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영감
창의성의 또 다른 미학, ‘뒤집어 보기’
‘비틀고’, ‘뒤집어 보는’ 무대 제작의 트렌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고전의 재해석을 꿈꾸는 문화 관계자들에게도 좋은 연구대상이자
벤치마킹의 견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박을 타던 흥부가 쏟아지는 보물에 환호성을 지른다. 멀찌감치 골목길 돌아 그 광경을 바라보던 놀부는 웃음 지으며 말한다. “저 녀석, 이렇게라도 도와줘야 사람 구실하지. 경제관념도 없이 조카들이나 잔뜩 낳으면 어떻게 해? 마냥 순진하기만 해서 내가 남사당패랑 짜고 연극 한번 꾸며봤다. 근검절약해서 잘 살아라, 아우야.”
낯설지만 참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비단 놀부만이 아니다. 사실 요즘 문화계를 보면 이렇듯 익숙한 고전을 뒤틀어보는 경우가 많다. 춘향의 연인이 이몽룡이 아닌 방자였다거나, 신윤복이 사실은 여자였다거나, 세종대왕이 욕지거리를 즐겨 내뱉었다는 설정이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사학자 입장에서는 펄쩍 뛸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문학과 예술의 상상 속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시도해볼만한 흥미로운 실험이자 재미난 가정이다.
현대 뮤지컬에서도 이런 발상의 전환이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 2003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이래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큰 각광을 받은 <위키드(Wicked)>가 그렇다. 요즘 국내에서도 영어로 연기하고 노래하는 투어팀이 내한해 연일 만원사례를 이룰 정도로 뜨거운 작품이다. 뒤집어 보고 비틀어 보는 재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의문·엉뚱한 발상… 새로움
<위키드>가 변형시킨 것은 바로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다. 태풍에 실려 ‘오즈’로 날아온 캔사스 소녀, 도로시. 그녀는 자신과 함께 날아온 집에 그만 동쪽 마녀가 깔려 죽은 사실을 알게 된다. 초록색 피부의 못된 서쪽 마녀는 여동생인 동쪽 마녀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도로시는 다행스럽게도 착한 북쪽 마녀의 도움을 받게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기위해‘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간다.
노란 벽돌을 따라 떠난 여행길, 도로시는 두뇌 없는 허수아비, 용기 없는 사자, 심장 없는 양철인간을 만난다.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렵사리 찾은 마법사의 성, 그러나 무엇이든 해결해 줄 것이라던 오즈의 마법사는 서쪽 마녀를 없애야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일행을 되돌려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서쪽 마녀를 물리친 도로시 일행은 다시 마법사를 찾아와 각자의 소원을 얻으려 하지만, 오즈의 마법사는 사실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기구를 타고 다니다가 오즈로 불시착한 평범한 발명가에 불과했다. 실망하는 일행들에게 마법사는 그러나 나쁜 마녀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허수아비는 지혜를, 사자는 용맹스러움을, 양철인간은 뜨거운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며 모두 원하는 것을 이미 갖고 있다고 일깨워준다. 홀로 남겨진 도로시, 하지만 착한 북쪽 마녀는 도로시가 신고 다니던 죽은 서쪽 마녀의 마법 구두가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것이라 가르쳐준다. 도로시는 동화 같은 나라, 오즈를 떠나 캔사스의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과연 도로시가 본 것이 오즈의 모든 것일까? 어린 여동생의 사고사에 대한 서쪽 마녀의 분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람들을 속이고 살고 있는 별 볼일 없는 과학자인 오즈의 마법사는 용서받을 만한 행동일까? 오즈의 진짜‘ 마법사’인 서쪽 초록마녀의 이상한 피부색은 어디로부터 온것일까?
뮤지컬 <위키드>의 시작은 이런 엉뚱한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됐다. 제목으로 쓰인 ‘위키드’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괴하다’ 혹은 ‘괴상하다’는 뜻인데, 마녀라는 뜻인 ‘위치(Witch)’와도 자주 어울려 등장한다. 제목에서 이미 숨겨진 오즈의 마녀들 이야기라는 해석도 내재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위키드>도 원래는 소설에서 비롯됐다. 이 뮤지컬의 원작은 그레고리 맥과이어(Gregory Maguire)가 1995년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된 <위키드: 괴상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Wicked: The Life and Times of the Wicked witch of the West)>이다. 그리고 이 기상천외한 발상의 전환을 뮤지컬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스테판 슈왈츠(Stephan Swartz)이다. 디즈니 만화영화 <포카혼타스>나 <노틀담의 꼽추>에서 알란 멘켄(Alan Menken)과 함께 작업했던 그는 뮤지컬 애호가 사이에서는 <가스펠)>이나 <피핀>의 제작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뮤지컬 <위키드>에서 그는 작곡과 작사를 맡아 대중의 흥행감각을 읽어내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역발상 <위키드>, 신화를 낳다
<위키드>는 1,4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자면 170억 원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로도 유명하다. 입체적인 무대와 미술적인 완성도는 대작 뮤지컬의 기본인 화려한 볼거리를 충실히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을 만하다. 일부 평론가들은 안무가 평이하다며 불평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위키드>는 세계 상업 극장가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하고 있다.
사실 극 자체로서뿐 아니라, 극장 곳곳에 관객들을 배려한 여러 세련된 디자인들도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를 들자면 브로드웨이의 거쉬윈 극장 입구에 써 있던 “조심 운전 혹은 비행하세요(Safe driving(or flying))!”라는 문구도 그 중 하나다.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빗대어 재치 있게 표현한 홍보문구인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들을 환상의 마법 세계에서 머물게 하려는 제작진의 친절한 배려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위키드>의 인기는 단지 미국에서 뿐만이 아니다.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가나 호주 버전의 공연도 연일 장사진을 이루며 큰 흥행을 기록한 바 있다. 비영어 문화권 중에는 일본 공연도 있다.
2007년 6월 막을 올린 극단 시키(四季)의 일본어 버전 공연은 공연 한 달 만에 반 년 치 예매입장권이 일찌감치 동이 나는 흥행몰이에 성공하기도 했다. 동경 시오도메 시오사이트에 위치한 덴츠 시키 씨어터를 찾아가 보면 극장주변이 온통 초록색의 <위키드> 관련 상점들로 가득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한 세트와 의상, 판타지 영화 같은 소품과 무대도 볼거리이지만, 이 뮤지컬의 감동은 무엇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중독성 강한 노래에서 출발한다. 전혀 다른 배경과 세계관을 지닌 두 여주인공이 함께 경험하게 되는 사건들과 차근차근 쌓여가는 우정의 깊이는 결국 운명의 갈림길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사랑하고 이별하며 그리워하는 이야기는 어느 뮤지컬에나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지만 감동의 밀도는 작품마다 다르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야기의 진정성은 명작을 완성해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위키드>는 특히 음악이 좋은 뮤지컬로도 정평이 자자하다. 노래 하나하나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극 안에서의 쓰임새가 너무 잘 어울려 극성을 지닌 뮤지컬 음악으로서의 존재감을 잘 담아낸다. 글린다가 룸메이트가 된 엘파바를 여성스럽게 치장해주며 부르는 노래 ‘인기(Popular)’나 엘파바와 피예로(나중에 허수아비가 되는 인물로 글린다·엘파바와 함께 사랑의 삼각관계를 이룬다)의 노래 ‘내게 당신이 있는 한(As long as you're mine)’도 뒷맛이 오래 남는 수작이다. 기숙사에서 만난 괴상한 룸메이트에 대해 각자 고향집에 편지를 쓰는 장면에 나오는 ‘이 기분은 뭐지?(What is this feeling?)’도 공연을 보면 한참이나 수다를 떨게 하는 노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넘버는 역시 1막 마지막에 등장하는 ‘중력을 넘어서(혹은 중력에 저항해, Defying Gravity)’이다. 미드 좋아하는 10대들에게는 드라마 ‘글리(Glee)’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한 노래로 초록마녀인 엘파바가 스스로의 사명감을 깨닫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극적인 장치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몇 번만 반복해 듣다보면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수려한 멜로디도 인상적이지만, 글린다와 엘파바가 나누는 우정의 대화는 공연을 보고 다시 감상하면 눈물 나게 감동적인 명곡이다.
벤치마킹 대상으로 주목
‘비틀기’의 미학이 담긴 작품으로 <위키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쉬렉>도 풍자와 해학을 담아내긴 마찬가지다. 동화 속 왕자는 늘씬하게 잘 생겨야 할 것 같지만 짧은 다리에 허둥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포악할 것 같은 괴물은 사실 마음 여린 친구다.
반전의 미학이란 이런 순간에 쓰기 좋은 말이다.
‘비틀고’, ‘뒤집어 보는’ 무대 제작의 트렌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잇따르는 내한공연이 관객들이나 뮤지컬 관계자는 물론, 문화산업계에도 세계 공연가의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면 더이상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다. 특히 우리 고전의 재해석을 꿈꾸는 문화 관계자들에게도 좋은 연구 대상이자 벤치마킹의 견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 jwon@sch.ac.kr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로, 문화산업 전문가이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뮤지컬 평론가이다. 십 수 편의 뮤지컬을 번역했으며, 저서로는 <원종원 올 댓 뮤지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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