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fference Chocolate
초콜릿, 그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
초콜릿은 태생부터 귀족이 소비한 음식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감히 근처로 갈 수 없는 최고급의 음료이자 음식이었다. 심지어 초콜릿의 원재료가 되는 카카오는 화폐로도 통용됐다.
한때 우리에게 ‘초콜릿’이란 남성의 품에 안겨 보호를 받는 청순한 여자(이미연·채시라가 광고했던)의 밀크 초콜릿, 그리고 군인들이 여자친구만큼이나 좋아하던 초코파이 등의 몇 가지 상품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벨기에의 고디바가 문을 열어 초콜릿과 관련한 다양한 음식·음료를 판매하며 제조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다.
직접 초콜릿 제조법을 배워 수제 초콜릿의 진수를 보여주는 ‘쇼콜라티에’만 해도 서울에서 손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노이하우스' '드 보브 에 갈레’등 고급 초콜릿숍은 겨울철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굳이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해도 간단한 디저트로 우리 일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치와 허영의 역사
초콜릿은 태생부터 귀족이 소비한 음식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감히 근처로 갈 수 없는 최고급의 음료이자 음식이었다. 심지어 초콜릿의 원재료가 되는 카카오는 화폐로도 통용됐다.
카카오에서 탄생한 이 매혹적인 음식의 역사는 고대 마야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야인들이 카카오를 소비한 흔적은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상형문자나 그림 속에서 카카오는 신의 음식으로 표현되고, 실제로 발견된 마야의 유물인 화병 속에서 초콜릿 성분이 검출됐다. 이후 아즈텍족이 고도의 문화를 이룩하면서 초콜릿 음료도 전승됐다. 이러한 일상적인 소비에도 불구하고 초콜릿은 귀족계층과 전사들만 즐길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초콜릿은 고급 음료, 지혜와 힘의 원천, 그리고 최음효과가 있는 음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도를 찾아 떠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통해 카카오는 처음으로 유럽사회에 소개됐고,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화폐로서의 카카오의 가치를 이용해 남아메리카를 본격적으로 식민지화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노예역사의 산물이었던 이 카카오가 다시 그들의 고향인 서아프리카로 넘어가 현재 세계 제일의 카카오 산지가 됐다는 점이다. 유럽의 식민지 정책은 아프리카에 카카오를 경작하도록 만들었고, 현재 노예제도가 없어졌을 뿐 그들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수확된 카카오는 전 세계에 퍼져 여전히 고급 디저트로 판매되고 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초콜릿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 맛이 지금과 같은 달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그러나 초콜릿 음료는 귀족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원기를 북돋우며 최음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일종의 ‘약’처럼 취급받았는데, 당시에는 후추와 향신료를 함께 넣어 마셨다.
한편 스페인의 왕비를 많이 받아들인 프랑스는 이 음료문화를 손쉽게 수용했다. 유명한 귀족 집안의 모임에서는 언제나 초콜릿을 대접했다. 사치와 허영의 궁정문화를 대표하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초콜릿 스토리가 없을 수 없다. 그녀는 초콜릿 제조업자를 자신이 태어난 오스트리아에서 데려와 바닐라와 설탕만 첨가한 단순한 초콜릿을 즐겼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프랑스의 그 유명한 ‘쇼콜라 쇼’로 추정된다.
그녀 덕택에 생겨난 ‘여왕의 초콜릿 제조사’라는 직책은 어지간한 남작의 지위보다도 더 대접받는 자리였다. 한국에도 지점이 있는 ‘드보브 에 갈레’는 마리 앙트와네트가 특별히 좋아한 초콜릿숍으로 알려져 있다.
‘귀족 식품’에서 대중화의 길로
초콜릿이 점차 대중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역시 유럽보다는 대량생산을 좋아하는 미국이 한 몫 했다.
작은 쇼콜라티에의 장인정신을 내세우기보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초콜릿을 만들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초콜릿 알을 만들어 가격을 낮춰 보급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카카오 함량을 낮추고 설탕 등의 함유를 높인 질 낮은 이러한 초콜릿을 공격하지만, 대중들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한 미국 초콜릿 산업의 혁신은 밀턴 스네이블리 허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캐러멜을 비롯한 다양한 과자를 만들어 팔았는데,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초콜릿 제조기계를 처음 본 것을 계기로 초콜릿 제조업에 뛰어든다. 모든 제품을 기계와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조립라인에서 생산하면서 대량생산을 하게 됐고, 밀크초콜릿·초콜릿 바·코코아 등을 판매했다. 특히 작은 크기의 키세스 초콜릿은 최대 인기를 누렸고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초콜릿과 욕망
초콜릿은 탐닉·욕망 혹은 섹스, 그리고 여자와 연관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미 초콜릿 음료가 탄생한 마야·아스텍 시대부터 스페인 정복자들에게조차 초콜릿은 정력을 위한 음료로 일컬어져왔고, 이것은 가톨릭 종교를 통해 ‘유혹하는 어두운 힘’이라는 이미지를 발현하게 된다. 그러나 기호식품이란 심지어 종교를 이겨버리는 습성이 있고, 실제로 아메리카의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됐기 때문에 에로틱한 이미지를 가진, 그러나 통용되는 음료로 받아들여졌다.
카사노바는 샴페인을 초콜릿 음료로 대체했는데, 그는 이를 ‘사랑의 묘약’으로 일컬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최음제로 즐겨 찾았던 칸타리스(푸른 광택이 나는 검은 곤충으로 로마시대 때부터 곤충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최음제로 사용했다고 한다)에 초콜릿을 넣어 먹었다. 프랑스의 그 유명한 사드 후작(Marquis de Sade)도 초콜릿을 신뢰하여 파티 때마다 게스트들에게 대접했다.
사실 현대 과학에서는 초콜릿이 직접적인 최음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지만, 초콜릿회사는 과학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초콜릿의 이미지를 이용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어두운 이미지가 오히려 광고효과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를 허락 하에 따먹는 것 같은 유혹의 힘.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가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고, 초콜릿회사들은 여전히 이를 이용한다. 그리고 남성들은 이를 정숙한 여성들에게 선물함으로써 그녀의 퇴폐적인 모습을 동시에 원하고, 여성들 역시 이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묘한 초콜릿을 홀짝이며 허영과 사치를 누리기를 원한 것이다. 일단 광고 속에서 초콜릿은 ‘음탕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초콜릿을 온 몸에 가득 바른 여인이 화보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광고 속 여성의 노출에 관대한 프랑스에서 쉬샤르(Kraft Jacobs Suchard)는 아예 타이라 뱅크스를 광고에 등장시켜(검은 몸은 초콜릿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이러한 초콜릿 광고가 가진 인종적인 문제도 큰 이슈다)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욕망 vs.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