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5-06: 광고와 문화 - 표절에 대한 증오, 순수에의 집착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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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문화평론가


표절, 모방, 작위, 가짜, 복제,사기.
이런 말들이 대중문화를 읽는 언어의 눈금 속에서 자꾸만 눈에 띈다. 우연한 발견이었든 아니면 혐의의 대상이 된 작품(혹은 작자)에 대한 집요한 의혹때문이었든, 그렇게 발견된 사례들은 나날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아예 대중문화가 통째로 그런 추한 늪에 깊이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런 발견들 속에서 자신의 발견을 증빙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꼼꼼한 증거들은 대개 그럴 듯하다. 일본의 드라마와 쇼를 본 딴 어느 어느 방송사의 프로그램, 어느 만화가의 그림체를 본 딴 연재 만화, 어느 작곡가의 멜로디를 그대로 복제한 어느 곡 등등.

그런 검증의 절차는 위작과 원작을 대질시키고, 위작과 원작의 유사성을 낱낱이해부
한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곧잘 위작자로 지명된 혐의의 인물은 그 원작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항변하기 일쑤이다. 물론 우리는 피의자의 진술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피의자는 언제나 사법적인 언어의 그물에 갇혀 있게 마련이고 그는 언제나 불리(不利)를 무릅써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의 항변을 반쯤은 미더워하지 못한 채 그 불량한 사건을 흐지부지 잊어버린다. 그렇지만 잊을만하면 불쑥 튀어나오는 진위 시비는 적어도 하나의 인상만은 또렷하게 기억 속에 새겨 놓는다. 요컨대 이제 대중 문화는 온통 모방의 흔적으로 가득 찬 혼혈의 아수라장에 다름아니라는 우울한 확신이다.


도리도리인가 원형 테크노인가


하지만 원작과 모작, 원작자와 모사가(模寫家) 사이를 가르는 차이가 대중문화를 조망 하는 눈길로 비약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이미’ 다름 아닌 반복 충동에 의해 움직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반복 충동을 가리키는 말이 유행이나 스타일 같은 말이다. 유행이나 스타일로부터 해방된 대중문화란 것은 넌센스이다. 바꿔 말하자면 반복과 모방이 없는 대중문화는 그 자체 부조리이고, 대중문화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이 어느 철없는 ‘무서운 아이들’의 우발 적인 발명 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추켜지든, 아니면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발신지조차 알 수 없는 어떤 뒷골목으로부터 뛰쳐나온 것이든, 언제나 유행은 반복과 동의어인것이다.
심지어 그런 유행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끈질기게 묻고, 그런 유행을 하나로 묶어 주는 재봉선을 더듬으며 그를 하나의 스타일로 명명하는 것, 그 역시나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에 관한 대중문화적인 거울이 있는 셈이다. 그렇게 비춰진 거울도 물론 대중 문화의 계보에 속한다. 타블로이드 잡지와 연예 프로그램은 죄다 그런 대중문화의 대중문화이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품고 있는 거울, 그것이 대중문화와 대중문화를 조준하는 언어 사이의 공모관계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대중문화의 바깥에 선 척 굴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단절 없이 이어주는 바톤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실망한다. 마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쿨(cool)’하기 그지없어야 할 테크노가 이 땅에 들어오면 ‘도리도리 댄스’와 ‘DDR’로 둔갑하는, 어쩔 도리가 없는 그 속물스러움을 자꾸 개탄하게 된다.
그것은 작품끼리의 관계, 혹은 작품의 관념과 양식을 제정하는 소유자로서의 작자, 즉 예술가나 대중문화인끼리의 관계와는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그 문화의 진정성에 대한 서로 다른 오해가 빚어내는 끝도 없는 나락이다.

거금 2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홍대 앞의 도쿄풍의 테크노 클럽이나, 심지어 호텔의 홀에서 정확하게 고증한 듯이 서비스되는 스포츠 칵테일과 함께 개최 되는 테크노 파티는 그 나름의 진정성을 고집한다. 드럼 앤 베이스와, 앰비언트(ambient)와, 하우스 뮤직과 정글 사이에 까다로운 빗금을 긋고 자르고 붙이며 사운드를 짜집기 하는 디제이들은 나름의 외양과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분명 자신이 사랑하는 테크노의 심미적인 규범을 진짜의 이름으로 혹은 본색(本色)의 이름으로 정밀 모방한다. 디제이의 이름도 그렇고 전단의 디자인도 그렇고, 클럽의 조명도 그렇고 믹서와 콘솔의 상표도 다 그저 그렇다.
한결같다. 그리고 깜쪽같이 도쿄적이거나 뉴욕적이다. 어쩌면 누구는 시카고적 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모방이 또 한 종류의 모방에 불만을 품게 된다. 그것은 바깥과의 차이를 모방하는 진정성의 숭배자들이 자신의 내부와의 차이를 모방하는 '대중들의 모방'에 대해 털어놓는 불만이다. 도리도리 댄스의 춤꾼들과, 힙(hip) 하고 쿨하게 노는 테크노 클럽의 댄디들은 도리도리 댄스가 천하고 한심하고 빙충맞아 보인다. 하지만 도리도리 댄스가 편하기 그지없는 대중들이 보기에 이 호사가들은 레이브 씬(Rave Scene)이 만들어 놓은 반문화 적인 클럽 문화의 절박하며 격렬한 힘도, 발상도 없는 가짜이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이나 <케미컬 제너레이션>에서 보이는 그런 극한적인 위반은 커녕 이 나라 의 테크노 클럽은 신종 귀족 취미의 목록표에 새로 수록된 아류 중의 아류이다. <추적 60분>같은 시사 르포 프로그램에서 비행과 무질서의 온상인 양 묘사될 뿐, 도무지 그럴듯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근교의 폐허가 된 공장 이나 들판 에서 밤을 세워 법석을 피우는 레이브 파티는 빌딩 지하 속의 얌전 하고 매끈한 테크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곳의 테크노야말로 진짜탱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짜이다.

반면에 도리도리 댄스는 훨씬 그럴 듯하다. 그것은 강남의 천박한 클럽들에서 '잘못’ 태어났고, 휴대용 녹음기 광고에서 번쩍이는 은색 옷을 입고 나온 속절 없는 미녀가 널리 전파한 몸짓의 복음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맞다’. 도리도리 댄스가 우리에게 그렇게 들어맞는 이유는 허구한 날 축구를 하며 소일해야 하는 실업 청소년들이 영국엔 있겠지만 여기엔 없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실업 상태 속에서 연금생활자인 부모 에게 또 달리 기생하고 빈둥거리며 교외나 다운타운을 쏘다니는 청소년들이 미국엔 있지만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반평 남짓의 책상에서 반평생을 보내고, 빽빽한 밀도의 ‘밀리오레’와 출퇴근 시간의 전철그리고 강남역과 신촌과 돈암동과 신정동에서 갇힌 듯 움직이는 듯 살아온 공간적 감수성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그렇게 입력된 감수성의 모형은 결국 레이브를 도리도리화한다. 순수한 고증과 재연이 아니라 번역되고 매개된 잡종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천박한 가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과거의 삶을 모방하기 위해, 즉 자신의 신체와 감수성의 같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 모방은 한번 더 모방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테크노의 진정성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반복 충동을 모방해야 한다. 도리도리 댄스는 적나라한 가짜이지만, 그럼에도 또 그것은 자신의 진정성을 지켜주는, 자신의 삶을 계속 진짜로 머무르게 하기 위해 ‘사용된’진짜이다.


인용 혹은 반복과 대중문화

대중문화는 반복과 모방에 의해 움직인다. 하나의 작품이나 하나의 작가를 두고 생각하고 싶은 체계적인 착각 속에서 반복과 모방은 악이다. 하지만 그 악은 한걸음 물러서서 대중문화를 조망하는 시선 속에선 만연한 악이며, 그런 점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악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 규칙 이거나 습관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공공연히 여느 작곡가, 작가의 작품을 표절하는 행위를 두둔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세상은 모방이므로’ 투의 체념적인 냉소는 대중문화와 작가, 작품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이를 뭉개버리는 꼴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대중문화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 를 무의식처럼 구성하는 힘이지만, 표절을 하는 작가는 그런 대중문화의 힘과는 관계없이 의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인물이다.

대중문화의 무의식인 모방과 반복은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저 전개된다. 하지만 표절과 위악은 공교로운 계획이고 작업이며 개인을 대상 으로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표절은 모방을 창작하는 모방 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대중문화의 논리인 모방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방으로서의 대중문화가 바로 그런 ‘표절의 모방을 '창작 하는’ 인물들을 부양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방을 수색하고 고발 하는 자와 모방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자 사이의 적대 관계는 도리도리 댄스파와 순수 테크노파 사이의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서로 달리 모방된 진짜를 두고 벌이는 인증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다른 진짜가 있는데, 어떻게 같은 가짜가 있을 수 있겠는가.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