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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바코> 미야모리 아오이

 

HS Adzine 편집자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기획의도를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의 투자 목적’ ‘매력적인 캐릭터를 활용한 다양한 부가산업과 경제적 이익 창출’ ‘성공한 캐릭터들이 광고인들에게 줄 수 있는 영감같은 화려한 문구들로 치장했지만, 오타쿠는 사실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너무나도 사적인 이 포교행위가 다음에도 부디 계속되기를 바라며, 첫 번째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소개해 드립니다.

 

자신조차 놀랐을 정도로 아무 고민 없이, P.A.WORKS2014년 제작한 애니메이션<시로바코>의 미야모리 아오이를 첫번째 주자로 골랐습니다. 이 시기, P.A.WORKS는 인기 만화나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하지 않는 오리지널 애니를 주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성공하여 대중에 친숙한 캐릭터를 활용하지 않고, 새롭게 창작한 캐릭터와 스토리로 좋은 평가를 받고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인지도가 전혀 없는 브랜드의 첫 번째 광고를 유명모델 없이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하지만 P.A.WORKS는 전작 <꽃이 피는 첫걸음>에서도 '일하는 여자아이 캐릭터'를 오리지널로 창작하여 하여 성공을 거둔 경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이 작품을 통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큰 성공을 거둡니다. 심지어 오타쿠들은 거의 공식적인 수식어처럼, 이 작품을 우주명작이라고 부릅니다.

 

 

<시로바코>의 미야모리 아오이 캐릭터 컷 / 출처 : 시로바코 공식 홈페이지

 

 

오타쿠들이 이 작품을 찬양하는 이유는, ‘상업성작품성을 동시에 충족시킨 흔치 않은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1995년의 <에반게리온> 현상, 그리고 2006<스즈미야 하루히> 현상을 거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이 현상들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편집자님 저에게 더 기회를 주세요!) 이제 더 이상 장난감 회사들의 컨펌을 받으며, 형형색색의 로봇을 애니메이션에 무리하게 등장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잘 만든 캐릭터는 수 만명의 오타쿠가 바로 지갑을 열게 만들고, 이는 수백 만의 일반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애니메이션만큼이나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옵니다. 독창적인 서사, 빈틈없는 플롯, 뛰어난 작화퀄리티다양한 요소가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지만, 오타쿠를 가장 열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캐릭터의 ‘모에 요소’입니다.

 

모에 요소라는 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일단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 포인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타쿠는 자신이 모에하는 캐릭터의 굿즈, 피규어, 음원, 이벤트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정교한 세계관, 치밀한 복선, 독창적인 스토리에 귀중한 러닝타임을 소모하는 짓은 내가 모에하는 캐릭터가 마음껏 매력을 발산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결국 바퀴벌레’<고키챠>적혈구’<일하는 세포>까지도 모에화하는 수준에 이른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한국 중소기업보다 못 미치는 박봉을 받으며 과중한 야근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자신들의 모습마저 모에화하는데 성공합니다. 그게 바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애니메이션’ <시로바코>입니다.

 

제목에 쓰인 시로바코(흰 상자)’란 기획-스토리-캐릭터디자인-대본-콘티-작화-동화-채색-CG-촬영-연출-음향-더빙-편집 등의 지난한 과정 끝에 최종 완성된 애니메이션의 완성본을 의미합니다. VHS(비디오테이프)가 주 영상매체였던 시절, 흰색의 무지 케이스 안에 완성본 VHS가 담겨 나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요. 제가 HS애드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 TV광고 소재 교체시마다 수십 개의 테이프를 방송국마다 퀵으로 보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시로바코>는 하나의 영상물 완성본을 만들어내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 광고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출처: 유투브 Warner Bros. Japan Anime < 시로바코가 만들어지기까지 >

 

 

이 시로바코(하얀상자)를 알고 있는 당신은 이미 나와 같은 세대..

 

<시로바코>의 첫번째 시퀀스는 열정 많은 여고생 시절의 미야모리 아오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미야모리는 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만든 애니메이션을 학교 축제에서 상영하며 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다시 만날 것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서울로 상경해 중소 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작진행(광고 대행사의 AE 직군)으로 일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을 쳐내기 바쁠 뿐입니다. 같이 상경한 에마(작화)도 아직 그림에 익숙하지 않아 매일 밤만 새고 있고, 시즈카(성우지망생)는 오디션에서 매번 떨어져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입니다. 미야모리는 매번 하청만 받아오던 회사가 간만에 직접 수주한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위해 고분분투하지만, 애니를 만드는 과정은 고등학교 때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크리에이티브로 빛나는 결과물만 보았을 때에는 몰랐던, 불합리와 고통이 가득합니다.

 

 

출처  : AniplusTV  유투브: 10 월신작  1 화 무료보기 _SHIRO BAKO_1 화 (1)_[Aniplus]

 

 

꿈과 현실의 차이

 

 

미야모리를 통해 묘사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열악한 현실은 다른 국가, 다른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저희에게도 꽤나 익숙합니다. 미야모리가 겪는 일련의 위기들은 ‘최악은 항상 그다음에 온다’는 업계 명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작방향을 결정해 줄 감독의 콘티가 너무 지연되는 바람에 실제 제작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 시간 내에 업무를 완성해 줄 하청업체를 겨우 찾아 일을 맡겼더니, 용서할 수 없는 퀄리티로 응답해 줍니다. 어찌저찌 제작을 거의 완료해가고 있는데 원작자의 변심으로 애니를 전부 다시 그려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합니다. 게다가 이 모든 문제가 자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에도, 모든 유관부서에 가서 일정 지연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하는 건 바로 미야모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자기 업무만 담당하기도 벅찬 미야모리에게 회사는 갈수록 더 큰 책임을 부여합니다. 동료가 실수한 작업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기본. 경력이 있는 선배는 프로젝트 중 더 큰 제작사로 이직해버리고, 그나마 마음이 통하던 동료는 아픈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휴직해버립니다. 그 와중에 팀장은 번아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합니다. 얼떨결에 미야모리는 데스크(제작진행 팀장)까지 맡게 됩니다.

 

 

출처: 시로바코 공식 홈페이지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들

 

 

미야모리는 마치 매번 더 강한 적을 해치워야 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처럼 이런 위기들을 극복해 나갑니다. 적을 해치우는데 필수적인 나만의 필살기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이 아닙니다. 사실 제작진행 직군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미야모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 상황을 최대한 깔끔히 정리하여, 상대방에게 깍듯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크게 의미 없어 보이는 이 태도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며, 솔루션을 위한 작은 단서라도 제공해 줍니다.

 

물론 1년 차 제작진행이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미야모리 캐릭터에 대해 좋은 제작진행이 가져야 할 모든 소양을 다 갈아 넣어 만들었다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슈퍼히어로처럼 문제를 척척 해결하기만 해서는 시청자에게 인간적인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야모리의 내적 갈등을 날 것 그대로 시각화하여 보여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위기 속에서 갈등하는 미야모리의 이중적인 마음을 대변하는 2개의 인형, 미무지와 로로입니다. 대게 미무지는 문제에 대한 감정을 여과 없이 토로해냅니다. 무책임한 동료에 대한 원망, 이 업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인 구조에 대한 불만, 다 내던져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 하지만 로로는 때로는 합리적인 설명으로, 때로는 감정적인 공감으로 미무지를 타이릅니다. 이런 자기합리화를 통해 미야모리는 쓰러지지 않고, 결국 애니메이션 최종화의 시로바코를 방송국에 전달합니다.

 

귀여워 보이지만 '무책임한 동료를 토막 내버리고 싶다'라는 섬뜩한 충동도 쉽게 말해버리는 무서운 인형들 / 출처: 시로바코 공식 홈페이지

 

 

 

광고 온에어가 모두 끝난 후, 모든 제작자/출연자/유관부서/협력사가 모인 종방연 자리에서

프로듀서 : 미야모리, 니가 나가서 건배사를 해

미야모리 : 예? 저따위가 무슨..

프로듀서 : 저따위라니, 가라, 에이스

 

 

백여 명이 넘는 제작 인원이 모인 종방연에서, 미야모리가 건배사를 하는 것이 맞을까요? 사실 완성된 애니메이션의 단 한 컷도 미야모리가 직접 만든 것은 없습니다. 에마(작화)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시즈카(성우)처럼 목소리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미야모리는 애니메이션 동호회 회장이었지만 오히려 자기가 어느 것 하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회장을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사실 자신이 팀장이 된 것도 특출난 능력보다는 특별한 상황에 기인합니다. 자신은 단지 애니메이션이 완성되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도 마침내 온에어되는 광고나 캠페인을 볼 때, 이런 의심을 자주 하게 됩니다. 내가 이 광고를 만드는 데 있어 결정적인 발상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직접 한 것도 아니고,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한 것도 아닌데.. 난 단지 각 담당자에게 필요한 연락을 취하고, 일정에 맞도록 계속 쪼기만 했을 뿐인데, 어떤 경우에는 이 광고가 방송되는 광고스팟을 구매하고 소재를 전달했을 뿐인데,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 광고를 만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 이 애니메이션의 엔딩은 ‘그 광고를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고,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도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의 시로바코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짜증 나는 마음에 한두 마디 욕을 내뱉고 있을지언정, 도망치지 않고 끝내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당신이, 바로 우리의 에이스입니다.

 

 

애니메이션<시로바코>를 완성한 에이스들 / 출처: 유투브 Warner Bros. Japan Anime < 시로바코> 특별 엔드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