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2 : 글이 그리는 그림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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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그리는 그림

이 현 종

대표 CD - Chief Creative Director / jjongcd@hsad.co.kr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바보상자라는 별명에 선뜻 동의하면서도 그 안에서 영상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늘 신기하기만 하다.

두께도 얇아져서 이제는 상자가 아니라 얇은 액자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얇아질 수 있는지, 또한 원리를 듣긴 듣는데 들을 때마다 머리가 못 따라 간다. 한참 듣다 보면 그래서 결국 화질이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얘기다.

TV는 광고하기가 만만치 않은 제품이다.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그림의 품질, 즉 화질인데 이걸 그럴듯하게 보여주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수십 년 동안 돌고 돌던 주제이니, 사랑 타령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많이 써 먹는 방법은 역시 솔거식(?) 어프로치다. 이 말은 순전히 현장에서 즐겨 쓰는 개인적인 용어다.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 새들이 날아와 부딪쳤다는 솔거의 그림. 얼마나 진짜 같았으면….

TV의 화질을 광고하는 초식도 어떻게 보면 이와 다르지 않다.‘ 정말 진짜같아요’를 믿어달라는 식이다. 솔거식 어프로치는 쉽지만 따분하다. 한 번은 이 따분한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아예 그림을 보여주지 말자는 생각에 다다랐다. 생생한 화질을 그림이 아니라 글로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왜 어떤 글을 읽다보면 너무나 디테일한 묘사에 어느덧 가슴이 뛰고 땀에 젖고 마치 그곳의 정경이 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영상이 보여주는 것보다 글이 보여주는 것이 더 생생할 때가 있다. 우리 TV가 그런 경험을 약속한다고 하면 어떨까. 이런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여러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단연 첫 번째로 선택 받은 문장은 이효석의 것이었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메밀꽃 필 무렵 中>. 실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묘사의 경지이다.

묘사는 연주자의 카덴차와 같이 작가가 기술자로서의 솜씨를 한껏 뽐낼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그 세밀함과 정묘함으로 정서적 고양을 불러일으키고, 끝내는 설득의 지점으로 한껏 밀어 붙이는 작가의 고유한 능력이기도 하다.

‘둥글게 뭉그러진 구름이 장엄한 노을 속에 제왕이 타고 가는 황금마차와 같이 피어오르고 흰 손수건 같은 돛단배가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기어가고 있다. 바다의 물을 이은 산판은 한 순간도 변함없이 슬픈 설레임처럼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박경리‘, 파시’ 中>.‘ 동백꽃의 낙화는 특이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조금도 시들지 않은 핏빛꽃이 송두리째 점점이 떨어진걸 보면서 수자는 몰래 몸서리를 쳤다’<박완서‘, 가는 비, 이슬 비’ 中>.‘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김훈,‘ 칼의 노래’ 中>.

어디 이 뿐이겠는가. 글이 그리는 그림은 때로 그림 자체보다 섬세하며 사실적이다. 가끔은 책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져도 어떤 묘사 자체가 마음을 떠나

지 않을 때도 있다.

마음이 베어버린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