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2 : The Difference - History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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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fference   History

위대한 역사보다 신선한 해석이 주인공이다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드라마 <위대한 세기>는 TV를 통해 문화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여준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역사·문명 공부와 함께 흥미진진한 눈요깃거리를 주고, 이렇듯 당국이 ‘노이즈 마케팅’도 해주면서 이슬람문명권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바꾸는 역할을 한 셈이다.

 

<차이와 반복(Diférence et Répétition)>.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저서 제목으로 나는 이 제목을 참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여 말하고 다닌다. 사실 책은 두꺼워 아직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고, 질 들뢰즈가 결코 ‘즐~들뢰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목을 나는 역사적 소재를 이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는 생산과정에서, 혹은 그런 과정을 거친 작품을 평할 때 자주 활용했었다.
최근 작품생산에 있어 역사적 소재를 활용한 작품들이 어디서건 인기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이 합성되어 ‘팩션(Faction)을 낳아 대중의 문화시장에서 부지런히 소비되고 있다. 학계에서도 많은 학자·연구자들이 단순한 트렌드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한 ‘공부거리’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 구도를 살펴보면 한편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며 교육과정과 일상 속에서 ‘반복’돼 자리 잡은 ‘상식’이 있고, 한편에서는 이 ‘상식’에 새로운 재미, 즉 ‘차이’를 연출해 제3의 작품을 만들려는 것이다. 즉 저자를 알 수 없는 <춘향전>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영화 <방자전>이 있다. 결국 이런 작품들은 관객의 이런 반응을 은근히 기대한다. '어라! 방자가 깨는 거야, 이 영화가 깨는 거야?’.

여인의 속살이 술탄의 제국을 압도한다

이러한 류의 작품생산과 소비의 유행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터키TV에서 2011년부터 방영중인 <위대한 세기>도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이 번영을 누리던 16세기에 46년간 통치를 했던 대제 술탄 슐레이만 1세 시절을 그리고 있는 이 드라마는 터키 인근의 중동지역과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 유럽의 프랑스·러시아·체코 등 25개국에서 방영됐다. 완성도 높은 대본과 빼어난 영상,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돼 무려 1억5000만 명이 시청을 한다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향수는 불티나게 팔리고, 터키 관광객도 급중하고 있다고 한다.

보아하니 터키어를 모르는 한국의 ‘드라마 폐인’들은 이 드라마가 재빨리 영미권의 ‘드라마 폐인’들에게 입수되고, 그들에 의해 영어자막이 ‘부착’되고 유튜브에 오르기를 학수고대하는 모양이다.
그들의 역사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고 반복되어져 이제 ‘상식’이 된 술탄의 정복 활동이 드라마로 다시 태어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인기의 비결은 다른 곳에 있다. 오히려 <위대한 세기>의 제작진은 성노예 알렉산드라가 술탄이 총애하는 애첩 휘렘이 되고 왕비가 되는 과정에 소비자를 현혹시킬 총알을 장전한 듯하다. 여성의 문화에 관대하지 못한 문명권, 혹은 그러한 것들을 금기시하는 이슬람권의 전통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곳에서 태어난 이 드라마는 당시 여성들이 입었던 옷부터 들었던 음악, 그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술탄은 함께 침소에 들 여인을 어떻게 선발했는지, 그리고 그녀들에게 어떤 관심과 애정을 쏟았는지 등을 샅샅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술탄과 후궁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드라마의 백미로 회자된다. 그러자 터키 당국은 난리가 났다. 드라마는 터키의 문명과 풍속을 조율하고 있는 이슬람의 교리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이었다. '그래그래, 눈은 즐겁겠지만, 여기는 이슬람국가다!’ 급기야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TV를 통해 문화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여준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사법당국이 이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나섰으니, <위대한 세기>는 역사·문명 공부와 함께 흥미진진한 눈요기에 더불어 당국이 ‘노이즈 마케팅’도 해주고, 이슬람문명권에 대한 기존 이미지의 전환을 연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 셈이다.

베끼되 다르게 베껴야 재미가 있다

다시 ‘차이와 반복’ 이야기를 해보자. 오늘날 역사드라마의 특징을 대변해주는 듯한 이 말의 철학적 근거는 알고 보면 기원전 4세기경에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담긴 그의 이론은 오늘날 ‘차이’에 의한 역사 해석을 바탕으로 ‘큰 거 한방’을 날리는 사극드라마의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면이 많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은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듯 ‘반복행위’다. 예를 들어 ‘이 문서 복사 10장!’하면 한 장을 ‘모방’하여 10장을 만들라는 것이다. 한 장의 내용이 10장에 ‘반복’되니 모방·복제·반복은 같은 뜻으로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있어 모방·복제·반복의 개념을 좀 달리 해석한다. 즉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화가에게 원래의 모델과 ‘다르게 그려라’라고 말한다.
“예술가는 모델보다 더 나은 것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시학> 25장)”.
그가 이런 주장을 한 이유는 어떤 대상을‘ 묘사한 작품’은 ‘모방하는 대상’보다 더 훌륭하고 탁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탁월’하다는 것은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Hyperechein’인데, 이는 ‘넘어서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즉 원본에 비해 모방되는 것은 보다 많이(Hyper) 소유한다(Echein)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많이(Hyper) 갖고 있다(Echein)는 것은 ‘원본에 없는 것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원본에 없지만 모방품에 얹어지는 초과적 잉여분을 ‘헤도네’(Hedone)라고 했는데, 이는 곧 즐거움, 생리적·심리적 쾌감을 일컫는다.
멀리 생각할 필요 없이 오늘날의 ‘뽀샵’을 생각해보면 된다. 차이를 생산하는 첨단기술력으로 원본과 달라진 자신의 이미지가 유포되면서 실재·원본의 존재감을 결정지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까지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 <위대한 세기>를 본다면 술탄의 여인 알렉산드라가 얼마나 비중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활용하는 창작의 열풍은 공연산업에서도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뮤지컬에서 역사의 위인을 소재로 한 ‘전기(傳記)’뮤지컬이 뮤지컬산업에 강한 전기(電氣)를 공급해주고 있다.


2009년 첫 선을 보인 창작뮤지컬 <영웅>의 타이틀롤은 안중근이었다. 무대 위 안중근의 모습은 역사책 속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영웅>에는 안중근이 노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측근에서 모시는 게이샤 ‘설희’가 등장하는데, 이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살아남은 마지막 궁녀로, 비밀 첩보원이며 일본에 파견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이런 실패의 반복 속에 마지막! 안중근이 세 발의 총성을 울리고 암전이 되자 관객은 박수를 보냈다. 무엇보다 무대가 제공하는 가상의 리얼리티와 기존의 알고 있던 역사적 지식 사이에서 알쏭달쏭했던 것이 있었는데, 안중근을 짝사랑하다 그를 위해 총에 맞아 죽는 ‘링링’이었다. 그녀 역시 가상인물로, 아무리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도 애정서사 하나 갖추지 못했다면 결코 공연산업의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머릿속의 좌뇌는 논리와 이성, 우뇌는 창의와 감성을 담당한다고 한다. 결국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양쪽의 뇌를 풀가동시키는 것이다. 좌뇌에는 역사적 지식이, 우뇌에는 그것을 차별화시켜 새롭게 빚어낼 ‘차이’의 엔진이 있어야 한다.
크리에이터들이야 골치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보는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상식이 자리 잡은 좌뇌, 그리고 ‘새로운 것’과 ‘차이’의 불꽃이 담긴 우뇌와의 교감을 위해지갑을 열고 재미를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송현민 ㅣ 음악평론가

bstsong@naver.com

공연 보고 이야기하는 남자(약칭 ‘공연 보이남’)로, 제13회 객석예술 평론상을 수상했고 이런저런 무대 연구소를 운영중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