에게도 노인에게도 안전한 음식을 큐피는 만들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도입부로서 ‘안전이 상품이 되는 시대가 끝나기를…’이라는 헤드라인이 사용되었습니다.
‘큐피는 안전합니다’로는 부족합니다. 큐피가 왜 안전한가를 말하려고 하면 복잡함 속에 빙빙 돌 뿐 구차해집니다. 그것보다도 왜 꼭 일일이 안전하다는 것을 어필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시대성을 말하면 이 광고는 ‘남는’광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흐름으로 이 카피는 쓰여 있습니다.

크리에이터들에게는 ‘백지의 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광고주로부터 새로운 광고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책상 앞에 하얀 종이를 펼쳐놓았을 때 그 안을 뭔가로 가득 채워야한다는, 일종의 직업병입니다.

<광고 1>의 헤드라인에는 마치 우리가 절대자를 향해 기도할 때처럼 ‘안전이 상품이 되는 시대가 끝나게 해 주세요’라는 말투가 숨어 있습니다. 아키야마 쇼의 광고가 가볍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무엇인가로 계속 채우기보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버리면서 소비자의 가슴뿐만 아니라 시대에 ‘남는’광고를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광고 스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키야마 쇼의 큐피 마요네즈 캠페인에서는 파릇파릇한 야채 냄새가 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텃밭에서 뽑아 우물물로 깨끗이 씻어 막 밥상에 올리신 상추쌈 같은 싱싱함과 생명력이 느껴집니다<광고 2~9>.
자신을 부정하고, 망가뜨려라

아키야마 쇼의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눈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이죠. ‘지금 마요네즈는 15그램당 100킬로의 칼로리, 큐피 하프는 15그램당 50킬로의 칼로리’라는 메시지로, 살찔 걱정 때문에 마요네즈를 기피하는 여고생·여대생을 타깃으로 한 큐피 하프 시리즈는 예순 아홉의 노인이 쓴 카피라고는 믿겨지지가 않습니다<광고 10~12>.

위의 큐피 마요네즈 광고에 필기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카피를 보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독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독백이 여기서 프리젠테이션되고, ‘나도 그렇지’라는 식으로 공감을 갖게 됩니다. 독백이란 결코 폰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카피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요소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방랑’이라는 공간적인 이동을 의미합니다. 이 광고에 있는 것은 감정의 이동을 표현하는 공중에 떠 몸을 맡기는 듯하다는 것입니다<광고 13>.
여기서는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광고에서처럼 쓸쓸한 이미지는 광고에 있어서 긍정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쓸쓸하기 때문에 이러한 광고에 공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독이라는 것이 광고의 영원한 테마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큐피의 모든 것을 계속 생각하는 사원입니다. 그러나 진짜 그 회사 사원이 아니기에 어쩌면 큐피의 모든 것이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68년부터 해왔으니까…… 세계에서도 이런 예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큐피만이 아니라 이 정도 오래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제 자신 엄청난 고민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노인이 될수록 점점 더 괴롭습니다. 미래밖에 없는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과거만 갖고 살아가야 하니까, 자신을 계속 부정하고 파괴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식이 없으면 정상의 자리에 앉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가기에 완전 부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90% 부정하고, 나머지 10%로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무리가 있기에 50% 정도면 부정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 개인적인 경우에 말입니다. 저는 영상이나 카피가 발라드 풍입니다. 그래서 이것부터 부정하는 것이 처음 시작입니다.

대부분 우리나라 광고회사에서 크리에이터들은 CD라는 자리를 크리에이터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중역의 자리를 거쳐 어정쩡한 관리자로 남을 것이냐, 독립을 해서 더 자유롭게 크리에이티브를 할 것이냐에 대해 고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고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대조직의 중역이 되기 위해서는 꼭 갖추어야 할 몇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덕목들이 저와는 아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리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아이데이션할 때, 요즘은 예전처럼 카피라이터가 자기 맘에 드는 카피 몇 줄만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트디렉터가 좋은 그림 몇 장만 달랑 들고 와서 카피 붙여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소위, ‘죽이 잘 맞는’크리에이터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질문하고, 다시 듣습니다. 크리에이티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시라소니형’크리에이터 몇몇을 제외하고는 상대방의 생각을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거기에서 크리에이티브의 화두, 아이디어의 모티브를 찾아냅니다.
실 제작(Execution)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맛깔스런 음식을 소재로 한 광고에서 CD 혹은 아트디렉터와 푸드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포토그래퍼는 서로 양념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의 위에 군림하는 관계라면 그 광고가 세상에 나왔을 때 보는 사람을 압도하면서 군침을 돌게 하는 비주얼은 탄생할 수 없습니다. 아키야마 쇼가 얼마나 큐피 마요네즈라는 광고주와 캠페인을 진심으로 아끼는지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Speed’ 캠페인을 보겠습니다<광고 14~ 23>.

저는 표현의 모든 걸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듣는 귀를 세우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신의 말이 갖는 이미지에 대해 매우 엄격합니다. ‘이 어프로치다……’라고 정한 이상 이것을 어떤 식으로 날카롭게 하느냐로 고민하고, 거의 말을 줄여나가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아트디렉터가 갖는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맞는 이미지를 가정하면서 카피를 써내려갑니다. 어떤 카피면 그 사람의 이미지와 잘 맞는지 생각하는 거죠. 그 사람의 표현 안에서 제 말을 표현해가는 것이 카피입니다. 아트디렉터의 이미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의 제 말은 그냥 평범한 문자밖에 되지 않습니다.
Emotion = 무한

‘요리는 고속으로’캠페인은 일본 기혼여성의 70%가 자기 일을 가지고 있고, 항상 시간에 쫓긴다는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이 캠페인을 뜯어보면 이전의 큐피 마요네즈 캠페인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의 ‘도시와 야채’캠페인, ‘대륙횡단열차를 탄 큐피 마요네즈’캠페인, ‘야채를 보면 생각나는 것’캠페인 등은 아키야마 쇼의 이모션(Emotion)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주제파악이 상당히 힘들었던 광고였습니다. 그런데 이 캠페인은 쉽습니다. ‘아, 큐피 마요네즈를 이용하면 음식을 저렇게 빨리 만들어 먹을 수 있지’라는 게 바로 들어옵니다.
모든 크리에이터들은 저마다의 컬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컬러 안에는 크리에이티브의 에너지가 집중되는 순간에 카피로, 비주얼로 투사되는 서로 다른 감정이 있습니다. 아키야마 쇼는 그러한 감성과 감정이 무한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관성이니 톤 앤 매너(Tone & Manner)니 하는 문제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는 후배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합니다.
“전에 만든 것을 부정하라. 전혀 다른 ‘emotion’으로 만들어라.”
아직 나만의 컬러조차도 정리정돈이 되어있지 않은 저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오랜 시간 광고를 만들어 왔지만, 본래, 제 자신의 광고제작에 임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후퇴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시선입니다. 앞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본래의 감성일지도 모릅니다. 먼저 음악(멜로디)을 이미지하고, 영상은 스틸적 요소를 중시하여 짧은 컷으로 2초 반, 카피는 내레이션, 이렇게 찾아낸 영상·음악·내레이션이 제 광고의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크리에이티브의 목표는 항상 전작을 부수고, 다음의 뭔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리는 고속으로’ 캠페인에서는 지금까지의 해왔던 방법과는 정반대의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15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후퇴적인 자신이 아니라 눈앞의 현상만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미지는 전혀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이라는 현실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전혀 다른 광고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또 다른 ‘emotion’으로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emotion은 한계가 없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떴습니다. 사실, 요즘 젊은 광고인들을 보면 뭔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몇 백 명에 한 명 꼴로 자신의 감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친구도 있지만,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진 크리에이터가 더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배들과 싸워서 이겨라

글을 끝내가면서 아키야마 쇼 영감님의 사진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도대체 그의 무엇이 큐피 마요네즈 캠페인을 37년 동안 가능하게 하였을까 궁금했습니다. 맑은 눈 아래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습니다. 히치콕(Alfred J. Hitchcock) 감독의 고집스런 입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둘은 참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40년 넘는 세월 속에서 스릴러라는 새로운 영화 장르를 개척하여 대가가 된 히치콕, 40년 가까이 큐피 마요네즈 캠페인을 이끌어온 아키야마 쇼 CD.
둘은 기존 체제를 부정하며,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까지도 부정하며 그들만의 독자적인 컬러를 창조해냈습니다. Something New!!
그렇다면 ‘새로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구의 말처럼 ‘뿅’가는 한 마디일까요, 아니면 ‘뻑’가는 비주얼일까요? 다카자키 타쿠마(高崎卓馬)라는 일본의 중견 카피라이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즘 광고가 별로다, 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광고는 특이하고, 뾰족하고, 평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비상식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아직 당기지 않은 광고의 방아쇠, 열어보지 않은 광고의 씨앗은 아직 무궁무진합니다. 딱 정해진 광고의 규칙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죠. 새로 시작하는 광고는 예전에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광고의 ABC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누가 만들어도 되는 똑같은 결과물은 절대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How To’를 찾기 전에 먼저 ‘What To’를 찾으십시오. 무엇인가 아주 새로운 시각으로 브랜드를 보셔야 합니다. 상을 목표로 광고를 만들지는 마십시오. 누가 뭐래도 ‘압도적인’ 광고를 만드십시오. 아키야마 쇼 선배가 만든 광고를 보고 ‘어떻게 이런 광고를 만들 수 있지’라고 하면서 입만 벌리고 있지 마십시오.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