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에서 광고하기
당신의 광고 ‘효율’은 어떻습니까?
박 두 현
글로벌미디어팀 차장 / doo.park@hsad.co.kr
새해가 왔다. 먼저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전해~’드린다. 허나 덕담을 나누며 반기는 새해 분위기와는 거리감 있게 2016년이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올해는 사회 전반에 장기화된 불황의 그늘이 어떻게 실체화되느냐 두려움이 크다. 아마도 광고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 두려움은 더할 것이다. 함부로 말하자면, 브랜드나 제품의 원천적인 문제가 불황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단순히 광고 메시지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어떤 길도 쉽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미디어 부분도 마찬가지다. 미디어는 기술발전에 힘입어 불과 1년 전에 썼던 매체 전망이 무색할 만큼
매체환경과 소비자 행태 변화가 극심하다. 매스미디어로서 가장 예측 가능성이 높았던 TV마저 오늘과 내일의 상황이 다르니 할 말 다했다. 더욱이 그런 변화무쌍한 매체환경에 더해 불황을 이유로 거세게 요구 받는 매체 효율성 개선은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정말 어렵게 따온 예산인 만큼 이전보다 더 좋은 효율로 잘 나올 수 있도록 꼭 부탁드립니다.” 매우 공격적이지만(?) 공손한 광고주의 요구가 연초 분위기를 억누른다.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담긴 창의적 매체 제안보다는 ‘많은 보너스’가 더 평가 받는, 지금 미디어의 분위기는 딱 그렇다.
효율 맹신주의
미디어는 사실 오랫동안‘ 효율’을 가장 큰 무기로 사용해왔다. 현대사회의 덕목인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든든한 시청률 시스템을 바탕으로 광고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리고 이것은 그 자체로 곧 광고를 상징하게 됐고, 결국 TV가 광고의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획득된 노출량이 경쟁사, 동기간 집행 광고주, 그리고 타 대행사보다 우수한가 아닌가를 측정해 효율을 비교했고, 과학적 결과 지표로서 광고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했다. 한때 광고는 이런 특성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과학적 분석 산업’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예술을 닮은 제작과 함께‘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효율이 종종 발목을 잡는다. 효율, 다시 말해‘ 통계 데이터’는 현대사회를 있게 한 주인공에 다름없다. 현대사회는 많은 부분들을 숫자로 설명할 뿐 아니라, 통계로 설득하는 일로 시작되고 끝난다. 통계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영어 스테티스틱(Statistics)의 어원은 스테이트(State)로 19세기에 등장한 이 단어는‘ 대단위 영토 국가’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통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통치체계를 그대로 경영방식으로까지 물려받은 현대의 대규모 기업들은 거대해진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 많은 부분에 통계를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20세기 초에 나타난‘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모두 통계를 기반으로 한 노동효율을 극대화하는내용들이며, 지금까지도 이를 통한 성공신화는 현대사회를 아우르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통계를 기반으로 발전해온 현대사회 속 우리의 삶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상황이 가져다 준 위기감은 그간 합리적 효율을 통해 안정적으로 성장하던 통계의 신화를 그 이상의 성장으로 만들어 달라는 맹신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삼단 논법 식으로 풀어 보자면‘ 효율이 그간 성장을 이끌었다. 최근 성장이 더디다. 그러므로 효율을 좀 더 타이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맹신 때문에 요구 받는 효율은 최근의 광고, 그 중에서도 미디어 부분에서 이제 그 수위가 위험할 정도다.‘ 효율, 효율’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심지어 어떤 제안에는 단순히 효율에 관한 한 줄만 미디어의 제안 명목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왜’에서 출발하는‘ 기획’이 사라져버린 설득은 맹신에 입맛을 맞춘 공산품밖에 되지 않는다. 기본적인 효율만 받쳐준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광고 효율에의 맹신, 그것은 광고와 관련해 고민돼야 할 소비자의 인식이나 광고의 사회적 작용 등의 요소들을 효율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해석하고 가치를 매기도록 함으로써 광고 자체를 소거해 버린다. 언론사 홈페이지에 한도 없이 붙은‘ 효율성 높다’는 그 광고들이 한 번이라도 광고로서 정상적인 작용을 했었나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효율만이 최선의 가치일까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원시시대를 살고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해안의 콰키우틀족은‘ 포틀래치’라는 일종의 선물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혼인이나 성년식이 있는 날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모아 선물을했어야 하는데, 이 선물의 크기와 초대한 사람의 수를 통해 명예와 위세를 과시하고, 결국 이 과정을 거치며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이 그 부족의 추장이나 지도자가 됐다고 한다. 겉으로만 보면 권력을 향한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비효율과 낭비성이 그들이 원시성에서 기인했다고 서구의 첫 발견자는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꼭 효율을 ‘ 합리성의 최우선’으로 보아야 할까, 그래서 인풋(Input)을 초과한 아웃풋(Output)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성이라며 저 문화를 정의 내려야 할까? 뒤집어 생각해보면 개인의 재산이 파산돼야만 정치적 의미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건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골치 아픈 돈을 중심으로 한 국가권력의 형성을 견제하는 우수한 제도로 볼 수도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상식일 정도로 욕망 때문에 돈과 복잡하게 얽힌 권력 시스템을 가진 우리가 극히 이기적인 보수성에 기대어‘ 저들에 비해 우리는 합리적이다’라고 주장할 근거는 단언컨대, 없다.
지난해 기생충학자이자 방송에서도 유명한 서민 교수가 블로그를 통해 만우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소위‘ 인터넷 낚시 기사’들을 흉내 내어‘ 서민교수, 고래회충 감염 입원, 충격!’이라는 제목 아래 얼토당토않은 얘기들을 올렸는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제목만 보고 그의 건강 상태를 물어왔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많은 정보량을 감당해내기 어려워 제목만으로 언론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과 같은 에피소드로, 이 역시 효율성을 가장 앞에 둔 현대사회의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단문 메시지 중심의 소비행태 속에서 네이티브 광고 같은 툴을 통해 마케팅의 가치를 찾으려는 것도 물론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글이 사라지고,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행복일 수 있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로 앞에 놓인 장애물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 나갈 수밖에 없다. ‘효율’은 과연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최우선시돼야 할 가치일까? 한번쯤 생각하면서 2016년을 시작했으면 한다.
'Archive > Webzine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01-02 : HSAd News (0) | 2016.03.14 |
---|---|
2016/01-02 : Curation Conversation (0) | 2016.03.04 |
2016/01-02 : 고전 주택 산책할까요? (0) | 2016.03.04 |
2016/01-02 : 이 세상 모든 ‘주님’들을 위한 Tip (0) | 2016.03.04 |
2016/01-02 : 食思 - 그 여섯 번째, 엄마의 요리 (0) | 2016.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