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04 : 법고창신(法古創新)- “자랑스런 역사를 알아야 애사심이 생긴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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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고창신(法古創新)

 

2월의 어느 날,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가 HS애드로 보낸 우편물이 도착했다.
우편물 속 서신에는 ‘우연히 서류를 뒤적이다가 1980년에 조선호텔과 당시 희성산업이 광고대행 계약을 맺은 서류를 찾았다’는 글과 함께, HS애드가 처음으로 외부 광고주를 영입했던 사례이므로 HS애드에게는 의미 있는 자료라는 생각으로 보낸다는 우편물 발송의 목적이 적혀 있었다. 서신과 함께 동봉된 문서에는 9페이지짜리 프레젠테이션 텍스트(영문) 사본과 함께, 조선호텔 마케팅 디렉터인 로버트 챔벌린(Robert W. Chamberlin)이 당시 희성산업 이사였던 신인섭 교수께 보낸 서신 사본이 있었다. 타자기로 타이핑된 서신인데, 영문으로 ‘After careful consideration, we have decided we would like to retain your organization as our advertising agency for 1981’이라고 적혀 있었다.
LG의 체계적인 광고활동의 효시가 1962년 락희화학 내에 광고·홍보업무를 전담했던 선전실의 발족이라면, 그룹의 광고·홍보업무 총괄 조직을 더욱 전문화된 광고회사 체제로 개편한 시점은 1978년 럭키그룹 홍보선전실 희성산업(喜星; 럭키의 한문 樂喜와 LG전자의 전신인 金星社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이름)의 탄생이었다. 이후 희성산업은 1984년 독립법인 LG애드의 출범을 거쳐 오늘날의 HS애드로 이어졌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희성산업은 조선호텔 영입을 계기로 자매사들의 광고만을 담당하던 영업방식에서 벗어나, 뒤에 AT&T, U.A.L 등을 신규 광고주로 영입하는 데 잇따라 성공하게 된다.
HS애드 사보 편집실에서는 1980년 12월 15일 조선호텔에서 이뤄졌던 프레젠테이션에서 직접 발표자로 나섰던 신인섭 교수를 만나, 조선호텔 영입 당시의 상황과 희성산업 광고사업부의 광고대행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대한민국 최고 위상의 클라이언트 조선호텔 영입

자매사 광고대행만 하던 희성산업 광고사업부의 첫 외부 광고주로 조선호텔 영입에 나서게 됐던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회사가 발전하고 임직원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국계 광고주를 영입해야겠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외국계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우리나라에 몇 개 없었죠. 그래서 조선호텔을 붙잡아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당시 조선호텔은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투자사였습니다. 항공사 승객들을 머무르게 하려는 목적이었지요.
포드 전 미국 대통령도 방한 시 조선호텔에 머물렀고, 대한민국에서 조선호텔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조선호텔 광고를 대행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클라이언트의 광고를 대행한다는 의미였어요. 희성산업이 만들었던 국내외 광고와 조선호텔에 제안하는 광고들을 가지고 30분짜리, 지금 생각해도 멋있는 프레젠테이션을 했습니다. 슬라이드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35mm 슬라이드 프로젝트를 썼었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신식이었으니까. 프로젝트 담당자는, 백창선 당시 기획부장하고, 지금은 홍익대 교수로 있는 안상수 씨가 디자이너 역할을 했고, 조선호텔 외국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영문 광고를 만들어야 했기에 게리 렉터(Gary Rector)가 영문 카피를 썼지요.”

 

해외 광고의 선두, LG

외국인 카피라이터가 그 당시에도 재직했었다는 사실이 좀 놀라운데요. 희성산업 광고사업부 시절에도 글로벌 광고제작 수요가 있었나요?

“1975년도에 종합무역상사라는 제도가 만들어졌죠. 종합무역상사를 지정해 놓고 수출을 독려했는데, 값싼 금리로 재정적 지원을 해줬죠. 그러면서 70년대 말부터 해외 광고 수요가 생겨났어요. 그리고 럭키그룹이 해외 광고의 가장 선두에 있었습니다. 78년도에 30만달러 정도의 해외 광고를 했을 거예요. 당시에는 외국인을 채용한다는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임직원들에게 영어도 가르쳐준다는 조건 하에서 게리 렉터를 채용했어요. 주 목적은 영문 카피라이터로 활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리 렉터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다 희성산업에서 일하게 됐는데, 한국 사람도 영어를 할 줄 알면 영어 카피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지금은 국적을 바꿔 한국사람이 됐죠.
당시 해외 광고는 직접 외국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아니었고, 바이어들을 상대로 했어요. 수출 창구가 미국의 바이어들이었는데, 한국산 제품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미국의 바이어들이 한국에 정신없이 찾아오던 때였죠. 비즈니스 잡지에만 광고를 했는데, <비즈니스위크><포브스> <포춘> 하고,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나오던 잡지까지 몇 개 잡지에 광고를 했죠. 제품 광고가 아니라 기업 광고를 했어요"

 

 

한국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희성산업

희성산업 광고사업부가 발족한 해가 1978년이니, 약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후배 HS애드인에게 희성산업 홍보선전실 시절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그 당시 희성산업은 한국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였다고 봅니다. 광고제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광고인의 꿈은 조일광고상 대상을 받는 거였어요. 그런데 1974년 박상구가 만든 동서문화사 기업PR 광고가 조일광고대상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1978년 조일광고대상에서는 조봉구·송태원·한종인 등이 출품한 금성출판사의 중고생 세계문학전집 광고가, 1981년에는 박현주가 아이디어와 카피를 맡았던 대일파스 광고가 대상을 수상하며 국무총리상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최고라고 하던 조일광고대상 그랑프리를 수상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회사는 희성산업밖에 없었죠. 그 당시 ‘목요교육’이라는 것을 했는데, 제가 디자이너들한테 욕을 실컷 먹었을 거예요. 광고회사 임직원이면 누구나 광고회사의 죽고 살고를 결정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디자이너들한테도 과제를 주고 교육 때 시장 배경부터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했으니까. 캠페인 중에 기억나는 에피소드도 많아요. 오지명과 오미연씨가 광고모델로 출연한 세탁기 광고가 있었는데, 헤드라인이 ‘애처지수 100점’이었죠. 세탁기를 부인에게 사주면 애처지수 100점이라는 뜻이었는데, 어느 날 YWCA에서 전화가 왔어요. 대뜸 ‘광고를 당장 내리세요’라면서, ‘돈이 없어서 세탁기를 못 사주면 그 사람은 애처지수 죽어도 100점 못 받습니까라’고 하더라고요. 그 광고 그래서 내렸어요.”(웃음)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광고제 수상작 탄생

교수님께서는 호남정유 별표 백등유가 1974년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광고제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을 때 호남정유 측 담당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출품하게 되었나요?

“클리오 국제광고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할 때 저는 호남정유에 광고주로 있었고, 광고제작은 락희화학 선전사업부에서 맡았습니다. 당시에는 클리오 광고제의 권위가 세계 최고였어요. 수상작인 호남정유 별표 백등유 TV광고 ‘작은 별’편은 작고하신 김문웅이라는 분이, 지금 말로 하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했고, CF 프로덕션 한일기획에 있던 예명이 ‘추남’이라는 분(본명 : 배승남)이 촬영을 했죠. 엄마 역할의 모델이 나오는데, 애초 부부 컨셉트였지만 남편이 선원이어서 촬영 당시 국내에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한 전략이 숨어있는 광고였어요.
별표 백등유가 냄새와 그을음이 없어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 셀링포인트였고, BGM은 모차르트의 ‘작은 별’이었는데, 브랜드인 ‘별표’하고 서양 사람들이 누구나 아는 ‘작은 별’하고 앙상블이 제대로 맞았죠.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자녀로 나오는데, 그 당시 정부 시책으로 가족계획을 하던 때였고, 흐름이 3남 2녀에서 2남 1녀로 넘어가던 무렵이었어요.
광고의 목적이 틀림없고, 제품의 특성이 틀림없고. 표현적인 부분도 틀림이 없었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의 시놉시스, 즉 제작의도를 영어로 잘 썼다는 겁니다.”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게끔 만드는 역사'

국내 광고학계와 업계 모두의 산증인이라고 할 만큼 한국광고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LG 광고의 성장과 성공을 위해 일하셨던 선배로서, 광고계의 스승으로서 후배 광고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희성산업이 1978년 JWT에 의뢰해서 일본 JWT로 매년 5~6명씩 일주일간 연수를 보냈어요. 당시 일본 JWT 사장이 톰 서튼(TomSutton)이었는데, JWT가 유럽에서 자리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죠. 일본 시장이 힘드니까 JWT에서 일본 사장으로 보냈죠.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한국에서도 JWT가 사업을 할 것을 대비해서 한국에 네트워크를 갖기를 원했어요. 희성산업으로서는 글로벌 광고를 할 줄 알아야 발전할 수 있겠다 싶었고, JWT와 희성산업의 이해가 맞았던 거죠. 제 기억으로는 JWT에 돈 한 푼도 안 냈어요. JWT에서 (엄청난 시간) 투자를 한 거죠.
참고로 말하자면 1970년대까지 JWT는 세계 최대의 미국 광고회사였고 ‘광고대학(University of Advertising)’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교육·훈련에 유명했습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글로벌화에 대한 의식을 철두철미하게 가져가야 한다는 점이에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식을 확고하게 가져야 하고, 역사관도 강조하고 싶어요. 지금은 신입사원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애사심을 갖고 진력을 다해 일하게끔 하려면 희성산업, LG애드를 거쳐 오늘날의 HS애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줘야 해요.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회사였다는 것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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