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 글로벌 시장 개척과 늘 함께했던 LG애드
오늘날 LG는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선도 경쟁을 펼치고 있다. 우리 회사의 역할 또한 LG 브랜드를 글로벌 선도 브랜드로 포지셔닝하고, 경쟁 우위 브랜드로서 성장을 이어가도록 하는 방향으로 강화되고 있다. 우리 회사는 LG그룹이 ‘국제화’를 강조하며 해외 시장에 첫 발을 내딛던 초창기부터 그룹의 성장전략에 부응해 왔다. 1984년 LG애드의 탄생 배경에도 외부 광고주 영입과 더불어 ‘국제화’라는 당면 과제의 실현이라는 큰 목표가 있었다. 사보 편집실에서는 재임 시절 우리 회사의 국제적 감각과 글로벌 대행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던 백창선 전 LG애드 이사를 만나, 시간을 196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우리 회사의 글로벌 광고대행의 단초를 마련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국제광고 대행업무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LG그룹에 입사한 것이 1969년 5월 1일이었어요. 당시 락희화학공업사에 선전과가 있었고, 금성사의 영업을 담당했던 금성판매(주)에는 광고부가 있었죠. 락희화학 선전과는 자사 광고만 했고, 금성판매 광고부는 금성사 광고를 주로 하면서 1968년에 설립된 호남정유의 광고를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금성판매 광고
부에 입사하게 된 이유는 훗날의 호남정유 광고를 대비해 영어 능력을 갖춘 직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금성판매 광고부에는 문달부 부장, 김문웅 과장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미대 출신이었어요. 기획파트에는 3년 가까이 된 선배 사원과 저, 그리고 10명 정도의 디자이너들이 있었죠.
모두들 열정적으로 일하면서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낭만이 있었어요. 토요일이면 부장님이 지갑을 털어 전 직원들과 영화감상도 하고 낚시도 함께 다녔는데 가족을 동반할 때도 있었어요. 당시 그룹 사훈이었던 ‘인화단결’을 몸소 실천했다고나 할까…. 결혼·백일·이사 같은 행사가 있으면 다들 몰려가서 축하해 주고는 했는데, 당시에는 거의 집으로 초대하는 분위기였으니 그만큼 더 친해지고 결속력도 강해졌지요.
제가 국제 업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아마 1972년인가에 있었던 호남정유 광고 PT건이었을 겁니다. 당시 호남정유는 51:49의 합작회사였기에 PT에 미국 측 임원들도 참석했어요. 럭키 선전사업부 시절이었는데, 영어가 능통하셨던 홍성언 전무(후에 럭키개발 사장)께서 선전사업부를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 측은 김문웅 당시 과장과 저, 그리고 박영태 디자이너 등이 밤을 새워 광고기획과 광고안
을 만든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프레젠테이션 과정에서 당시 광고주로 있었던 신인섭 차장(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결과는 광고안을 약간 수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아주 성공적으로 ‘청춘의 샘’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었죠.
1973년에도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당시 선전사업부장이셨던 이헌조 전무(후에 LG전자 고문)께서 10페이지가 넘는 영문 PT 발표문을 댁에서 빨간 볼펜으로 엄청 고친 후 주신 일이 생각나네요. 영어 실력도 훌륭하시지만 표현을 잘 수정해 주신 데 감사했었습니다. 그 해 석유파동이 있었는데, 기름을 아끼자는 정부시책과 범국민적인 캠페인에 맞춰 ‘석유를 아낍시다’라는 컨셉트로 광고를 기획하고 제작하게 됐죠.”
지난 신인섭 교수님 인터뷰에서 1975년에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각 그룹들의 해외 광고 수요가 생겨났고, 럭키그룹이 해외 광고의 가장 선두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해외에 집행되는 광고를 집행하게 되면서 겪었던 일화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78년 희성산업 시절 기획부장이 되어 그룹 및 전사의 광고를 맡게 됐습니다. 당시 정부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우리 그룹도 해외 광고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던 시절이었어요. 그해 4월 희성산업 이사로 오신 신인섭 씨가 개리 렉터(Gary Rector) 씨를 스카우트해서 영문 카피를 맡겼습니다. 개리 씨는 평화봉사단원으로 왔었는데, 70년대 말부터 83년도까지 약 6년여 함께 근무한 것 같네요. 한국어와 한글을 정말 잘했어요. 한번은 엘리베이터에서 타 회사 직원이 용모를 갖고 한마디 했는데, 개리 씨가 우리말로 ‘그래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던 기억이 나네요. 그 후로 한동안 같은 빌
딩 사람들이 개리 씨 앞에서 함부로 말을 못했지요. 개리 씨는 오래 전에 한국인으로 귀화해 우리나라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Michael)과 제프(Jeoff)라는 미국인이 있었고, 제가 퇴직하던 91년 말까지 외국인 카피라이터 1`~2명이계속 근무했었습니다.
기억나는 게 또 있네요. 70년대 말 우리 그룹광고비가 100만 달러 정도였을 때 달러 가치가 급상승해 경제계가 환차손 발생으로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미디어렙(Media Rep)들이 곤혹을 치르면서 보상방법이 없겠느냐고 사정해서 당시 김민희 상무님(후에 LG애드 사장)에게 보고를 드렸더니 전부 계산해서 보상해주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타 그룹이나 큰 회사에서는 보상을 해주지 않았었지요. 미디어렙들이 엄청 고마워하는 건 물론이었고, 외부에도 소문이 나서 기업 이미지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광고주나 대행사들이 미디어렙에게 보통 3개월 어음으로 광고비를 지불하고 미디어렙은 3개월 후 현금화해서 매체로 송금하는데, 그 기간 동안에 갑자기 환율이 치솟으면 환차손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자매사에 환차손을 청구하면서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다음 해에도 환차손이 많이 발생해 또 보상해줬는데 그 해엔 타 주요 그룹에서도 보상을 했다고 들었어요. 당시 그룹의 해외 광고안은 주로 그룹의 3대 업종인 화학·전기전자·서비스를 소개하고, 한국 내에서의 그룹의 위상을 알리면서 한국 내 비즈니스의 가장 훌륭한 파트너는 LG그룹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컨셉트였어요. 광고 하단엔 자매사들의 회사명이 나열됐지요. 초기엔 주로 비즈니스위크·포브스·포춘 같은 비즈니스 잡지에 기업 이미지 광고를 게재하다가 후에 예산도 증가해서 타임·뉴스위크 등의 시사지도 이용했습니다.”
1980년대는 다수의 광고회사들이 해외의 유수한 광고회사들과 업무제휴를 맺고 국제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때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LG애드가 BBDO와 업무제휴를 맺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1984년 LG애드로 바뀔 때쯤은 글로벌화가 시급한 시대적 요청이었던 만큼 당시 국내 대행사들 사이에 선진 광고회사와의 업무제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LG애드 또한 1983년부터 세계적인 광고대행사와의 업무제휴를 검토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985년 1월에 변규칠 사장과 당시 세계 6위였던 BBDO월드와이드의 제프리 와일드(Geoffrey Wild) BBDO 아시아퍼시픽 회장이 업무제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BBDO를 선택했던 이유는 출중한 크리에이티브 역량을 보유한 회사(Creative Excellence Agency)였기 때문이었죠. 마이클 잭슨을 모델로 한 펩시콜라의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 광고는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하던 펩시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찰리 채플린을 모델로 했던 애플 컴퓨터 캠페인도 유명했고요. 타 국제광고대행사들은 대부분 지분참여를 요구했는데, BBDO는 우리의 정서를 이해하고 업무제휴만 했습니다. 우리가 업무제휴
를 했던 목적은 광고주 소개, 사원연수, 마케팅 정보교환 등이었습니다. BBDO와는 관계가 더욱 발전해서 1991년 2월 김민희 사장과 당시 아시아퍼시픽 회장이었던 아서 스터게스(Arthur Sturgess) 간에 LG/BBDO Division 계약을 체결하는 데 이르렀죠. 향후 독립회사를 만들기 위한 전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 이슈였던 상호 광고주 소개에서 서로 기여도가 낮아 합작 회사로 발전은 못했습니다. 프리토레이(Frito Ray)를 BBDO로부터 소개받아 동양제과의 오리온 프리토레이 제품광고를 했고, 후에 BBDO와 정화철 팀이 공동으로 PT를 해서 동양제과의 초코파이·오징어땅콩 등 많은 제품광고를 맡게 됐습니다. 그 전에 이재헌 대리(현 WBC대표)가 달라스 소재 트레이시락(Tracy Lock)에서 2개월간 광고연수를 받고 온 일도 있었고요.
그룹 및 회사의 국제광고 업무 외에 외부 광고주 유치에도 힘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1980년대 중후반기부터는 회사 전체가 외부 광고주 유치에 열을 올렸습니다. 제가 본부장 시절이었는데요. 1985년 이후 유치한 외부 광고주를 위한 팀을 꾸리며 정화철 씨를 6월 1일자로 부국장으로 재입사시키면서 약 10명이 함께 입사했습니다. 윗분과 엄청난 마찰을 겪었지만 결국 허락하셨지요. 석태홍·전홍석·유재원·김규선·맹경육 등 AE와 박성수 카피, 강인순 디자이너 등이었지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뉴욕항공·네덜란드항공·싱가포르항공·에어프랑스·말레이시아항공 등이 영입됐습니다.
1986년 3월엔 일화 맥콜을 영입했는데, 조용필을 모델로 한 CF를 통해 한국방송광고대상을 수상했고, 매출을 급신장시켜 코크(Coke)와 비슷한 마켓셰어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기존 동양제과와 함께 신한 Int’l·하얏트호텔·새한제약·레고 코리아·이랜드 등 도 영입됐습니다. 다음해 입사한 이원형 부국장은 미원을 성공적으로 영입했지요. 프레젠테이션에서 마케팅부 박정원 사원이 출연해 소비자·대리점·시장 상인들을 인터뷰한 영상은 광고주의 큰 호감을 얻었어요. 옥달혁 부국장 등의 국제팀은 이태리무역공사, BBDO가 소개한 치토스·피자헛 외에 1989년에 한국관광공사 PT에 성공했었고요. 일화·미원·한국관광공사 모두 연간 50억 광고주들이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열정과 도전정신, 노력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최선을 다했던 만큼 지금 생각해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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