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둘시네아
오늘도 나는 둘시네아를 흥얼거리며 생각한다. ‘꿈’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현실의 벽이 두려워 꿈을 포기하는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당신에게 여름은 무슨 계절입니까?”
누군가에게는 여행의 계절, 누군가에게는 파티의 계절, 누군가에게는 모기의 계절이겠지? 나에게 여름은 ‘공연의 계절’이다.
한 해도 빠뜨리지 않았던 록페스티벌부터, 다양한 컨셉트의 클래식 공연·연극·뮤지컬까지 한여름 밤은 여기저기 꿈같은 공연들로 가득하다.
그 중, 나의 비 오는 여름밤을 심히 흔들었던 공연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였다. ‘라만차(La Mancha)’는 스페인의 중남부 고원지대의 이름이다. 이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곳인데, 즉 원작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원작 <돈키호테(Don Quixote)>는 1605년 스페인 작가 미구엘드 세르반테스의 세계적인 작품이다. 뮤지컬은 단순히 소설 <돈키호테>의 주요 내용을 극으로 옮기는 대신, 작가 세르반테스의 삶을 소설의 내용과 연결시켜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2시간 50분의 긴 공연을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노래들, 또한 그 노래들을 완벽하게 불러내는 배우들의 실력이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공연을 본 지 조금 지났음에도 나는 그 노래와 노래들 사이에서 아직 서성이고 있다.
‘진실의 적은 현실’이라고 하네요
귓가에 계속 맴도는 노래는 한 4곡쯤.
첫 번째 곡은 돈키호테의 시작을 알리는 <나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다. 주인공 세르반테스가 감옥의 죄수들과 함께 돈키호테를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부르는 첫 노래. 어찌나 신나던지
내가 돈키호테가 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노래가 끝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무대로 뛰어가고 싶었다.
두 번째 곡은 <둘시네아>. 극 중 여자주인공 알돈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 돈키호테의 고백송이다. 알돈자는 돈키호테가 성이라고 착각하고 묵는 주막의 작부다. 부모에게 버려져 주막의 작부로키워진 알돈자는 노새끌이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며 사는 불쌍한 여인. 그 여인을 보자마자 반한 돈키호테는 그녀를 순결한 영혼의 레이디라 칭하며 그녀의 기사가 되겠다는 맹세를 한다. 둘시네아는 스페인어로 ‘사랑스러운 여인’쯤 되겠다. “그댈 꿈꿔왔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댈 알고 있었소. 기도로 노래로 볼 순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였소. 둘시네아~ 둘시네아~ 하늘에서 내린 여인, 둘시네아~”. 이 노래는 또 어찌나 감미로운지, 앉은 자리에서 내 몸이 다 녹아 없어져버리는 줄 알았다.
세 번째 곡은 <좋으니까>다. 이 노래는 산초의 노래다. 배트맨에겐 로빈이 있듯이, 돈키호테에겐 산초가 있다. 돈키호테가 아무리 미친 생각을 하고 미친 행동을 해도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보좌하는 귀여운 산초. 알돈자에게 돈키호테의 마음을 전하는 산초에게 그녀가 묻는다. 돈키호테와 왜 같이 다니냐고. 그러자 산초가 부르는 노래.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내 손톱 하나씩 뽑혀도 괜찮아. 왜 좋은지 설명이 안 돼요. 묻지 마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는.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이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정말 산초다운 답이다. 멜로디도 캐릭터도 재미있고, 특히 좋다는 감정을 얘기하는 방법이 너무 적절해서 산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지, 좋은 데는 이유가 필요 없지. 그냥 좋으니까….’
네 번째 곡은, 결국 나를 뭉클하게 만든,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곡이다 했더니, 혼다의 파워 오브 드림(Power of Dream) 기업PR에 쓰였던 곡이더라. 모두가 돈키호테의 열정과 행동을 비웃지만 마음 속 깊이는 누구나 돈키호테를 품고 산다는 것, 그것을 돈키호테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살라는 진심을 죽는 순간까지 보여주었고, 결국 모두가 돈키호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 죽음이 나를 덮쳐 와도 평화롭게 되리 /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 저 별을 향하여.”
너무 진심이기에 순진해 보이고, 너무 정의롭기에 현실과는 멀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가 이야기한다. “진실의 적은 현실”이라고. 세상은 미쳐서 돌아가는데, 온전한 이성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미친 것이 아니냐고. 꿈을 잃고 사는 것이 오히려 미친 것이 아니냐고.
팍팍한 날들을 적셔줄 단비를 그려봅니다
오늘도 나는 둘시네아를 흥얼거리며 생각한다. ‘꿈’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현실의 벽이 두려워 꿈을 포기하는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좋은 공연 하나가 나의 팍팍했던 날들에 단비를 내려주었다. 모든 공연들이 이 공연처럼 뭔가를 깨닫게 해주진 않더라도, 그 어떤 긍정적인 리프레시는 되는 듯하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들의 여름밤에, 공연 하나쯤은 끼워 넣을 수 있는 여유가 있길 기원해본다.
조성은
ACD | chocopy@hsad.co.kr
매력적인 오답에서 예기치 못한 정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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