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6일 밤, 저는 <싱잉인더레인(Singing in the rain)> 노래에 맞춰 춤추는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음악분수의 물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데자뷰와 같은느낌이 스치더군요. 2003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지털 전시회 COMDEX의 마지막을 보러 방문했던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에서도 같은 노래, 같은 분수 앞에 서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11년만의 데자뷰는 ‘CES 2014’가 한창 진행중인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로 들어서는 순간 사라졌습니다. 휘황한 네온 사인으로 반짝이는 밤이 지나가면 도시는 2014년 현재, 세계 IT기술의 최전선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비록 PC가 주도하던 첨단기술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지만, 훨씬 다양한 형태로 모양을 바꾼 IT 기술들이 숨 가쁘게 자신의 미모를 뽐내고 있는듯했습니다.
매년 1월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는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최신 제품과 기술을 발표하는 장입니다. 전 세계 언론은 기자들을 파견해 최신 트렌드를 보도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세계 각국의 관료·투자가·마케터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투자처를 물색하기 위해 몰려듭니다. CES를 보면 최소 1년, 최대 3~4년 후의 세계 IT시장을 주도할 기술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올해 CES에도 3,200개가 넘는 제품이 200만평방피트에 달하는 전시장을 가득 메웠고, 150여 개국에서 온 5,000여 명의 기자들이 신기술의 등장을 속보로 전하려 애썼
습니다.
그 수많은 제품과 정보의 홍수 속에 한국에서 간 참관인의 관점에서 눈에 띄었던 몇 가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바로 주인공이에요!’라고 외치듯 컨벤션센터 중앙을 점령하고 있는 LG전
자와 삼성전자, 모터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노스홀(North Hall)을 꽉 채운 자동차 메이커의 약진, 그리고 포화돼가는 스마트폰 시장의 다음을 노리는 웨어러블(Wearable) 기기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었습니다.
이들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많이 다루어졌으니 인터넷 검색창에 맡기기로 하고…… 오늘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혁신’이라는 CES의 상징성에 걸맞은 2가지 제품에 대해 살펴보
고자 합니다.
‘파괴’라는 얼굴의 혁신
컨벤션센터 가운데에 중계부스를 설치하고 이번 CES를 24시간 실시간 생중계한 대표적 테크 미디어 엔가젯(Engadget)은 CES 주관사인 CEA(Consumer Electronics Association: 미국가전 협회)와 제휴해 ‘Best of CES Awards’를 시상했습니다. CES공식 어워즈인 이노베이션 어워즈(Innovations Awards)와 비교해 숫자는 적지만, 소비자의 의견이 적극 반영돼 조금 더 대중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상의 실물 트로피가 흥미롭습니다. 겉으론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트로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3D 프린터로 인쇄된 트로피라는 점입니다.
일반 프린터가 활자나 그림을 평면 종이 위에 2차원적으로 인쇄하는 것과 달리, 입력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3차원의 입체물품을 만들어내는 3D 프린터는 <Economist>에서 ‘제 3차 산업혁명을 가져올 기술 중 하나’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초 국정연설에서 거의 모든 제품의 생산방식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기술로 언급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초기의 폭발적 관심에 비해 3D 프린터 산업의 성장은 아직 더딥니다. 소재를 사출해 겹겹이 쌓아 입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3D 프린터의 원리에 따라 소재의 종류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커다란 덩어리를 깎아 만드는 절삭형 방식은 복잡한 형태를 만들기 어렵다는 단점 때문에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생산 속도와 대량생산 측면에서는 기존 제조방식에 비해 열세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3D 프린터와 카트리지 소재의 가격인하가 필수적입니다.그런 점에서 이번 CES에서 선보인 3D 프린터 기술은 큰 걸음을 한 발 내디딘 듯한 느낌입니다. CES 혁신상의 주인공인 폼랩스(Formlabs) 사의 폼1(Form1)은 세계 최초의 고해상도 데스크톱 3D 프린터를 표방하며 3,299달러의 가격을 제시, 대중형 고해상도 시대를 열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던 제품가격이 적게는 수십만 원대까지 내려옴으로써 3D프린터는 이제 소비자 곁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3D 프린터로 시작되는 제조업 혁명이 곧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대중들이 3D 프린터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기술이 가져오는 파괴력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혁신적 기술’은 기존 카테고리 안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카테고리 자체를 없애거나 창조할 수 있는 힘입니다. 스마트폰의 등장이 노키아와 닌텐도 같은 거인들을 한 번에 몰락시켜 버렸 듯, 진정한 혁신은 다른 산업을 소멸시킬 만큼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인 맞춤형 제품의 폭발적 증가나 1인 제조업의 등장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이나 설계산업의 변화 또한 당연합니다.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중국 등으로 몰려들었던 제조공장
이 3D 프린터를 장착한 선진국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미국 정치가들을 설레게 합니다. 만일 3D 프린터가 대중화된다면,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레코드숍에 가서 CD를 사지 않고 음원을 다운하는 것이 당연해졌듯이 소비자들이 완제품을 사지 않고 3D 설계도를 유료로 다운하여 개인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인터넷의 등장이 미디어의 개인화를 가져왔다면 3D 프린터는 제조업의 개인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이라는 얼굴의 혁신
CES 2014에 참가한 관람객들이 직접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제품은 레이저(Razer) 사의 나부(Nabu)였습니다. 50%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엔가젯의 ‘People’s Choice Award’를 차지한 이 제품은 어려운 기술만이 혁신의 전부가 아니며, 인간을 향한 아이디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헬스 & 피트니스 분야에서 웨어러블 기기, 특히 스마트밴드들은 LG의 라이프밴드 터치(Life Band Touch)를 비롯해 ‘Engadget Best of CES 2014’상을 수상한 제이버드(JayBird)의 레인(Reign)까지 참으로 다양하게 전시됐습니다. 타 제품들과 비교해 기술적 차별점이 거의 없었던 레이저 사의 나부가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된 이유는 단 하나, OLED 화면이 밴드의 앞과 뒤에 하나씩, 모두 2개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스마트밴드는 운동량?수면시간 등의 개인 생체활동정보를 알려줍니다. 스마트폰 수신전화나 문자정보를 확인하고 음악을 듣는 등 스마트워치 기능이 추가되거나, 주위의 친구들과 연결이 가능한 소셜 기능이 추가돼 더욱 다양한 기
능들이 구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소모한 칼로리량, 지금 내게 전화를 한 사람의 이름 등이 자신도 모르게 팔목 위에 디스플레이되고 내 앞에 앉은 사람이 그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될 때, 기분이 어떨까요?
나부는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팔목 위 OLED 화면에는 ‘전화· ‘문자’ 등을 나타내는 아이콘만 노출되고, 상세내용은 팔목 안쪽의 OLED 창에 나타나 자신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정보를 혼자만 볼 수 있게 한 거죠. 그것이 바로 나부에 2개의 OLED 디스플레이가 필요했던 요인이고, CES에 참가한 관람객들이 무릎을 치며 몰표를 던진 이유입니다.
아마도 2개의 디스플레이를 설치하는 것은 생산설비만 교체된다면 어렵지 않게 흉내 낼 수 있는 기술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른 회사가 흉내 낼 수 없는 신기술이 무엇일까 혈안
이 되어 있을 때, 슬쩍 웃으며 ‘이런 건 생각해 봤어?’라고 물어보는 듯한 나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될 겁니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가장 괴로운 점의 하나는 나의 개인정보
가 자꾸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정보과잉의 세계에서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내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다는 아이디어 하나에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한 것은 기술의 혁신은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더구나 별다른 전문지식이나 기술을 가지지 못한 저와 같은 디지털 소시민에게도 혁신의 아이디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하니까요.
최 영 운 | 디지털캠페인팀 팀장 | firecloud@hs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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