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집에서 사고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집에 갈 때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집에서 자주 귀신이 출몰하거나 층간 소음 때문에 늘 전시 상태가 아니라면 집에 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안온한 느낌을 준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내가 아는 냄새들이, 내가 아는 소리들이, 내가 아는 감촉들이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안도감인가. 마당을 지키고 있는 늙은 감나무나, 사시사철 품어주는 뒷동산이 없는 황막한 아파트일지라도 집은 늘 나를 안아주고 다독여 주는 곳이다.
하지만 가끔은 무변화의 권태로 인해 여행 상품을 뒤척이거나, TV 속 여행 프로를 넋을 잃고 보기도 하고, 기차역을 지나칠 때면 즉흥적 혹은 무목적 떠남을 꿈꾸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정주형 인간으로서의 안온한 삶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분명히 유목형보다는 정주형 인간에 가깝다. 나가는 게 싫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칼 같은 직업과는 한참 멀리 있던 나로서는 늘 집에 들어가는 삶보다는 유목형 삶을 살아왔다. 거의 늘 떠나 있었고, 늘 밖에 있었다. 촬영으로 편집으로 일로, 술로…
아내는 반면에, 유목형 인간이다. 호남평야 한가운데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정주형 인간으로서의 유전자가 뿌리 깊이 박혀 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녀는 늘 나가지 못해 안달이다. 산과 들을 좋아하고 구경 다니길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와는 달리 대인관계도 좋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있고 싶은 사람은 나가게 되고 나가고 싶은 사람은 있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인생은 늘 그렇다. ‘바뀌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가정은 늘 가정일 수밖에 없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다. 그냥 컨텍스트가 신이다. 그 당시에는 그런 선택이 어쩌면 물 흐르듯이 당연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컨텍스트는 분명 다른 사연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누구나 집사람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바깥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둘 다 집사람이 될 수도 있고 둘 다 바깥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젠 그 말조차 시대착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