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소개한다고 해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오래된 캐릭터들만 소개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여, 이번에는 지금 이 시점 글로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인기 캐릭터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국내 한 사이트의 OTT 통합 콘텐츠 랭킹에서, 3주째 1위를 지키고 있던 <천원짜리 변호사>를 제치고 10월 셋째 주 통합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바로, 전기톱(chainsaw) 악마가 심장이 되어버린 소년의 이야기, <체인소맨>입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구입한 체인소맨 피규어. 누군가를 찢어발기고 싶을 때, 한 번씩 쳐다보면 효험이 있음
제 자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이게 도대체 뭐야?’라고 물어보게 만드는 파격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는 ‘체인소맨’ 하지만 이 만화에서 그나마 가장 덜 파격적인 것이 캐릭터의 외형이라고 하면 믿으실 수 있을까요. ‘체인소맨’의 톱날은 단순히 만화 속에서 악마들의 머리를 썰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소년만화와 슈퍼히어로물의 클리셰를 박살 내버리는 쾌감을 선사합니다. ‘체인소맨’에 의해 찢어발겨진 클리셰들의 살점과 내장을 하나씩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체인소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1. 어떻게 생겼는가 - 자극적이기만 하면 됨!
‘체인소맨’의 미친 캐릭터는 ‘가슴의 트리거를 당겨 시동을 걸면, 얼굴과 양팔에서 전기톱이 솟아 나오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 설정을 가진 캐릭터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대부분 주인공에 의해 퇴치되는 특정 스테이지의 빌런 정도였습니다. 콘셉트 과잉의 버거들이 계속 출시되지만 버거킹의 주인공은 언제나 와퍼이듯이, <체인소맨>의 디자인은 주인공 캐릭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물들이 극 초반에는 히어로 콘셉트를 강조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콘셉트보다는 히어로 본인의 인격이나 서사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체인소맨>의 원작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는 이마에서 전기톱이 솟아 나오는 강렬한 캐릭터를 한 시리즈의 메인 주인공으로 밀어붙입니다. 심지어 이 캐릭터는 모든 슈퍼히어로/빌런이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요소, 양쪽 눈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눈이 없는 캐릭터에게 우리가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걱정은 필요 없어 보입니다. 남들에게 평생 이용만 당해 삶의 모든 기쁨과 본인의 장기까지도 다 빼앗겨버렸던 소년이 ‘체인소맨’이 되는 순간, 인격 같은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거든요. 그가 표출하는 광기와 폭력을 그 자체로 즐기면 됩니다. 저는 지금 제 책상 위에서 저 대신 분노를 뿜어내고 있는 ‘체인소맨’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시궁창처럼 맛없는 피라도.. 괴로워하는 네놈 얼굴을 보면서 마시니까 딸기잼 같구나!!! 으하하하하!!
내가 널 베서 피를 흘리면, 내가 네놈 피를 마시고 회복하는 거다. 영구기관 완성해버렸잖아! 이제 노벨상은 내 거다!!
2. 왜 싸우는가 - 싸우는 이유? 그런 거 없음
슈퍼히어로들은 인류를 지키기 위한 마음이든, 개인적인 복수든, 본인의 꿈이든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빌런의 경우에도 방향만 다를 뿐 ‘인간들을 죽여버릴 거야’ ‘이 사회를 망가뜨려 버릴 거야’라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쪽 다 극이 전개되면서 점점 더 치열한 전투를 해야 하는데, 내 목숨보다 중요할 정도의 강렬한 이유가 없으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는 모습이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인소맨으로 변신하는 주인공 ‘덴지’는 아무 의욕도 없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양아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는 싸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덴지를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덴지가 기본적으로 ‘데빌 헌터’라는 직책을 수행하게 만드는 기재는 ‘일하지 않으면 바로 죽인다+ 일하면 밥을 준다’ 정도의 협박입니다. 하지만, 이런 협박 정도는 덴지가 악마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덴지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슈퍼히어로물 역사상 가장 천박한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덴지는 여자 동료 ‘파워’의 가슴을 만지기 위해 ‘박쥐의 악마’와 대결하고, 동경하는 여자 상사 ‘마키마’가 ‘(야한 짓도 포함하여)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 말에 ‘총의 악마’를 추적합니다. ‘마키마’를 동경하지만 또 다른 여자 동료 ‘히메노’가 어른의 키스를 조건으로 제시하자, 누구보다 앞서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뛰어듭니다.
슈퍼맨이나 손오공(드래곤볼)은 인류를 위해 싸웠고, 캡틴 아메리카나 에렌(진격의 거인)은 자신의 진영을 위해 싸웠고, 배트맨이나 탄지로(귀멸의 칼날) 개인의 복수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싸워 왔습니다. 가장 최근에 원펀맨은 그냥 취미로 인기를 얻고 싶어서 싸우긴 했습니다만..
이 역시 자신만의 이유가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일해야 하는 이유로 ‘자아실현’을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쳐버릴 지금 세대에게 <체인소맨>은 오히려 가장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다들 내가 하는 건 깔보고 말이야.. 복수라는 둥, 가족 지킬 거라는 둥, 고양이 구할 거라는 둥, 어쩌고 저쩌고
다들 잘난 꿈이 있어서 좋겠네. 그럼 나랑 꿈 배틀하자고! 꿈 배틀!
내가 널 죽여버리면, 네 꿈은 가슴 주무르는 것보다 못한 게 되는 거다!!!”
3. 누구와 싸우는가? - 우리 모두 힘을 합친다면, 반드시.. 더 힘들어질 거야
‘체인소맨’은 정부 공식 ‘데빌 헌터’ 기관인 ‘공안’ 소속으로 악마를 퇴치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만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 바로 이 ‘악마’입니다. ‘악마’는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나 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됩니다. 사람들이 그 물체나 관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포심이 클수록 악마의 힘도 더 강해집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빌런의 힘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소년만화의 특성상, 히어로에게는 항상 더 강한 빌런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나중에 나오는 빌런이 얼마나 더 강한 존재인지 충분한 설명이 되어야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드래곤볼>은 아예 ‘스카우터’라는 전투력 측정장치를 개발해, 빌런의 강함을 수치화하여 바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체인소맨>에서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설명 없이, 우리는 직관적으로 ‘토마토의 악마’와 ‘사무라이 검의 악마’ 중에서 누가 더 강한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의 악마’가 나타났을 때, 해당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악마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설정은 소년만화의 가장 큰 클리셰인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무찌를 수 있어!’는 공식을 파괴합니다.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은 지구인 모두의 힘을 모은 원기옥으로 프리더를 물리치지만, <체인소맨>에서는 악마에 대한 모두의 공포심이 모여, 악마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강화된 악마에 대한 소식은 미디어나 SNS를 통해 급속히 퍼져, 사람들의 공포심을 더 증가시키고, 이는 결국 다시 악마를 강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SNS에 모인 사람들 자체가 거대한 해악을 만들어내는 이 모습, 왠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4. 언제까지 싸우는가? - <드래곤볼><원피스>식 전형적 이야기 구조에 대한 혐오
<체인소맨>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전개 방식입니다. 보통의 소년만화 시리즈에서 최종 보스가 누구인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오픈되었을 때를 떠올려보겠습니다. ‘아, 이제 이런 방식으로 프로세스를 밟아서 최종 보스에 도전하겠구나’라고 전체 이야기의 구조를 예상하게 됩니다. <드래곤볼>의 ‘7개의 드래곤볼을 모으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라는 설정은 주인공이 처리해야 할 미션을 예상하게 만들어줍니다. <귀멸의 칼날>의 ‘십이귀월’ 설정은 현재 주인공이 해치워야 할 대상이 총 몇 명이고, 그중 몇 명째를 해치워서 전체 미션 중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체인소맨>에서 그런 예상은 계속 뒤집어집니다. 드래곤볼을 하나 모으자마자, 그 미션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매화마다 새로운 인물과 설정이 등장하면서 전체 이야기의 목적과 구조를 계속해서 바꾸어 버립니다. 그야말로 ‘미친 전개’를 ‘미친 속도’로 치고 나가, 바로 결말까지 달려갑니다.
이렇게 기존 시리즈물의 전개를 찢어발기는 와중에, 인기 있는 주/조연 캐릭터들도 모두 순식간에 죽어 나갑니다. <원피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인기 캐릭터인 루피, 조로, 나미, 우솝, 상디, 쵸파 정도는 어디서 피규어로 많이 보셨을 텐데요. 다양한 굿즈를 팔아치워야 한다는 점에서도 인기 캐릭터의 생존 시간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체인소맨>의 인기 캐릭터들은 피규어를 제작할 시간도 별로 없이, 순식간에 다 이야기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드래곤볼>의 크리링, 천진반, 야무치는 수십 년이 지난 아직도 살아서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체인소맨>의 캐릭터들은 드래곤볼로 살려낼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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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맨>은 만화로서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고, 국내에서도 유명한 <진격의 거인: 파이널 시즌> <주술회전>의 제작사 MAPPA가 애니메이션화를 진행하였습니다. 역대급 투자가 진행된 작품이다 보니,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채널 외에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왓챠, 웨이브, 티빙 등 거의 모든 OTT를 통해 시청이 가능합니다. 일본, 영미권을 포함한 글로벌 인기가 대단합니다만, 애니메이션은 만화보다는 못하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어떤 의견들이 있든 간에, 저는 시체 더미 속에서 서서히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전기톱의 굉음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가끔 일상생활에서도 그 전기톱 소리가 들리거든요. 누군가 실수로 제 가슴에 숨겨져 있는 트리거를 당겨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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