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다. 차가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 들어오며 잠이 덜 깬 눈꺼풀에 일격을 가한다. ‘세월 참 빠르지. 요놈아!’ 시간의 비웃음에 또 한 번 무력해진다. 아침저녁 찬 바람이 분지도 꽤 됐다. 계절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곳은 코다. 훌쩍 훌쩍, 오른쪽 어깨 근처 풍문혈을 통해 바람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콧물이 극성을 부리며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가 시작된다. 지난밤에도 콧물 때문에 전전반측하다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농담 삼아 나중에 자연사하게 되면 아마 이 무렵-백로 즈음-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만큼 언제부턴가 환절기는 힘들다. 이 즈음엔 부고장도 많이 날아온다. 계절의 변화를 몸이 이기지 못한 분들이 많다는 얘기다. 의학적으로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몸도 여름 몸에서 가을 몸, 겨울 몸으로 리셋해야 하는데, 리셋에 실패하면 다음 계절을 누리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나이 들수록 리셋이 점점 늦어지거나 어려워진다.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점화플러그를 몇 번은 돌려야 불이 붙는다. 언젠가는 영영 시동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물의 이치이니 슬퍼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사실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아니면 어리석은 일인가.)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고 만물의 일원일 뿐이다. 해도 지고 꽃도 지고 개도 죽고 닭도 죽는데 인간만이 죽음을 한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각자들 타고난 본성에 충실할 따름이다. 짚신벌레는 짚신벌레대로 살모사는 살모사대로 그 자체로 합목적적이다.
살인마를 연기해도 얼치기 건달을 연기해도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를 내 기억 속에 남긴 영화가 있다. 90년대 초에 만들어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크라잉 게임>이다. IRA 문제에 동성애(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충격적인 장면이 있는)와 인종차별 등 쉽지 않은 주제들이 미스터리로 섞여 꽤 머리 아팠던 영화로 기억하는데, 너무 오래돼 이젠 스토리도 다 날아가고 몇몇 파편들만 폐차처럼 방치되어 있다. 그래도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는 포레스트 휘태커의 대사는 종종 생각이 난다. 아마 대충 이런 얘기였을 것이다.(순전히 나의 각색임을 밝혀둔다.)
…강에 다다른 전갈은 우연히 만난 개구리에게 부탁을 했지. 자기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달라고…하지만 개구리는 그 부탁을 거절했어. 믿을 수가 없었거든. 전갈의 독침이 자기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 전갈은 몇 번이고 간청을 했어. 절대로 절대로 독침을 쓰지 않겠다고, 그러면 너도 나도 다 죽을 텐데 그럴 리 있겠냐고 개구리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했지. 개구리는 마침내 전갈을 믿기로 했고 전갈은 개구리 등에 업혀 강을 건널 수 있었지. 하지만 강 중간쯤 지나자 전갈은 끝내 개구리의 목을 물었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거지.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도 말이야. 본성은 그런 거야. 숨길 수 없는 거지… 전갈은 전갈의 본성대로 산 거고 개구리는 개구리의 본성대로 산 것일 뿐.
말 나온 김에 오늘은 <크라잉 게임>이나 다시 한번 봐야겠다. 코를 풀려면 휴지도 잔뜩 갖다 놔야겠고… 요즘엔 비염 약도 잘 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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